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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 Jul 04. 2021

3차원의 여자

영화 <스파이의 아내>


*이 글은 단속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내가 쓰는 글의 원본 판형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형태와 구조를 바꾼 채로 새로운 글로 쓰일 수 있음을 명시한다.


<3차원(three Dimensional)의 여자(女子)>

-스파이의 아내. sin 2020. 구로사와 기요시.




긴 글을 지루하지 않게 읽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오늘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통해 음악을 틀어두고 글을 읽어보세요.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qy8v4lWr_lcZ4JDfkFX1qKNivwrRgPa0



                 

*아래의 글에서는 상당 부분 네이버 지식백과와 어학사전 등을 참고하여 옮긴 사전적 정의들을 포함한 문구들이 적혀 있다. 인용의 출처는 글의 가장 아랫부분에 링크를 첨부하여 남겨두도록 하겠다.


*또한 최근 작성한 두 개의 영화 글 <내가 노래를 들려줄게 - 레토>, <우선은, 일단은. - 아무도 모른다>와 마찬가지로 이 글들은 숭례문학당에서 열린 영화 읽기 / 토론 49기 수업을  듣고 작성하게 되었다. 같이 이야기 나눠주신 한창욱 선생님과 다른 분들께 모두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물론 내 글을 매주 읽고 피드백을 보내주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가 이토록 이해하고 싶었던 타인의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 관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우선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지난날 가장 강렬히 원하던 것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자.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는지 말이다.




목적을 가진 채로 스테이지에 입장하기.


인지할  없었던 곳들이 있었다. 점이 생겨나고(0차원), 점과 점이 만나 선을 이루고(1차원), 선과 선이 만나 면을 이룬다(2차원). 그리고 마침내, 면과 면이 만나며 평면 좌표에서부터 평면 내에 생성 가능한 입체 공간으로 변화한다. 우리가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 3차원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t, time.  시간이 합세하며 가보진 못했차마 그려낼 수도 없지만. 꿈꾸고 상상하는 4차원의 세상이 열린다.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아인슈타인 이후 상대성이론을 통해 현대인이 꾸준히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시공간(spacetime)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수학과 과학이라는 학문을 탐구하는 일은 이미 일어난 현상을 거꾸로 되짚어가며 그 원리와 과정을 밝혀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화산이 터졌다. 근데 왜 터졌을까? 지구의 온도가 오르고 있다. 근데 왜 그랬을까? 왜 여러 가지 방정식과 함수들로도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을까? (예, 루트 2를 구하시오.) 이전의 잠자리는 70cm에 육박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왜 잠자리가 더 작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했을까? 같은 의문들에 역으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며 ‘왜’를 밝혀내는 일인 것이다.


차원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도 그러했다. 우리는 지구에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차원을 인식하면서 함께 성장하지 않았다. 3차원의 세계에 덩그러니 태어났고, 알고 보니 그랬다더라-라는 식으로 점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고 가보지 못한 미래를 상상해본 것이다. 1차원에서부터 진화해온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4차원의 미래직접 발을 담가본 사람도 없을 것이고. 우리는 결국 주어진 현재를 통해 나머지 모든 것들을 해석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탐구의 자세가 영화를 읽어내는 일과도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특히나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보고 나서, 마치 지금처럼 <스파이의 아내> 같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말이다. 각본을 공동집필을 했거나, 현장의 스태프였다고 할지라도 그 영화의 모든 인과관계와 사회적 맥락과 시대적 배경을 100%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연출 / 감독 본인조차도 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을 것이다.


사전을 인용하자면, 차원이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의 개수.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차용하여 스파이의 아내 속 인물을 좌표평면 위에 놓고 해석해보고자 한다. 시작은 좌표평면이겠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덩그러니 놓인 작품의 전시를 요목조목 관람하는 방법. 


2020년 봄, 일본. J 호러 장르의 거장으로 불리던 ‘구로사와 기요시’가 처음으로 시대극에 도전하며 <스파이의 아내>를 통해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인들에게도 너무나 친숙한 얼굴의 배우 ‘아오이 유우’가 주연을 맡고, 일본 국민 호감형으로서 드라마나 영화 외에도 cf 다작 배우인 '타카하시 잇세이’가 남성 주연을, <아사코>와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로 인기를 끌었던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남성 조연을 맡았다. 쓰다 보니 점점 더 연관성이 있는 것 같지만, 아사코의 감독이었던 하마구치 류스케가 각본을 맡았다.


