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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Jan 26. 2021

비오는 날의 수채화

비오는 날의 세가지 기억

밤새 잠을 설치고, 한껏 센티멘탈해진 기분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차에 올랐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이런 날은 음악도 싫고 빨리 달리는 것도 싫어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비오는 날이 우울하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면~" 

언제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대학 때 선.후배들 앞에 서서 불렀던 노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권인하, 김현식, 강인원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90년대 초반 크게 히트를 쳤던 이 노래를 하필 비가오던 그 날, 노래를 잘 하지도 못하는 내가 긴장하며 부르다 음이탈로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말았고, 이후 다시는 부르지 않게 된 노래다.


비는 좋아하지만, 비오는 날은 우울한 기억이 많다.


얼마전 업무로 인사를 하게 된 분과의 첫 만남에서 그 분이 청북이라는 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초등학교시절 전학만 7번 하던 중 그나마 2년 이상 다닌 학교가 청북초등학교(국민학교)였다. '세상이 많이 좁구나' 


그 학교에 전학간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비가 쏟아지던 장마철이었다. 지금생각해도 그 날 내가 왜 우산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등교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등교할 때도 비가 왔지만, 집에 쓰고 나갈 우산이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날 학교에선 반장과 줄반장 선거가 있었다. 남들보다 학교를 일찍 들어가 8살이었던 나는 키가 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뭐하나 특출난 면도 없었다. 이미 여러번의 전학으로 진도도 뒤떨어져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전학간지 일주일 만에 줄반장에 뽑힌 건 이제 친구들을 알아가는 입장에서 기쁜 일이었다. 


하교를 하려는 데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집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중간에 논까지 있어서 논두렁을 건너야 했고, 한 켤레밖에 없는 운동화는 이미 다 젖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께 줄반장이 된 것을 자랑하려고 달리고 있는데, 저 멀리 우산을 받고 막내동생을 등에 업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우리집 가는 방향과는 꽤 떨어진 곳이었는데 의심을 할 겨를이 없이 달려갔다. 그 때 그 분을 왜 어머니라고 생각했을까. 비가 너무 많이 와 이제 더 적실 것도 없었고,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식구는 남편을 세번이나 여의고 아빠가 다른 세 자녀를 키우시는 아주머니 댁에 별채 같이 지어진 방 한칸짜리에 사글세를 살고 있었다. 우리방과 주인집 사이에는 우물같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방문이 우물을 향해 있었고, 엎드리면 보이는 유리창이 하나 작게 나 있었다.


내 기억에 어머니는 늘 아팠는데, 온통 비를 맞고 돌아와 보니 여전히 어머니는 누워계셨다. 나는 아무말 없이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어머니 옆에 누워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는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그 작은 창으로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셋째인 막내 동생을 낳으며 임신중독으로 고생하셨던 것이다. 어머니 나이는 29살이었다.


1995년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다.

군을 제대했고, 집은 파산했고, 신문배급소에서 먹고 자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기였으며, 꿈이라는 단어와는 가장 거리가 멀었던 시기다. 

그때도 장맛비가 많이 왔고, 그 장마가 길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숙식을 하던 신문배급소 생활은 새벽 3시에 시작된다. 그건 동절기와 하절기를 가리지 않았다. 자신이 맡은 분량의 신문에 지역 광고지(간지)를 끼우는 작업을 하면 중간 배달원에게 자신이 배달할 분량의 반을 맡기고, 무게 때문에 나머지 반만 싣고 돌린다. 약속된 장소에서 나머지 분량을 받아 배달을 하면 대략 5시 30분, 그렇게 두시간 반이 훌쩍 지나고 다시 숙소에 모여 아침식사를 한다. 반찬이 무엇이 되었든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다.


오토바이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비오는 날은 최악이었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빨리 달릴 수 없었고, 신문을 배달하던 방배동의 특성상 언덕길이 많아 브레이크를 자주 잡아야 하는 내리막길은 나같이 겁많은 초보에겐 최악이었다. 그 날의 불안감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왠지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와 목이 많이 아팠다. 빗길에 한참을 굴러내려와 나와 오토바이 사이에 젖어서는 안되는 신문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아픈 것 보다 신문 걱정, 신세한탄 그리고 막막함.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고 끝내 울음이 터졌다. 22살이었고, 가난했고 미래가 없었다. 늘 배고팠고 힘들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비오는 새벽이라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그 곳에 누군가 나타나 타박을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팀장님이었다. 늘 꾸지람만 하던 그 팀장 형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나를 일으키며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 때 그 안도감이 지금도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행동에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당시는 휴대전화라는 것도 없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는데, 아마도 중간지점에서 신문을 가져가야 하는 내가 나타나지 않자 찾으러 나섰던 모양이다. 


