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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Nov 06. 2020

못나도 살 수 있을까

영화 <수성못>

<못나도 살 수 있을까

-수성못. sin.2017. 유지영.




뒤로 굴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부딪히면 돌아서고. 좁은 곳에서 둥실둥실 빙빙 도는 게 고작인 오리배야. 

그걸 위해 그곳에 사는 오리배야. 9번 10번 표가 붙은 오리배는 우스꽝스러운 두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옥희야, 희섭아, 은파야. 이렇게 불러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안에서 열심히 발을 굴리는 사람이 없으면 물에 떠 있는 게 고작인 낡은 오리배야. 


너도 못 바깥의 삶을 꿈꾸니.





치열하고 비열해도 부족한 삶, <수성못>




  영화 <수성못>은 대구 수성구의 수성못을 배경으로 한 자살 시도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치열하고 비열해도 이 삶에서는 무엇이 부족한가? 열정? 노력? 혹은 믿음, 소망, 사랑? 아무래도 그런 것보단 견고한 결말에 한줄기 균열 내기 아닐까. 삶이 일상을 풍화시키는 것은 서울에서 눈 뜨고 코 베이듯 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예정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n포 세대를 낳은 세상에 살고 있다. 


 모나지 않게 골고루 깎이도록. 둥글게 둥글게.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겠지. 관계로 점철된 삶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관계의 시작도 끝도 아닌 과정이니까.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며 이 이야기는 반드시 실패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편입 실패, 취직 실패, 서울살이 실패, 군 복무 실패, 하다못해 자살도 실패. 하지만 이 실패가 비단 영화의 암울한 측면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물가에서 벗어난 뭍에서의 생활을 꿈꾼다. 그곳은 축축한 마음의 가장자리이기도 하고, 머나먼 서울이기도 하다. 또는 삶과 맞닿은 죽음이기도 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가는 삶이기도 하다. 인생을 움직이고 싶다는 열망이 그들을 과열시켜 팽창시키고 각자의 파편이 다른 곳으로 튀었을 뿐. 사방이 고인 물뿐인 수성못에서는 어떻게 해도, 어디로도 흘러갈 수 없기에 이것이 청춘의 역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닫힌 문안에서는 새로운 것이 바깥으로 향할 수 없으니까. 순환되지 않는 사고는 정답 없이 가라앉고 만다. 그들에겐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가 앞인지를 아는 게 더 필요한 일이었을 뿐. 



 인물들을 기록하는 매개체로서 자주 사용되는 캠코더는 렉 버튼이 눌릴 때마다 삐-소리가 나며 녹화를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때때로 거울에 비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관객이 관찰자임을 상기시킨다. 무엇에 비추어 보는 것은, 무엇에 비추어 생각을 해보는 뜻으로도 쓰이니까. 나는 그 씬들 중 희준(남태부)이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안경을 쓰고 웃어 보이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나도 한동안, 나를 가리지 않고서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니까. 모든 것이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약을 다 모았다고 ‘이번엔 잘 끝날 수 있겠지’ 묻는 미루(이유하)의 말은 내가 직접 뱉었던 대사였다. 그들이 하는 말들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벽 보고하는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내가 달고 사는 푸념과도 닮았기도 하고. 


 허망하다, 말하고. 미안하다, 말하는 그 사람들. 나만 죽으면 다 편해질 거라고. 하지만 영화를 돌이켜보면, 누군가는 정말로 경찰 공무원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단 한 구의 시체도 보여주지 않는 일관성 또한 그러하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자살 시도자였던 박씨(강신일)의 마지막 투신도 시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비디오로 영상을 찍을 때도 그는 예행연습만 하고 실제로는 죽음을 포기한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 꼭 죽게 해드릴게요, 와 같은 대사가 나와도. 다 함께 그곳으로, 같은 문구를 적어도. 감독은 살아있는 것을 쉽게 죽여 농담처럼 스크린에 놓아두지 않았다. 