처음 이 영화를 소개하던 기자들은 <스파이의 아내>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를 최대한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하여 배급하고 홍보하는 데에 사용했을 것이다. *’일본의 거장이 스스로 까발린 세계 2차 대전 패전의 기록, 731부대의 만행 - 생체 실험 폭로, 제국주의를 비판한 일본인.’ 등등의 제목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덮으며 말이다.


우선 나는 가장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이 영화는 정말로 *이러한 영화인가? 오히려 무작정 ‘반일영화’라고 마케팅하는 것보다, 극 중의 인물들이 마주했던 딜레마를 더 조명해야 하지 않았을까? 딜레마라는 것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좋을 때가 아니라,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데. 맹목적인 충성심 혹은 정의감에 사로잡힌 사람, 또는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스파이의 아내가 되지 않고서는 미쳐버린 여자의 영화라고 읽어내기엔, 너무 얄팍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심경의 변화와 고민은 성큼성큼 걷지 않았다. 오히려 망설이는 발자국을 꾸준히 남겼다. 제 입으로 스파이라 고백하는 이는 하나도 없고 한 사람의 아내만 남은 영화이기에 극 중 누구도 스파이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 영화는 스파이 한 명 없이도 첩보 영화만의 서스펜스를 자아내게 만든 극(espionage 장르물)이며, TV 방영을 우선한 뒤 영화로 재편집된 작품이지만 설명할 때 가장 ‘연극적이다’라는 수식어가 많이 달릴 만큼 탈-매체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다.


한마디로 복합적이어서 재미있다. 방향성을 가진 인물들의 욕망이 스크린을 뚫고 나오고 그것들이 각자의 진로를 방해하기도 하면서 관객에게 자신의 우선순위가 뒤바뀌는 모습을 마치 노름을 하듯이 힘차게 섞어 흔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처음 극장에서 보았을 때처럼 어디까지가 인물의 연기 속 연기이지? 어디까지가 1막이고, 되짚어 돌아가 보면 그들은 전혀 다른 마음이었을까? 계속해서 자신들을 관찰하게 만들고 추리하는 시선을 만드는 점이 관객들과 체스를 두는 것 같다.


영화나 연극에서도 마스터숏을 길게 찍거나 액팅이 길고 복잡할 경우 동선의 위치를 바닥에 마스킹하여 표시하기도 한다. 촬영을 염두하고 테이핑 하면 배우에게는 보이고 카메라엔 보이지 않아,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헷갈리지 않고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관객으로서는 그것이 꾸며진 (계획된) 일인지 애드리브인지(계획되지 않은) 알 수 없다.


이 영화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대해 고민하고 수행하고자 하는 배우들의 모습과, 스스로 극을 진행하려고 하는 약간의 작위적 행위,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활용한 메타포와, 연극적 공간 해설을 통해 사람의 선택이 작용하는 순간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통해서라도.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극 중에서 인물의 주변이 하얗게 (화면이) 탔다-고 할 수 있는 여러 컷의 등장에 대해서다. 촬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적정 노출을 맞추는 것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며, 모더니즘 시네마에 이르며 여러 가지 원칙들을 일부러 무시한 채로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정말 가히 충격적인 선택이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나는 아직도 그 장면들이 왜 그렇게 촬영되어야만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감독의 투지를 읽었다.




네이밍 센스에 대해서 감탄해보기.


나는 내가 만드는 것과, 내가 읽어내야 할 것(책, 영화, 공연, 전시, 음악, 춤 등등) 모두에 있어서 ‘제목’에 굉장한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 무제라고 적힌 작품이 있어도, 왜 무제(無題)라고 붙일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 생각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꽉 막혀 있고 답답하다. 제목은 그런 강박적인 나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날을 상상할 창구이며, 어떠한 줄거리나 포스터 한 장 없어도. 감독의 인생과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알지 못해도. 정보 전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틈을 벌려주는 지렛대다. 또한 정보전달 이후 정보 수용 - 상상의 역할로 이어지기까지.


그런 의미에서 <스파이의 아내>라는 제목은 너무나 흥미롭고 짜증 난다. 누구보다 이 영화의 주인공에 합당한 사토코 (아오이 유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라는 주체적 인물의 부속품처럼 묘사된다. 말 그대로 스파이(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설명한다)의 ‘아내’이다. 심지어 일관적이지도 않다. 당신 때문에 스파이의 아내로 ‘매도’되어도 되겠냐고 묻다가, 스파이의 아내가 되겠다고 선뜻 말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결심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그의 남편 유사쿠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주체적 발언 위에 자신의 프레임을 덧씌운다. “당신은 스파이의 아내가 아니라고.”


