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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Sep 08. 2021

밤편지

닿지 못할 서신


어느새 서른을 앞둔 지은 언니에게​


언니, 저는 지금 가로등이 꺼질 듯 말 듯 한 깜깜한 골목에 서 있어요. 자취방을 연희동으로 옮긴 지 이제 9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어느 길로 들어서야 집으로 곧장 향하는지 모르겠어요. 포화 상태인 머릿속을 게워내러 홍제천에서 뜀박질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홍제천 일대 골목길이 제 눈에는 다 똑같이 생겼지 뭐예요. 회색 뉴발란스를 분신처럼 신는 저이지만, 이 순간만은 분홍신을 신은 언니가 되어 노래를 흥얼거려요. 그 구두의 저주는 안중에도 없어요. 오늘은 그저 지름길을 찾아 어서 집에 가고 싶어요.



 ‘길을 잃었다~


(빰빰빰빰빠라빰)


어딜 가야 하알~까.’


-       아이유 「분홍신」



누구보다 잘 알죠? 이 노래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불리는 단골 노래라는 것을요. 예전에는 막다른 골목에서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를 부르며 택시 기사님을 찾곤 했어요. 믿을만한 어른이 정답을 알려주기를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누군가에게는 백 점짜리 정답이 저에게는 오답일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끝 음을 올리며 경쾌하게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언니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제 귓가에 맴돌아요. 헤매고 헤매다가 풀썩 주저앉아 포기를 외치고 싶을 때, 언니를 떠올리며 다시 방황을 시작해요.


가수 아이유를 처음 본 것은 한 음악방송이었어요. 언니, 미아라는 노래 기억나요? 그 방송이 데뷔 무대였잖아요. 그때 저는 열두 살이었는데, 언니는 저보다 다섯 살이 많으니 열일곱이었네요.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간다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미아는 단어 그대로 길을 잃었고, 좋은 날은 언니를 반짝반짝 빛나게 했어요. 언니는 좋은 날의 빛을 흡수해 흑색이 되어 버리지 않고 빛을 잘게 조각낸 손전등을 저에게 건넸어요. 넓은 무대 위에서 홀로 마이크를 잡은 언니가 무척이나 커 보였는데, 영상을 다시 보니 언니도 정말 어렸네요. 열일곱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노래를 불러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저한테 내어준 손전등을 열일곱의 언니에게도 비추어 주고 싶어요.


열일곱의 저는 국어 8등급을 받고 배스킨라빈스 구석에서 민트 초코아이스크림을 혓바닥에 살살 녹이며 눈물을 훔쳤어요.  학년이 300명이었으니까 뒤에서   정도 했네요. 성적표를 받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앞자리 친구와 시험지가 바뀌었거나, omr 카드를 밀려 쓰지는 않았을지. 가능한 모든 변수를 상상하면서요. 한동안 국어 선생님 얼굴도 제대로  쳐다봤어요. 무겁더라도 김애란 작가의   권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문학 교과서의 첫 페이지였어요. 작품을 핵심 정리한 네모 박스로 단원이 갈무리되었는데, 그 박스에는 작품의 주제와 갈래, 성격과 특징들이 오밀조밀 정리되어 있어요. 시 한 수의 여운이 들어갈 여백에는 시의 이모저모를 뜯어서 분석한 국어 선생님의 필기로 가득했어요. 선생님의 필기와 제가 적어낸 답이 다르면 수업 시간에 집중을 안 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선생님의 답이 다가 아닌 것만 같았어요. 선생님이 제시한 오지선다형에서 한 가지 답만 골라야 할 때마다 난처했어요. 화자의 속사정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갈 길이 바빠서 그냥 이거라고 단정하고 가르치는 것 같았거든요. 저자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들었고요.


국어 8등급의 수치심을 마음 한쪽에 품고 서서히 국어와 멀어졌어요. 원고지는 갑갑했고, 글쓰기는 두려웠어요.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새하얀 워드 화면에 ‘나는’을 쓰고 깜빡이는 ‘는’만 쳐다보며 글을 이어가지 못했어요. 대작가들의 잘 다듬어진 글만 읽다가 제 문장들을 보는데 차마 저장까지는 못 하겠는 거 있죠. 이 글로 대학의 합격과 불합격이 나뉜다고 생각하니 손끝에 제 운명이 맡겨진 것처럼 무거웠어요. 고등학교에서의 학업 경험을 1,500자로 작성해야 하는데, 마법 같은 경험도 없었고 글에 마법을 부리는 방법은 더 모르겠더라고요.


올해 한국 나이로 스물넷이 되었어요. 당당하게 4개에 10,000원인 맥주들로 세계여행을 시작한 지 겨우 5년 차네요. 그사이에 저는 두 개의 학문을 전공했고, 일곱 개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관뒀으며, 다섯 개의 동아리를 거쳐, 두 회사에서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활자를 읽어요.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도 희뿌연 골목길에 서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사실 잘 다듬어진 지름길을 알아도 뻔하고 재미없다며 마다할 거예요.


언니, 혹시 데리러 와 줄 수 있어요? 언니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까지는 부탁 안 할게요. 잠깐만 와서 이 길이 맞는지만 봐주고 가요. 날이 캄캄해서 앞이 잘 안 보여요. 눈을 끔뻑거리던 가로등도 잠이 든 것 같아요. 요즘도 저는 가끔 배스킨라빈스 구석에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혀에 굴리며 눈물을 삼킨답니다. 분홍색 구두를 신은 언니는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른다면서요. 비법 하나만 전수해주고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요.


스물아홉은 조금 어때요. 희뿌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긴 하나요. 오 년 뒤에 저는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언니도 아직 골목길에 있으면 저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큰길을 무대 삼아 분홍신을 신고 발이 가는 대로 춤을 추는 언니로 남아줘요.


평안한 밤 보내요.

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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