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임 낫 데어>
영화의 시작은 철저한 1인칭 시점이었다.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무한한 회색으로 모호함과 동시에 분명함을 두른 채 나타난 이 영화는 관객에게‘카메라 속 누구 씨의 삶을 살아볼 기회’를 제공하였다. 마치 이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이라도, 당신이 그로 다시 태어나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듯했다. 그것은 대담한 전제이며, 거센 출발이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다음 시퀀스는 철저한 3인칭 시점이었다.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방금 전의 ‘나’는 설명하는 자에 의하여 일단은 6개의 자아로 나누어졌다. 철저히 그들의 말에 의하면 방금 전의 ‘나’는 시인이자 예언자이며, 무법자이기도 하고, 사기꾼이기도 하며, 스타 오브 일렉트릭시티이자, 조만간 드러날 ‘훔쳐보는 자에게 못 박힌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이미 알고 있다. 이 영화가 밥 딜런의 전기라는 것을. 그래서 아마 저 모든 이들이 다 ‘밥 딜런’의 자아 혹은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방금 전의 그 공간을 큰 공연의 백스테이지였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문화의 시대적 흐름을 다루는 영화에서 배경지식은, 이 영화를 만약 그런 것이라 칭한다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내용을 빠르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생략된 뒷부분까지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은 이미 인식하고 있는 그 사실들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르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모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지가 아닌 백지의 상태로 이 ‘흐름의 영화’를 좇아가는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쓸 글은 카오스이며, 버터 덩어리이기도 하고, 우주비행사이며, 수박이고, 그의 말마따나 모든 글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존재 ; 육에서 칠까지.
처음에 들려온 총성은 분명히 여섯 번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은 일곱 번이 되었다.
그렇다. 1950년부터 어딘가에 이르기까지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 채 존재했다. 살아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죽음의 경우라면 말이다. 그들은 틀 속에 살기를 거부하였다. 내가 부르던 저항 가요가 어느샌가 나를 옥죈다면, 그것마저 멈추는 것.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 것과, 목적지를 모른 채로 어딘가로 향하는 것.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구원받는 것. 모든 것들이 다 동일선상에 있었다.
그들은 죄다 허상과, 거짓부렁과, 진실되지 않은 관계와, 가짜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것들만이 그들을 증명한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매일같이 변했다. 변해왔다. 보호받는 데 지친 이들이 육에서 칠까지 닿았던 유일한 이유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다만, 매 순간 덜컹이던 그들에게 있어서 어느 순간에도 공통되게 독립적인 무언가, 어떠한 불확실함 속에서도 일관되게 홀로 설 수 있는 뚜렷한 것은 그것은
‘but song is something walk by itself’
나라는 ‘존재’는 어딘가에 ‘있음’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의 교차점이 내 존재의 기반이 된다.
고로 존재(being)가 존재함(be)으로서 존재(belong) 하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i’m not there)는 것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 생각은, 그가 유기적 장소(there)를 부정함으로써, 즉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존재의 가장 큰 뿌리이자 굴레를 잘랐다는 것이다. 더 멀리 가기 위해 그가 일찍이 시작한 일 또한 다리를 자르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실제로 자르진 않았다. 그는 어차피 사라질 모든 것들에 애석해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있었다-라는 사실(한계)을 부정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제 어디에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없앰으로써 영원하고, 유한하지 않은 것을 얻었다. 어디에도, 그리고 지금 여기에도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죽지 않는 음악이다.
하지만 불멸의 음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시, 꼭 필요한 하나의 경우를 더 생각해보자.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면? 만약 나만이 있다면. 나만이 이곳에 있다면 세상과 세계라는 말이 본래의 성질을 가질 수 있을까? 기록과 인식이 없다면 존재가 존재하던, 사라지던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음악이 음악 혼자 존재한다고, 들려질 수 있을까?
그렇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관찰자에 관한 것이다. 존재의 필수 조건인 ‘시간과 장소’의 교차점을 넘어 나를 ‘기억’하는 당신이 있고, 나와 ‘만났던’ 당신이 있다면 바로 그때. 관계와 시간의 흐름이 있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나는, 혹은 우리는, 혹은 그것은 존재를 넘어선다. 비로소 존재(being/Existence)를 넘어서 ‘실존(be/exist)’으로 간다.