이다지도 복잡한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느꼈던 감상 1은, <백만엔걸 스즈코>이후로 아오이 유우라는 성실한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멈췄던 나의 행적을 후회한다는 마음이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등의 작품을 모두 즐겁게 봤었지만 그저 그녀를 일본의 아이코닉한 배우라고만 생각했었다. 한 시대를 표방했으나 이미 지나간 아이돌 스타처럼. 그래서 혹시나 그녀의 그 상징성이 누가 되지는 않았을까, 어림없는 걱정도 했었다. 그녀의 다음, 그리고 그다음에 올 것을 믿지 못했다. 이 영화 속 사토코는 타인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자아를 구축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런 사토코를 연구해서 연기하는 아오이 유우의 모습은 가히 인상적이고, 또 인상적이어서 사실 나는 이 글을 쓰기도 전에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이 영화를 봐달라고 애원했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허사가 아닌 경험의 누적과 축적이기에 지금보다 더 많은 얘기와 사건이 있었던 과거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 역할극 (role - play)에 대한 논의가 무엇보다 가장 활발한 지금. 1차원 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서 나의 남편이 코스모폴리탄입니다. 라고 제목을 지었어도 주체인 ‘나’. 내가 무슨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보다 나와 엮인, 그것도 가부장제의 남성으로서 엮인 관계라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러므로 나는 감독이 의도하였든, 아니든 차라리 노골적으로 스파이의 ‘아내’라는 role(관계 내에서의 역할, 위치)을 부각하는 작명을 했다고 생각한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내가 읽어낸 <스파이의 아내>에서의 유사쿠의 포지션은 사토코가 자신의 삶을 되찾아가는 데에 있어서의 연극 무대 장치와도 같은 사람이다. 필요에 따라 스포트라이트를 쏘고, 단을 쌓아 올리는. 남성의 도움 없이는, 무지몽매한 여성이 각성할 수 없는가? 와 같은 시점에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그 마지막 장면이 남편으로서의 ‘배신’으로 읽히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당신을 나의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것보다도 더 우선시하는 끈끈한 나의 동포로 받아들입니다. 하는 것으로 읽혔으니까. 무관심이 질투가 되고, 매도당했다는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건 도박이 되고, 묻지 말라는 사람에게 끝까지 묻고 또 묻는 변화까지 일궈내게 했다. 당신의 눈이 된 것만 같아 기뻤다는 그 사람이, 스스로 본인의 눈으로 황망한 바다를 마주할 때까지.


당신을 지키려면 나에게 질문하지 마,라고 말했던 유사코가 영화의 시작부터 함께했던 ‘영화 놀이’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나는 ‘역할극’이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췄듯이, 지금은 ‘놀이’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비밀스럽고, 폐쇄적이고, 물질적이고, 기록적이었던 영화. 그것이 그들만의 놀이로서 연습되기까지.  




입혀져 있는 이미지와 내가 입혀나갈 이미지.


이제 드디어 내가 제목으로 가져온 <3차원의 여자>에 관해서 이야기할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점, 선, 면의 차원에서 아오이 유우가 연기한 사토코라는 캐릭터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여성은, 성의 측면에서의 여자. 특히 성년인 여자를 뜻한다고 한다. 굳이 제목을 여성이 아닌 여자라고 사용한 점은 아들자 자를 쓰는 웃긴 표현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성. 戾聲.

틀린 음의 어그러질 '여'자를 쓴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아오이 유우가 연기해온 첫 번째 배역들에 길들여져 있다. 관습적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자와 취하는 자가 모두 이용하게 된다고들 한다. 우리는 아오이 유우라는 무궁무진한 배우를 사토코 이전에 오래 전의 아오이 유우로서 만난다. 하나의 점으로서. 그래서 자꾸 이 시대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그녀의 포지션이 ‘어그러졌다고’ 본인도 모르는 새에, 심지어 자신이 페미니스트일 경우에라도(필자의 경우) 여성 혐오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가부장제에 의존적이고, 본인의 진취적인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매도하게 되기도 한다.



*두 번째 여성. 女聲.

