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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May 16. 2021

산 속에서 만난 발동무

올라가서야 보이는 것들, 내려오며 보이는 것들

발소리, 숨소리, 벌레소리, 계곡의 물소리

머리에 달린 헤드램프의 불빛을 길벗삼아 가파른 산을 오른다.


새벽 4시 30분

앞 뒤로 같이 올라가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에는 내 호흡이 산 속에 나눠줘야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내려갈까? 약수터까지만 올라갈까?

마음은 끊임없이 나와 타협하려 한다.


어느사이 산의 반을 올라왔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던 검은 하늘이 조금씩 푸른 빛을 띄기 시작한다.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굽이진 평지에는 발 밑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고, 이제야 여유를 가지며 쉴 곳을 찾고 대화를 나눈다. "야! 지리산 정말 힘드네". 지리산이라 힘든 것이 아니라, 금요일 자정을 달려 토요일 새벽 산행이라 힘든 것일 수도 있다. 


"선배! 저 주말에 지리산 다녀왔어요"

평소 산과는 거리가 멀 것 같았던 후배가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지리산을 다녀왔단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얼마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상처를 받았는지 자주 술을 마시자던 후배가 주말 사이 동서울터미널에서 계획없이 버스를 타고 지리산 백무동을 갔다왔다며 무용담을 이야기 해준다.


"선배! 마음도 울적하고 해서 지리산 가는 버스를 탔는데, 도착해보니 새벽인거예요. 사람들은 내리자마자 장비를 착용하는데, 저는 정말 휴대폰과 지갑에 신발은 운동화를 신었는데, 한 번 가보자 하고 같이 올라갔죠"

지리산을 운동화를 신고 아무런 대비를 없이 올라갔다는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무모해보이기도 하고, 무식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올라가기 전에 슈퍼마켓이 하나 있더라구요, 거기서 쵸코파이 하나랑 물을 사가지고 올라갔죠. 그런데 선배 그거 아세요? 산에서 사람들이 저를 정말 신기하게 쳐다보는거예요." 그 순간은 정말 몰라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다. "너 같으면 안 신기 하겠니? 고도 1800m 산을 타는데, 왠 젊은 총각이 청바지에  운동화에 쵸코파이와 물이 든 검은 비닐봉투 들고 있으면, 그건 딱봐도 가출했거나, 실연 당한 놈 같지 않겠어? 아니면 실성했던지". 갑자기 녀석이 호탕하게 웃는다. "맞아요 선배, 누가 물어보더라구요. 집나왔냐고, 그런데 더 웃긴거는요. 정상 가까이에 있는 산장을 갔는데 사람들이 라면을 끓여 먹더라구요. 선배 진짜 먹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코펠에 라면과 김치를 조금씩 나눠주는 거 아니겠어요? 불쌍했나봐요. 저 정말 다시가서 거기서 라면 끓여먹고 싶어요" 

산 정상 대피소에서 끓여먹는 라면이라, 그 순간 마음에 없던 호기로움이 솓아났다. "그래 우리 다음주에 라면 먹으러 지리산 가자!"


가끔 아내가 나를 보며 아들 셋을 키우는 것 같다고 하던데, 아무리 도도한 척해도 남자들은 마음의 나이가 20대 초반을 못벗어나는 것 같다.


동서울터미널, 금요일 저녁 11시 50분

지리산 백무동행 버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친한 후배 한 명을 더해 셋의 지리산 야간산행은 전화 한 통화에 결행되었다.

"선배 여기요" 터미널 앞에 모여보니, 다들 집안에 있는 등산장비는 다 긁어모아온 듯했다. 나역시 몇 년 만의 산행인지 등산화가 없어 새로 구입했다.  "선배, 가면서 푹 자야하니 맥주나 한 잔씩 하고 가면 어떨까요?" 자정이 다되어 출발하는 버스고, 새벽산행을 시작해야 하니, 후배의 제안이 듣기에 좋았다. "좋지, 한 잔은 아쉽고, 딱 두 잔씩만 하고 가자"


버스의 승객은 모두 등산객들이었고, 금요일 저녁임에도 만석이었다.

"모두 잘자고, 새벽에 만납시다" 나의 호기로움은 거기까지였다.


버스가 출발하고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화장실을 다녀올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엄청난 생리현상이 몰려왔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한시간 반이상인데, 버스를 세우달라고 하기에는 모두들 너무 곤히자고 있었고, 체면을 차리자니 이미 몸은 체면을 차릴 수준이 아니었다. 어떻게 참은 것인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 버스는 지리산 밑자락에 도착했다.


새벽 산행을 하다보면 발동무가 생긴다.


급하게 몰려왔던 생리현상을 해결하며, 세상을 다 준다해도 그 시기만큼은 화장실과 모든 것을 바꿀만큼 급한 마음, 이런것이 사람마음이 아닌가 싶었다. 늘 '이것이 소원이야'를 입에 달고 사니, 도대체 내가 빌어본 소원은 몇개나 되며 이룬 소원은 몇개나 되는 것일까. 그래서 늘 내가 믿는 신께 죄송한 마음이다. 늘 다급해야 찾으니 말이다. 


아직 산을 오르기도 전인데, 산의 웅장함이 느껴진다. 지리산이구나.