 이 영화가 당신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일으켜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삶은 지속시킬 것이다. 희정의 표정에 속이 따끔따끔해도, 어찌어찌 잘 살려고, 부단히 잘 살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영목의 행동에 눈가가 쓰라려도. 그렇게 어찌어찌 죽으려고, 무던히도 잘 죽으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놀랍게도 수성구의 수-성은 목숨 수(壽)에 재 성(城)자를 쓴다. 목숨을 구축하고 지키는 성이기도 하고, 목숨이 묻힌 묘지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새 삶을 결심하고, 어떤 이는 헌 삶을 버리는 곳. 꿈결인가, 차가운 수성못에 불빛으로 밝힌 내 사랑.. 잇새로 노래가 나오는 곳. 오래전 프러포즈했던 사람이 연인이 떠나 몸을 던지는 곳, 수성못. 이 영화, 이곳이 아니었더라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제 죽음을 상상해 본 사람이라면 극 중에서 희정(이세영)보다 영목(김현준)에게 훨씬 더 공감하고 몰입했을 것이다. 나조차도 자살 예방 센터에서 자살 동호회 사람과 연락하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마음에 잠가둔 자물쇠를 떼어내기가 힘들어서. 한번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떠오르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려서. 제 버릇 개 못 주고, 못 죽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살아서 나와 그를 ‘우리’라며 동일시했으니까. 나도 문득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 해주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 희정을 우리의 바깥에서 미워했다. 못돼 빠진 가시나 소리를 듣는, 하나부터 열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는 그녀를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건 제 삶에서 없는 일이라는 듯한 그녀의 단호함. 그녀는 더는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희준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자신의 인생이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게 되어 이제는 기타 소리를 듣게 되어도.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게 되어도. 그녀는 희준이 삶을 움직이기 위해 사이비에 이끌린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는 실패 이후에도, 그다음 실패 이후에도 치열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아니오’다. 세로로 뚝 떨어지는 크레딧의 가파른 경사를 보라.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불편하다. 깜깜한 내면으로 질주하던 20대들도 어느 순간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여유를 찾을 것이다. 습관처럼 먼 미래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도, 오로지 지난날의 잘못을 떠올리던 사람들에게도,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인지하게 되는 영화적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삶이 가장 멋진 영화니까.




 우리들의 실패는 무언가를 해야만 할 거라 믿었던 지난날이다. 이제 그날들에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자. Must to. Have to. 다 안녕, 안녕, 안녕. 수면과 가까워지려면 몸에 힘을 빼자. 적어도 내가 받아들인 이 영화의 마지막 인사는 그랬으니까. 허튼짓 말고 마음의 중심이나 잘 찾아보자.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에 제대로 된 마음의 추를 매달아보자.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체되어 깊은 우울 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꿈꾸는 사람들의 발자취로 움직이는 오리배처럼, 앞으로 하면 좌회전, 가운데로 하면 직진, 뒤로하면 우회전일 테니까. 그게 이 영화 이후의 삶을 살아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희정과 영목 사이, 희준과 희정 사이를 오가며 짧은 인생을 살아왔다. 영화 속 희정의 단어 암기 예문이었던 ‘I do not envy your predicament.’ 처럼, 더는 서로의 곤경과 궁지를 부러워하거나 비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느새 내 귀에도 그 기타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내가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 기쁘다. 영목이 자살 방지 센터에서 봉사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 영화를 보고 이러한 글은 쓰지 못했을 테다. 그러니 대단하게 갱생되지 않더라도 괜찮아. 발밑에 시체를 두고있어도 한번 살아가 보면 돼. 살아가긴 해보자. 가시나에겐 새벽 두 시조차 가당치 않은 세상이더라도 괜찮아.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말해야지. 부족하고 부족해도 내버려 두면 삶은 계속될 테니까.








 


“잇츠 리얼리 굿 투 비 얼라이브. 해피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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