여자의 목소리를 뜻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또 다른 여성에 집중해보자. 이것은 우리가 두 개의 점(아오이 유우라는 배우와, 그 배우가 이번에 연기한 사토코라는 배역)을 이은 선으로서 인식하는 되는 방법이다. 바로 계속해서 위협적인 존재들(군 위계질서를 표방하는 헌병인 카이지 등의 인물)이 등장하거나, 주역인 사토코가 주역으로서 홀로 서지 못하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이 경험과 시간을 보내고 아픔을 말하고 있는 발화자에 집중하는 것이다. 바로 여성의 목소리에. 그녀의 목소리에.



*세 번째 여성. 厲聲.

성이 나서 큰 소리를 지름. 또는 그 소리.


오미고토(ミゴト)데쓰!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일본어에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크레딧이 올라간 뒤 검색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미고토-는 훌륭하다(스고이, 스바라시)라는 말보다도 더욱이 ‘완벽하다’에 가깝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서 어쩔 수가 없는 것을 뜻한다. 선과 선이 이어져 이제는 면이 생기고 그 면들이 만나 다층적인 차원을 만들어낸다. 인물과 인물이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들이 합쳐져 <스파이의 아내>라는 하나의 영화로서 갈무리된다. 그리고 이 감탄사만큼이나마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오이 유우가 내지른 절규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 가지 여성이 모두 모여서 결국 보이는 것은 여자고, 아내였으니까. 아들자 자와, 누군가의 아내라는 역할이 남았으니까.


카메라의 시선이 그녀를 아래에 남겨두고 위로 떠난다. 이제 그녀는 그곳에 남겨졌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느꼈는지 기록하고 기억하여야 한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아니 사람에 따라서 70억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복잡했던 시대상 속에서의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보려고 노력한 작품이라고 기억하기를 선택했다. 완성된 페미니즘은 없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이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평생에 내질러 단 한번 지른 큰 소리처럼. 나름의 시원함과 절절함이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뭐라고?


우리가 흔히 ‘연극적이다’라고 표현하는 어휘는 무대와 관객이 분리되어 있어서 3면이 아닌 제4의 벽을 인지하고 연기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간의 인지와 분리. 인식과 이해. 나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하학을 접목해서 이 영화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위치와 공간의 이동. 신분과 지위의 표출. 저 동선이 필요한 것인가, 혹은 불필요한데도 기법적으로 사용된 것인가? 에 관한 논의가 많이 나왔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차라리 더 어려운 것을 꺼내 들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시도해보고 싶었다. 굉장히 비유적이고, 시치미 떼는 영화처럼 가끔은 느껴졌기 때문이다.


등장만으로도 큰 인상이 있었던 카이지의 경우에는 트여 있는 로비와 같은 집무실 공간을 통해 군대라는 위계 체제를 표방하는 아이콘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위에 권력 있고, 또 그 사람 아래에 권력이 있고, 그 아래에 또 사람이 있는. 더 위의 사람과 더 아래의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군대라는 체제를 인물 한 명을 통해서 계속 상기시킨 장치. 함축적이었지만, 1940년대의 일본. 전 세계인이 기억하고 있던 시절이다.


나는 이 영화를 한국인이나, 다른 타국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일본인이 만든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화자를 중요히 여겼듯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타당했는가? 정확했는가? 충분했는가? 판가름하는 것은 못 하겠다. 왜냐면 나이브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밋밋하고 모호했으니까.


다만 나는 여기서 그 가치판단 자체를 잠깐 보류한다. 이 영화를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느꼈지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을 제일 깊게 새겨 넣고 싶다. 영화 속 사토코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비정상인 세계에 맞춰지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3차원의 세계에 국한되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나조차도 여전히 3차원에 머물러 있다. 언젠가는, 우리가 70년 전의 필름들을 돌려보듯이, 이 영화를 그렇게 보게 되는 세대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의 인간성은 4차원을 향해 갈 수 있을까? 4차원에 발 딛게 되면 서로를 아프게 했던 전쟁의 역사는 뒤안길로 사라져 다시는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완벽한 연기에 몰입해 너무 좋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항상 강렬히 원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뜬구름이라도 잡아당기게 되기를. 내 선택으로 내 현실을 바꿀 수 있기를. 누구도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을 언젠가는 발명해내기를 원한다. 종교가 없으니 이쯤에서 ‘아멘’할 수 없어 대신 말한다. “오미고토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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