지금부터는 실존의 매개체, 피핑 톰에 관한 이야기이다.
관찰자 ; ≠ Peeping Tom
예술가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하나의 언어이다. 작품을 통해 말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세상이라 함은, 좁게 말하면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서 사람을 만난다. 자꾸 예술가 예술가 거려서 몇 세기 전의 반 고흐 얘기를 하고 자빠진 것처럼 보이고, 의미 없이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우리도 예술가이다.(!!)
예술가, 혹은 작품이 존재의 입장에 놓여있다면 관객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다. 그들은 지켜봄으로써 예술을 실존하게 하는, 사실상 예술을 함께 사유하는 존재들이다. 한 가지 예술이 100명의 관객을 만나면, 나는 그것이 100개의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답이 없는 것, 느낌으로 공유하는 언어. 그것을 예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무게의 차이라고 하면 좀 그럴 수는 있지만, 대중문화의 경우의 예술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짚어보고 싶다. 대중문화라는 것은 정말 정말 정말로 관객과의 관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진득한 사이이고 ‘기대’라는 새로운 명목과 잣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언제나 a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 또한 b라는 사실인데, 우리는 자꾸 대중문화 앞에 서면 기대하는 데만 익숙해진다.
지금부터 예를 들어볼 것은 아임 낫 데어의 플롯 속에서 가장 뚜렷한 갈등 구조로서 다루어진 쥬드 퀸의 이야기이다.
우선 첫 번째, 쥬드는 단 한 번도 저항가요를 위한 저항가요를 부른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순수한 것, 그 노래를 불렀을 뿐이고, 다만 사람들이 좋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리고 두 번째. 사람들은 쥬드에 목을 맨다. 마치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들을 정확한 언어로 대신 구사해주는 것 같다며, 자신의 심연을 노래해준다며 열광한다. 거의 사실상 신격화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느 날 쥬드가 청바지에 통기타와 저항가요가 아닌 면바지에 전자기타, 그리고 록을 들고 나와 밴드원과 연주하자. 사람들이 달라진다. 대중들이, 관객들이, 관찰자가 태도를 바꾼다. 그들은 말한다. 넌 변했어. 당신은 배신자 유다야! 그건 저항가요가 아니야!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저 장면을 보며 꼭 존재와 관찰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근데 도저히 말할 거리가 없다. 관찰자라는 목차를 달지 않고, 피핑 톰이라 부르는 이유는 첫 시퀀스에서 쥬드를 ‘조만간 드러날 지켜보는 자(피핑 톰이라 말함. 원래는 관음의 의미를 지님)에게 못 박힌 사람’이라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보기에 유다!라고 소리치며 대못을 박는 씬들은 쥬드가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예수상 밑에 찾아가 ‘왜 내게 그대의 흔적을 가지게 하였소?’라며 올려다보며 물었던 이유를 생각해보게 할 정도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지금 내가 뭘 찾고 싶은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뭐 나는 저런 관객이 아니라는 되도 않는 자기변호를 하고 싶은 건가?
나는 단지 이 영화를 존재와 관찰자라는 두 가지 단어로 풀어보고 싶었다. 어려운 말들, 끝까지 모호하기만 한 소리들을 내뱉는 이 영화를 보다 간편한 프레임으로 이해하고자 했는데, 내가 만든 프레임에 내가 갇혔다. 단단하고 꽉 막힌 벽에 부딪혔다. 이 글에는 결론이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부딪힌 벽과 똑같았다.
그렇다. 이 단단한 벽에는 영화 속 모두가 부딪혔다. 관객들도, 쥬드도. 로비도. 그렇다, 우리는 속았다! 흑백 영화에는 ‘흰색’과, ‘검은색’ 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또 간과했구나. 그들은 잘 타지도 못하는 바이크에 올라 어딘가로 곤두박질치기 위해 달렸던 것이다.