예전 취재를 위해 올랐던 백두산은 낯선 모습에서 오는 웅장함이 느껴졌더라면, 이번 지리산은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산을 찾는 내게 주는 '윽박'같은 웅장함이 있었다.


산을 다니며, 산에도 여성과 남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리산은 그 중에서도 상처많은 여성이란다. 그래서인지 낯선이를 더욱 반기지 않는 느낌이었다. 새벽 4시 30분, 산이 잠에서 깨어나고 드디어 등반이 시작되었다. 헤드렌턴을 켜자마자 무리를 따라 초보산행자인 우리도 급히 발을 맞춰 오르기 시작했다. 떠나기전 들떠있던 마음도 막상 지리산을 마주하니 가라앉아 산을 오르기 시작한 이후 모두가 말이 없다. 물론 우리가 오르기 시작한 백무동 코스가 지리산에서도 정상까지 가는 가장 단거리이자 가파른 코스로 유명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숨소리, 산길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 스틱과 등산화 소리.

다들 말이 없이 머리에 단 헤드렌턴의 작은 불빛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자기 숨소리를 조절하느라 힘들어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다보니 어느덧 앞에 아무도 없이 우리 넷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순간, 뒤에 동생들이 따라오고 있음에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잘 따라오고 있지?". 내가 외로워 뒤를 불러봤다.  "네" 짧은 대답만 돌아온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 작은 불빛이 보인다.  조금 속도를 내서 따라붙어보았다. 

다시 앞사람의 속도에 맞춰 오르던 그 순간 앞사람보다 그 사람의 발소리와 헤드렌턴에 비취는 등산화가 반가웠다. 어둡고 가파른 지리산 초행길에 동무가 하나 생겼다. 발동무.


산을 오르며 배우는 한가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시작한 산행은 10시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장터목대피소에 다다랐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상인들이 모여 물건을 팔던 말그대로 '장터'였던 곳이란다. 겨우 베낭하나, 그것도 버거워 스틱에 등산화에 땀을 잘 배출한다는 등산복까지 차려입고도 헉헉대며 올라온 이곳에 짚신신고, 머리에 광주리나 등짐을 지고 올라와 해발 1600여미터에 위치한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니 기가찰 일이다.  


이 산을 오르기 얼마전 아나운서 선후배들과 해발 556m 정도 되는 북한산 비봉까지 올랐었는데, 마지막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는 곳을 오르기 위해 약간의 암벽등반을 하듯 서로 밀고 당기며 올라가서 뿌듯하게 사진을 찍던 순간이 생각났다. 당시도 바람이 강하게 불었었는데, 땀과 성취감에 사진을 찍는 우리 앞으로 샌들을 신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때의 허탈함. 그 허탈함이 다시 지리산 장터목대피소의 유래를 보며 느껴졌다.


"선배, 빨리 라면 끓여요" 그 와중에 우리의 지리산 등반 목표가 라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간혹 내 많은 직업과 그 도전의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내 대답은 '무모함'이었다. 계획으로는 어떤 도전도 시작할 수 없다. 무모함만이 도전을 할 수있는 힘이되고, 그 뒤에 무모함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지리산 도전도 그랬다.


산 정상에 가까워 먹는 라면의 맛이라. 누가 이 라면을 만들었을까. 피로를 씻어주는 국물이 맛이라니, 나는 죽을 때까지 라면은 못 끊을 것 같다.


지리산의 여러 정상 중 가장 높은 천왕봉까지 앞으로 한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목표가 정상이 아니라 산장에서 라면을 같이 끓여 먹는 것이었는데', 물론 피곤이 심하게 몰려들기도 했다. 정상까지는 짐을 정리하고나서도 한시간은 족히 올라야 했다. 내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실은 이 산행을 시작으로 그 뒤에도 지리산을 9차례 더 도전했는데, 그 중 세차례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오르던 중 나와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는 다양했다. 그 중 두번은 같이 오르던 사람들의 컨디션 때문이었고, 한 번은 장터목산장까지 가니 이미 가봤던 정상이니 다음에 가지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두 핑계였다.


산은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늘 되어있지만, 우리를 정상으로 올려주지는 않는다. 


2018년 4월 20일, 마지막으로 지리산을 그것도 홀로 올랐던 날이다.

MBC를 나와 선거캠프의 대변인으로 홍보총괄로 일하며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었고, 첫도전에 실패했다.

발표가 나던 날 동서울터미널로 향해 지리산행 버스에 올랐다.

해발 1915미터의 고지를 오르며 외로움을 발동무에 의지하고, 하산하는 길에 쌓인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14시간에 가까운 산행을 통해  나는 '선거에는 이기지 못했지만, 산행에서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을 얻었다. 그리고 선거와 산행 모두에서 나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았다. 

이 산행을 마지막으로 나는 지리산을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생각도 없지만, 그날 무리한 산행으로 다친 오른쪽 무릎상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젠 그 가파른 길을 내려올 수 없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리산은 그간 10번의 산행에서 많은 추억과 나를 성찰할 기회를 주었고, 이름모를 발동무들로 인해 외롭지 않게 해주었다. 때론 내 고민을 깊은 산 밑에 뭍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누군가는 오늘도 그 산을 오르며 많은 발동무를 만나고, 자신과 타협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산을 내려오며 자신의 고민을 깊이 뭍고 오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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