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a Jun 20. 2021

우선은, 일단은.

영화 <아무도 모른다>

<우선은, 일단은.>

-아무도 모른다. sin 2004. 고레에다 히로카즈.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qy8v4lWr_lfhMMHLVuwfpVCEjsgJBOBD

*글을 쓰며 들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두 곡을 모아둔 링크를 첨부합니다. 영화의 ost와는 무관합니다.

아래의 글과 함께 들어보세요. 



나 여기 있어요.


냉동실 문을 열어보지만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약속했던 크리스마스와 새해, 유키의 생일도 지나고 이제는 여름이다. 스크린 속 집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나오지 않는다. 남들 다 가는 학교에는 가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덩그러니 빈집에 남아있다. 돈도 다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화장실은 집 안에 있지만 쓸 수 없다. 공원에 들러 빨래를 하고 빈 통에 물을 받아야 한다. 아키라는 동네 편의점에 들러 점주 몰래 알바에게 폐기 음식을 얻어야 한다. 터덜터덜 살금살금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삼각김밥 몇 개를 불이 나간 냉장고 안에 넣어본다. 얼마나 갈진 모르지만, 우선은 이렇게라도 버텨보자. 엄마는 가방 몇 개 들고 떠난 사이 자신의 성을 후쿠시마에서 야마모토로 바꾸었다. 시게루는 자신들이 나눠 마실 물까지 죄다 화분에 부어버린다. 이 아이들의 각기 다른 아버지는 자신들이 낳은 새 생명을 부정한다. 방울 달린 가방을 메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소리를 남겨도 사키는 타인에 의해서 ‘죽임’ 당한다. 두 눈 부릅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진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서 스스로를 견뎌야만 했던 아이들. 동화라기엔 타겟을 성인(成人)으로 하는 이러한 영화가 언제까지나 재생 되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사건과 감정, 그것을 통한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를 기본 수단으로 표현하는 예술 장르 - 드라마. 그리고 그 장르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의 작품만큼 ‘휴먼 드라마’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또 있을까? 가끔 판타지와 범죄가 가미되는 그만의 세계관이지만 이번만큼은 한 단계 더 세밀한 수식어를 부여하고 싶다. 바로바로 ‘패밀리 드라마’. 패밀리 이슈, 패밀리 드라마 뭐라고 부르든. 내가 이러한 장르를 지금 발명해야 한다면, 시대를 막론하고 그가 가장 적격일 테니까. 


그의 영화에서는 언제나 가족이 문제가 되고, 가족을 통해 성장하고, 가족을 통해 상실한다. 어떠한 사건이든 ‘가족’이라는 체에 쳐지지 않는 이상 서사는 진행되지 못한다. 이 글을 쓰기 이전의 나는 <세 번째 살인>을 봤고,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어느 가족>을 덧붙여 감상했다. 아직도 그의 많은 작품이 가득 남아있지만, 감히 한 번 내가 겪은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감독론의 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비슷한 예로 그와 함께 자비에 돌란을 거론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 <아이 킬드 마이 마더>, <단지 세상의 끝>, <마미> 등을 떠올려 보자면 그는 주인공에게 보다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이미지가 강하다. 직접 겪어온 경험을 각색하여 주인공을 자신의 페르소나로서 활용하는 편. 소수자의 입장으로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며 같은 아픔을 겪고 살아온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내곤 한다. 두 사람 다 한 감독이 꾸준히 가족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경우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 그 자체를 작품마다 조명하는 느낌이다. 등장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기보단, a 가족의 경우 -  b 가족의 경우 -  c 가족의 경우 등으로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변수를 무대 위로 올리는 캐스팅 디렉터의 역할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덕에 수많은 관객이 어떠한 형태의 가족을 겪어왔던지, 그의 영화 중 하나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과 관계 맺기 마련이니까. 지금은 떠나갔더라도. 처음부터 있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 




기억하고 있나요?