존재도 관찰자도 아닌 ; 무한한 회색
내가 자진해서 달려가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첫 목차였던 6에서 7까지가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 마지막에 시간이 흐름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자아로서 표현된 패스터 존(잭 콜린스+)이 무엇에서 무엇이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둘 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잭 콜린스와 패스터 존은 각각 밥 딜런 본인의 황금기와, 그 이후의 시기이다. 홀연히 나타나 포크송을 부르다 홀연히 사라진 그 사람은 절대적 존재에게 자기 자신을 맡겼다. 정확히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귀의하였다.
사실 나는 무교다. 그래서 이걸 이런 식으로 해석해도 될까 싶긴 하다. 그들에겐 그저 멈춰줄 사람이, 그저 포용해줄 사람이 필요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우디 거스리 / 로비 클락의 목차가 지나가고 쥬드 퀸이 메인으로 주로 다뤄지기 시작하면서의 갈등 구조는 예수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로 전락하는 과정이다. 그는 거리에 나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다가, 어느 순간 매질을 당한다. 사람들의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못이 박힌 채 그곳에 남았다. 쥬드는 자기 자신이 지금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에게 물었던 것이다. 왜 내게 당신의 흔적, 성흔을 남겼느냐고. 자신이 사람들에 의해서 신격화가 되고 있던 그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었던 그날부터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Yes, '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on the sand?
Yes, 'n'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s, is blowin' in the wind
(사람이라고 불리기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만 하나?
하얀 비둘기는 모래에서 잠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하나?
포탄 사용이 영원히 금지되기 전에 얼마나 많이 포탄을 쏘아야 하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네-1963.)
실제로 밥 딜런은 1966년 7월 29일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친다. 하지만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그저 ‘칩거’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하실에서 녹음을 계속해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세간에서 사라졌던 그는 7년 뒤 다시 무대에 서게 되고, 1979년 말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 임을 고백했다. 그가 영화 속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처럼, 그는 3장의 앨범을 연달아 그러한 노래들로 채워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전기 영화이기에 사실에 근거해 이런 결말이 나온 것일 테지만, 나는 많은 픽션을 거부하고 이것을 택한 토드 헤인즈의 뜻이 궁금했다. 종교적 신앙심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다가, 그저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아니고 남도 아닌 존재에 관한’, 무엇보다 ‘판타지스러운’ 것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보았다.
기독교의 가장 큰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용서이다.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 내어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밥 딜런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미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위해 그 길을 택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어떠한 순간에도 정답보다는 의문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단지 지쳐서 그랬을까? 그저 다시 노래하고 싶었기에 굳이 칩거 후에 선교사로서 살아갔던 것일까?
이것은 진정한 포용의 과정이기도 하고, 어쩌면 다시 한번 ‘맥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 종교에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통해 ‘나’는 없어지고, 미움도 없고 뭣도 없다. 물음보다는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있는 곳이다. (정정하자면, 신이라는 비 물질적, 절대적 존재에게 묻는 곳이겠다) 당신들이 내게 원하던 확답, 분명한 태도가 바로 이것인가? 내가 이런 걸 부르면 당신들이 만족하겠느냐, 식의 ‘쇼’도 분명 있었던 것 같다. 당신들이 깎아내릴 수 없는 ‘예수’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나의 억측일 뿐이다. 그는 아직도 살아있고,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노벨 문학상으로 몇 억몇 천만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글을 쓰고 노래를 한다.
여기까지 썼지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굉장히 관심 있게 그려낸 작품이구나, 라는 것만 느낄 뿐이다. 어떻게 해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말 그대로 잘 표현된 작품인 것 같다. 쫓아가기 바빠서 이제는 잠시 쉬고 싶다.
자, 이제는 숨을 고르며 이 영화의 마지막을 떠올려보자. 그는 또다시 달리는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향할 뿐이라는 것을. 토드 헤인즈가 타오르게 했고 훅 불어 꺼버렸던 이 영화의 작은 불꽃을 잊지 말자. 그는 늘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이다.
내 생각이 태어나는 순간에 나는 존재한다.
난 보고 듣는다.
둥근 한 획을 긋는다.
깊은 곳에서 교향악이 휘젓는다.
2017.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