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a Aug 31. 2020

못 먹을 딸기라도 좋아

영화 <하나비>




<못 먹을 딸기라도 좋아

- HANA - BI. sin.1997. 기타노 다케시.



 그간 영화를 보는 것을 게을리했다. 그러니 당연 글을 쓰는 것도 게을리했다. 책을 읽는 것도, 좋은 음악을 찾아 듣거나 운동을 하는 것 모두. 모두 게을리했다. 손목이 아플 때까지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볼 예정 없었음), 트위터(할 계획 없었음)를 했다. 쌓여가는 마음함에는 두 번 다시 들어가 보지 않았다. 사지도 않을 옷들을 한 몇천만 원 정도 위시리스트에 담아두는 취미를 갖고 있었는데, 요즘 나오는 옷들은 다 개옷마냥 작거나 개떡같이 커서 아무것도 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취미도 대형 실패.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아 놔 봐. 놔 보라고. 괜찮다니까. 진짜 괜찮다고. 아무도 잡는 사람 없는데 일단 놓으라고 말하는 아저씨들의 싸움처럼.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찔끔 옮겨와 보자면, 나는 어중간한 사람. 쓰는 사람이, 보고 느껴야 할 사람이, 그 모든 걸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온전한 사람이라 감히 말할 수 없지. 생은 숨을 참지 않는 이상 스스로 지속되지만, 조금 더 의지를 가지면 끝나기도 하는 법. 그러니 나는 노력해야 했다. 다시 한번 더. 눈 가리고 아웅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억지로 숨을 참을 순 없었으니까.



 게으른 내가 조금 덜 게으른 나의 눈치를 보았다. 힐끔힐끔. 아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네. 살이 더 쪘네. 어떡하지. 그러고만 있었다. 



 왜 방구석에서 노트북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단절의 시대(깡촌) 이상으로 나는 영화를 보고 있지 못할까? 오히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바깥에 나가는 지금이 더 <지독한 단절의 시대> 일 텐데. 영화를 보면 뭐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데 말이야. 내가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어도 생산적인 일을 한 듯한, 마치 공부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는 왜 그때만큼 영화를 잘 들여다보지 못할까? 목록을 정해 봐야 할 것들을 쌓아두고 하루에 몇 편, 일주일에 몇 편, 한 해에 이따만큼. 도장깨기 하듯. 엎드려 누워 턱이 아플 때까지 영화를 보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불 꺼진 방에서 후레시를 비춰 책을 보던 그 마음은 다 스마트폰에 잡아먹힌 걸까? 이것도 참 좋은 핑계다. 스마트폰은 구실이야. 영화는 산더미만큼 쌓여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영화는 그대로인데. 나만 변했나 봐.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봐서 그럴까. 의미 없는 자기반성을 통한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영화를 밥처럼 먹는 친구들 사이에서 야금야금 좋은 영화들(이 말이 정말 웃기다)을 쫓아 취식해온 지난 몇 년. 패왕별희를 비롯한 끔찍하게 좋은 영화들 또한 나에게 찾아와 주었지만 이제사. 드디어. 진짜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좀 짜증 난다.




 그가 감독한 영화를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의 영화는 더더욱 모른다. 기쿠지로의 여름이 첫 번째였고. 그 엉뚱함이 기대와 낯설었다. 사실 그래서 좋았다. 엉뚱함이 존재하려면, 말 그대로 엉뚱해야 신선한 거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당신이 해내야 하니까. 그가 등장한 다른 영화를 본 것이라곤 시끄럽고 유난스러운 배틀 로열뿐인데. 그는 왜 이렇게 익숙할까. 친근한 거하곤 달라. 그는 익숙해. 표정 없이 바가야로를 외치고 발길질을 하는 일본의 유명한 아저씨인데, 왤까. 함께 있게 된다면 별로 친해지고 싶진 않다.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한 줄 요약해보자면 "홍보용 시놉시스 이후가 준비되어 있는 것". 그러니 드러나는 줄거리가 전부가 아닌 영화인데 그런 의미에서 기쿠지로의 여름보다 나에게는 하나비가 압승 압승 압승.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어 졌는걸. 



 이유 없이 삽입된 영화 속 장면은 없다. 이유 없이 삽입된 장면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쓰레기라 말해도 되겠지. 개봉 당시에는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을 남겼었다는 글을 보았는데, 나는 둘 다 좋아해서 남이사. 상관이 없다. 적어도 내가 본 하나비에서는 허투루 스크린 너머로 발을 딛는 사람이 없다. 모두 넉살 좋은 웃음을 짓거나, 기만당하거나, 기만한다. 계획 없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럴 마음이었던 거야. 그런 걸 가지고 태어난 거야. 이 영화 속의 사람들은. 그렇다면 갑자기 죽는 사람들의 죽음의 당위와 명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그야, 사람들은 영화가 아닐지라도 하루아침에도 잘만 사라지는걸. 