중학생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새 동네로 이사를 온다. 둘은 같은 빌라의 사람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며 당부한다. 집에 어린아이는 없다고. 큰애뿐이라고. 그러니 시끄러울 일은 없을 거라고. 집주인은 다행이라며 덧붙인다. 둘만의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여행용 트렁크에서 조그만 아이 둘을 더 꺼낸다.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트렁크 밖으로 나오지만, 아직도 그들의 이사는 끝나지 않았는지 첫째 아키라는 둘째 교코를 데리러 역에 마중을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엄마 한 명과, 아이 네 명. 엄마 한 명과 아키라와 교코와 시게루와 유키. 엄마는 보통 늦게 들어오고, 자주 사라진다. 그 엄마의 아이들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그들만의 룰에 갇혀있다. 아키라는 엄마로부터 종종 ‘아이들을 부탁한다’라는 말과 함께 생활비를 건네받는다. 생활비가 떨어져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날에는 동생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말을 걸어 본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달리 그들의 부모는 마땅히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길 거부한다. 잔인하게도, 영화 속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한다. 둘째 교코가 피아노 살 돈을 포기하고, 엄마는 술에 취해 들어와 노래하는 꿈이 있었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꿈을 버리고 엄마는 뒤늦게 꿈을 쫓아갈 동안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무리의 바깥으로 밀려난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몇 살 위의 또래인 사키 뿐이다. 사키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 울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같이 매미 구멍에 관해 이야기하고,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돈을 마련해준다. 흰옷을 입고도 맨손으로 땅을 파 유키를 아포-초코와 함께 묻어주기도 한다. 배불리 먹으라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가 마지막으로 느끼는 마음이 부족함이 아니길 바라면서. 사키는 지금 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아픔을 제 것처럼 인지한 유일한 타인이다. 안정적인 직장이 있거나,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직계 가족이 아님에도. 사회복지사나 경찰이 아님에도. 이유를 불문하고 이들의 곁에 당연히 남아준 유일한 사람. 아이들이 바라던,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곁에 있어준 단 한 사람이다. 




돌아와 줄 거에요?


감춘다고 숨겨지나, 주워 담기엔 이미 엎질러진 슬픔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이 지금도 불현듯 스쳐 지나간다. 함께 이 영화를 앓은 사람들과 이야기한 후에야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감정을 조금씩 서술할 수 있었고, 내가 방관자로서 동조한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서 한 발짝 벗어날 수 있었다. 감독은 이야기의 큰 전환점이 되는 유키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불행 포르노적인 연출 기법을 선택하지 않고, 죽은 아이의 파편을 통해 관객들이 직접 유추하고 깨닫도록 유도한다. 더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게 만든다. 그러고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를 멈춤으로써, 미래는 다르기를 그저 막연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객체로 바꾸어낸다. 지나간 일은 아무리 안타까워도 바꿀 수 없었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이 궁금해 이 글을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미루지 말아요. 


임시방편이 아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환경을 아이들은 필요로 한다. 자라는 몸에 맞추어 꺾어 신지 않아도 괜찮을 신발과 계절에 맞는 새 옷을 살 수 있는 정도의 충분함을 바란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이미 죽은 아이를 되돌릴 수 없었고, 컵라면 용기에 정성스레 키운 화분이 베란다 밖으로 떨어진 순간 되살릴 수 없었다. 아니 언제까지고 흙과 물, 햇빛만 있다면 영원토록 자라날 식물을 그렇게 작은 그릇에 가두고 키울 수 없었다. 뿌리내릴 곳이 있어야 딛고 일어설 수 있는데. 어른이 되도록 자라날 수 있었는데. 이미 찢어 강바닥에 던져진 종이를 건져 올릴 수 없었고,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억지로 데려올 수 없었다. 부족한 돈을 땅을 파서 만들어낼 수 없었다. 위로 힘껏 던진 음료수도 손바닥으로 한번 추락하고 나서야 다시 던져 올릴 수 있었고 영원히 하늘에 띄워둘 수는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딘가로 숨고 싶게 만들고 관객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영화는 끝까지 자신들에게 주목하기를 원한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진 못하고 그 작은 손으로 소맷자락 끝을 살짝 붙잡는 정도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껏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지만, 우선은, 일단은. 이 영화를 만듦으로써. 이 영화를 본 당신들을 세상에 남겨둠으로써. 감독은 자신이 영화화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에 대한 본인의 리액션을 취했다. 극영화의 가장 중요한 시스템인 연기(演技)의 기본은 언제까지나 액션 /리액션의 반복이다. 이제 남겨진 아이의 시선은 당신에게로 향한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이 선사한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막연함 뒤에 질식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고지서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본 당신. 당신은 이 영화 이후, 언제, 어떻게, 어디로 움직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노래를 들려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