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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Apr 22. 2019

분홍 날개- 1화

 소연이 분홍 날개가 달린 고양이를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봄 어둑해질 무렵이었다부모님이 밤늦도록 다투는 날에 소연은 종종 다음날 육상부 훈련이 끝난 후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더 돌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대로변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검은 점박이 무늬가 있는 흰 고양이가 골목길 정 가운데에 새초롬하게 앉아있었다은근한 분홍빛을 띤 날개가 고양이 등 양 옆으로 가지런히 접혀있는 이 고양이는 날개를 제외하고 어느 동네 길냥이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른한 듯 졸고 있었다소연은 눈을 아주 세게 감았다 크게 떴다여전히 고양이에게는 분홍 날개가 달려있었다고양이는 입이 얼굴만 해 질 때까지 크게 벌려 하품을 한번 하고 소연을 흘깃 본 후 느릿느릿 오른쪽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소연이 20살이 된 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그녀는 어렵사리 들어간 체대를 자퇴한 후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어머니 사망보험금으로 서울에서 가장 싼 전셋집을 구했다생활비를 최대한 아꼈는데 역시나 사망보험금에서 조금씩 돈을 빼서 썼고 가끔 일을 했다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재혼을 한 아버지는 소연 명의로 들어둔 어머니의 사망보험금에는 욕심내지 않았다다행이었다소연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데 보냈다간신히 일어나 끼니를 해결할 때는 캔에 들어있는 참치와 편의점에서 파는 볶음김치를 찬으로 먹었다다부졌던 체격은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는 걸그룹 멤버처럼 작고 가냘퍼져 갔다


 분홍 날개가 달린 고양이를 다시 만난 건 23세 생일 오후였다소연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마지막 남은 생수통을 비우고 나니 텅 빈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장을 보러 갈 때가 온 것 같군그녀는 외출을 위해 옷장을 열었다. 8년 전에 보았던 분홍 날개가 달린 고양이가 옷장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기 집 문을 함부로 열어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연을 쳐다보던 고양이는 눈을 탁구공만 하게 뜬 그녀 앞으로 무언가를 앞발로 쭉 밀어냈다털썩고양이는 뒤를 돌아 옷장 안쪽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졌다

 고양이가 밀어 떨어뜨린 물건은 흙먼지가 범벅이 되어 걸레처럼 보이는 작은 회색 운동화였다한쪽 신발에 사인펜으로 5학년 2반 김소연이라고 쓰여 있었다소연이 육상부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사준 운동화였다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을 달렸다새 운동화를 신고 땅을 디디면 마치 고무총 위에 놓인 돌멩이처럼 그녀를 어디는 튕겨서 데려다줄 것 같았다그녀는 한참을 서서 이제는 낡아빠진 운동화를 손에 들고 쳐다보았다

 분홍 날개를 가진 고양이를 소연은 핑크라고 이름 지었다소연은 다음날 오후 밥솥 위에서 핑크를 발견하였다이 작은 마법 배달부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소연은 이번에는 말을 붙여보았다하지만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핑크는 분홍 날개를 살짝 펼쳤다 접을 뿐이었다핑크는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긴 천으로 된 무엇인가를 물어 소연 앞으로 던졌다소연이 집어 올려보니 자그마한 원피스였다. 6학년 첫 생리를 했을 때 어머니가 진짜 여자가 되었다면서 사준 노란 물방울무늬 무늬가 있는 원피스소연의 눈에는 눈물이 순식간에 반쯤 차올랐다핑크는 밥솥 위를 내려와 주방 안쪽 벽으로 유유히 사라졌다소연은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곧장 안방에 있는 노트와 펜을 들어 원피스에 대한 기억에 대해 써 내려갔다어제저녁 핑크에게서 받은 운동화가 다음날이 사라진 것을 보고 소연은 이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핑크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소연에게 물건을 가져다주었다어느 날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만들어 먹은 쫄면을어떤 날은 그녀가 짝사랑했던 고등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께 썼던 연애편지를고등부 육상부에서 첫 훈련을 한 날 어머니가 사주신 타이머 손목시계를고등학교 2학년 때 항암 투병을 하는 어머니를 위해 소연이 만든 해독주스 등등이렇게 핑크는 매일 이주일 동안 물건을 가져왔고 그 물건들은 다음날이 되면 사라졌다소연의 노트는 한 권이 거의 채워져 갔다그녀는 매일 물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쓰기 위해 잠을 줄여 나갔고 핑크가 어떤 물건을 들고 올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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