 흔히들 기타노 다케시의 작업 스타일을 느닷없는 순정과 가감 없는 폭력, 그리고 그것들을 응시하는 긴 시선으로 정리하는 듯하다. 물론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 야쿠자와 조직 보스의 여자들과 뜨거운 어쩌고.. 이랬더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법한 주제일 것이다. 21세기가 되도록 그런 영화는 불필요하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를 그나마 거부감 없이 즐기며 볼 수 있는 이유는 그는 여자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우연과 도피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 한다. 적어도 자신이 만든 비트 다케시의 유니버스 속에선.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보면 죽어서도 입만 동동 물 위로 뜬 붕어가 연상되듯,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떠올리면 세포 하나하나가 늙음과 동시에 생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갓난아이와 노인의 경계 문대기. 그는 관계 속에서 삶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켜 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시작과 끝이 하나의 선상에 동시에 존재하게 만들었다. 팽팽 돌아가는 쥐불놀이 깡통처럼. 어린아이들에게는 머물 공간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을 들고 찾아갔다. 본인의 스타트라인과, 완주지점을 잊지 않고 상기시켰다. 본인 스스로에게 말이다. 


 설령 무엇을 낳고, 무엇을 죽이더라도 시선을 회피하지 않는 것. 버르장머리 없이 의연한 삶의 태도다. 본받을 수 있다면 본받아서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이다. 




 감독 본인이 끔찍한 사고를 겪은 뒤로 인생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여전히 폭력적이고,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살아감과 죽어감과 같은 과정들을 외면했던 지난날들에 자기만의 방법으로 닫힌 문을 두드린다. 그가 그린 수많은 그림들과, 현장에서 만들었던 이야기들, 어린아이를 위해 행했던 망나니짓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찡그려지는 얼굴 표정까지 모두. 모두 고해성사다. 





 다시는 아픈 당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리. 맥없이 고꾸라지는 나를 굳건히 세우리. 너를 웃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거야. 설령 내가, 우스꽝스러워지더라도. 한없이 한없이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당신이 내게 못 먹을 딸기를 나누어주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 할 거야.





 아마도 이전처럼 글을 쓰려 노력했다면 지금쯤 영화 속 사건들과 줄거리를 하나하나 훑으며 내게 좋았던 것들을 말했을 것이다. 그에게 어떠한 것이 작용하여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낱낱이 적었을 것이다. 형사들 사이의 관계가 어땠고, 인물의 성향이 어떻게 변화하며, 그들이 여행했던 모든 자리들에 대한 고찰을 적었을 것이다. 몇 안 되는 대사들을 줄줄 외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타노 다케시의 무식한 자기 고백에도 휘둘릴 만큼 멍청해져서 오늘만큼은 영화를 본 후의 나를 이 글에 더 남겨두고 싶다. 깊이 고민하거나, 꼭꼭 씹거나, 칸을 맞춰 종류별로 나누거나, 줄 맞춰 세우거나, 광이 날 때까지 닦아서 누군가에게 건네는. 그런 행동들보다 오늘은 드물게도 자기 파괴적인 운동이나 하다가 쓰러져 잠들고 싶다. 나 아닌 타인의 삶에도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떠날 사람을 붙잡아보고 싶다. 죽을 걸 알면서도 내일을 기다려보고 싶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약간의 기대를 해보고 싶다. 당신의 어려운 문제를 나만큼은 모른 척 웃어넘기고 싶다.



 바닷바람에 엉성한 연을 날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잠깐 기다려달라 말해야지. 나와 함께 살아온 사람의 죽음까지 책임져야지. 당신 덕분에 나는 사진 한 장 없이도 행복하니까. 미련과 후회는 수건에 감싸 숨길 거야.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낡고 노란 테두리를 닦아 희게 만들 거야. 어디든 달려가 눈밭에 파묻힌 당신을 잡아당겨 줄 거야. 검은 글씨를 쓰고 빨간 글씨는 피해 갈 거야. 가장 올바른 모습으로, 가장 영악한 짓을 해서라도 당신에게 선물을 줄 거야.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 시간을 줄 거야. 나를 마구 이용하라 할 거야. 당신의 앞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경찰도 강도도 형사도 남편도 아버지도 운전수도 마술사도 될 수 있어. 한밤중 무서운 총알로도 당신을 웃게 해 줄 거야. 






나는 그래야 해. 

당신은 그래도 돼. 








매거진의 이전글 존재와 관찰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