"괜찮아?"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던 팀장님의 걱정이 고마웠다. 잠시 혼날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네, 그런데 신문이..." 그 와중에도 신문 걱정 뿐이었다. "넌 지금 이 와중에 신문 걱정이야? 얼른 오토바이타고 들어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문배급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었다. 다세대 주택의 2층에 방은 두 개, 부엌이 하나.

큰 방에는 일곱 명이, 작은 방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명 정도가 머물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한 사람은 자신이 안기부(국정원) 출신이라고 했다. 잠복 근무를 하고 있단다. 그땐 왜 웃음도 나지 않았을까.

또 한 사람은 목사님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늘 성경을 손에 쥐고 다녔다.

집을 가출한 중학생도 있었다. 그 아이와 많은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대화는 없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팀장 형이었다. 늘 묵묵했다. 다부지게 생긴 체격과 얼굴, 다른 신문배급소에서 팀장 역할을 하다 왔다고 했다. 서툴었던 나는 늘 혼날까 전전긍긍했는데, 그 곳을 나가기 위해 월급을 정산하러 사무실에 들러서야 표현되던 모습보다 마음이 넓었던 형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신문배급소에서 새벽 일을하고 오전에는 모 항공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날 빗길 사고 이후 출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돌리던 신문을 반만 돌리게 되었었다. 그런데, 마지막 월급 정산을 받던 날 급여가 줄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네 100부는 너희 팀장이 대신 돌렸어. 연락되면 고맙다고 해" 그 팀장 형은 내가 그만두기 며칠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떠났고, 나는 연락처도 이름도 몰랐다. 그냥 팀장 형이었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으면, 아니 숫기가 조금만 있었으면 신문배급소에 연락처를 물어 안부와 감사함을 전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미안하고 아쉽다.


가끔 새벽 출근을 하다 신문 배달 하는 분을 볼때면, 그 시절이 오마주되어 팀장 형이 생각난다. '지금 뭘하고 있을까?' 


큰 비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처량하다. 뭔가 씻어 내려가지지도 않고 후련하지도 않다.

2013년 7월 23일이 그랬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 던 날이었다.


"준호 뭐하니?" 

MBC문화방송 역사상 가장 긴 파업이었던 2012년 1월 30일에 시작된 170일 간의 파업 뒤 대기발령을 받았다. 이후 아나운서국이 아닌 다른 부서에 배치되어 책상도 없고 소속감도 없어 매일매일 회사를 배회하던 시기였다. 우리집 근처에서 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살고 계셨던 어머니의 전화였다. "네 어머니,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어요."  유난히 더웠던 2013년의 여름, 시원하게 오는 비도 아니어서 더욱 끈적거리고 후덥지근했다. 당뇨와 혈압으로 건강이 늘 걱정되어 일산 백병원에서 채 몇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다세대 1층에 살고 계셨던 어머니의 전화에 왠지 걱정되어 "댁으로 갈게요"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차를 돌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집 앞에서 벨도 눌러보고 노크도 해봤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전화기를 꺼내 막 전화하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어머니의 모습에 생기가 없었던 것 같다. 아들들은 왜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괜찮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인지. 흠뻑 젖은 듯한 어머니 모습에 '샤워를 하셨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늦게 열린 문에 걱정이 되어 "어머니 어디 안좋으세요?" 라고 물었다. "응, 내가 점심에 해 먹은 칼국수가 체했는지, 네 전화 끊고 가슴이 답답하다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아들 온다는 소리에 문 열어주려고 겨우 손가락 따고 정신 차렸다." 그 때 어머니께서 정신을 차리려 열손가락을 사혈을 하셨던 흔적은 여동생이 장례 뒤에 집을 치우다 발견했다.


지금도 가끔 그 순간을 꿈으로 만난다.

그게 어머니와 이별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 지금은 꿈 속에서라도 서둘러 119를 부르고 응급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자주 그 순간이 반복된다.


어머니의 '괜찮다'는 그 한마디는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머니 병원에 가거나 약을 좀 사다 드릴까요?"

"아니야 지금은 괜찮다."

이게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다.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쓰러져 가는 어머니를 정신없이 받아 눕히고, 인공호흡도 해보고 심폐소생술도 해보다 업고 뛰었던 그 순간도, 119를 부르는 것보다 몇 백 미터 앞의 큰 병원 응급실로 업고 뛰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나의 짧은 생각에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아니 자책하자면 '나'때문이었다. 

119를 부르려다 집 주소가 기억이 안났고, 집의 위치를 설명할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업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뛰기는 커녕 겨우 들쳐업은 어머니, 그것도 비를 맞으며 겨우 겨우 걸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소리를 칠 용기가 없었다.


그 자존심과 짧은 생각이 어머니를 잃게 만들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그 순간 내가 어머니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환갑이 되시던 해에 세상과 이별을 했다.


비오는 날 차 시트에 열선을 켜고 앉아 있으니 없던 피로로 졸립기 마저 하다. 

그냥 내리는 비는 좋은데, 나는 늘 비오는 날이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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