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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 han Jun 08. 2019

을지로 20길 16, 503호

알렉스룸의 시작

작업실로 완성되었던 알렉스룸 모습.


여기 이런 곳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 물으면 사실 간단히 대답하기가 어렵다. 을지로에 들어오는 여러 공간 중 일부의 상투적인 대답일 수도 있으나, 알렉스룸 역시 처음엔 개인의 필요에 따라 공간이 만들어졌고 하필 그 추운 겨울 동안 어두웠던 사무실이 100여 일에 걸쳐 탈바꿈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간을 만드는 프로들은 이 작은 곳을 만드는데 무슨 석 달이나 걸리느냐 묻겠지만, 을지로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본 사람들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오래된 건물들은 어떤 벽은 너무 딱딱하게 만들어져 못조차 들어가지 않고 어떤 벽은 망치질만 해도 쉽게 부서져버린다. 수도가 있지 않으니 기사님을 불러 파이프를 연결했지만, 어떨 때는 녹물이 나오고 어떨 때는 이유도 모른 채 막혀 좌절하기도 한다. 보통은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을 얻어 시작하는데, 철거, 수도, 전기 설치부터 커튼 하나를 다는 그 순간까지, 용감하게 시작했지만 두어 번쯤 사소한 무력감에 무릎을 꿇을 무렵, 오랫동안 멈춰있던 공간은 겨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알렉스룸도 처음엔 사무실이었고 혼자 머물 수 있는 작업실 같은 성격으로 만들어졌다. 십여 년간 경제활동을 했던 나는 문득 잠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대가를 받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나는 그냥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별 것 아닌 결론을 얻었다. 퇴사를 결정하고 한 해동안 다른 걸 해보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동안 힘들었을 테니 좀 쉬어도 되겠다고 말했지만 일에 지쳐하던 것을 접는다기 보다는, 그동안 했던 일과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듯 퍼져나가는 퇴사라거나 안식년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었으나, 별 수 없이 사람들에게 편의상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을지로로 들어왔다.


지금 하고 싶었던 일은 프로로서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일의 대가를 약속했던 돈으로 받는 것에서 벗어나, 돈을 잘 벌지 못해도 된다면. 또는 대가가 노력에 비해 덜 주어지더라도 억울해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대신 예전보다 좀 천천히.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그동안 성실하게 벌어 모아 놓은 돈이 있었고, 또 일정 기간 정해진 시간만 익숙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고 다시 내가 잘할 수 있는 경제활동으로 돌아가야 할 거라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일을 한다라는 건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이 있는 것이고. 그것만이 목적이 아닌, 과정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잘 못하더라도.


회사에 다닐 때였으니 퇴근을 하고 을지로를 걸으며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우선 을지로를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잘 모아서 독립출판이라도 해볼까. 이제 회사가 없으면 아침에 일어나 어디를 가야 하나. 어디 앉아 있을 데라도 있어야 할 텐데. 처음에 알렉스룸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사실 필요한 것들은 별로 없었지만 집에 있던 의자들과 물건들을 가지고 오고, 눈을 뜨면 여기 나와 사진들을 정리하고, 또 거리에 나가 사진을 찍어야지. 작업실을 겸해 시작되었던 을지로의 몇몇 카페들처럼. 이곳에 다른 사람들을 들일지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우선 이 공간이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장소가 계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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