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a Aug 09. 2021

이름은 불리는 대로

영화 <어느 가족>

<이름은 불리는대로>

-어느 가족. sin 2018. 고레에다 히로카즈.



https://youtube.com/playlist?list=PLqy8v4lWr_ldS-Hv0fntfD_53Yc8fCUxv




올바른 영화는 뭘까


 어린아이가 집 앞에서 라무네 구슬을 주우며 놀고 있다. 하나, 둘, 셋은 삼총사, 넷은 사오정, 오는 오리 궁둥이. 다시 하나, 둘, 셋은 삼총사 음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구리구리 십이요. 숫자를 세면서. 소중하게 모은 구슬을 유리병에 담는다. 투명한 병 안에는 제각각의 우주가 잔뜩 쌓여있다. 데굴데굴,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 둥글게 구른다. 등 뒤의 문을 닫은 채 틈 사이로 구원을 찾던 아이는 어느새 박스 하나를 딛고 제 키보다 높은 바깥을 내다본다. 본인의 집 앞에 버려졌던 그 아이. 그 조그만 입이 열리려는 순간, 장장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같은 감독의 다른 작품인 <세 번째 살인>이나 <아무도 모른다>를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왓챠*(현재의 왓챠 피디아)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14년부터 지금까지 즐겨 이용하는 헤비 유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별점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꼭 만점이 아닌 4.5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아주 가깝거나 먼 미래에. 이 영화를 질릴 만큼 본 뒤에 나머지 반쪽짜리 별을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거든. 극 중의 인물들이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 그 빛나는 작은 별을 만나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만나면 그걸 채워서 기록하고 싶었다. 행복을 언제 손에 쥘 수 있었던가. 불꽃놀이처럼 가장 예쁜 순간을 뒤로한 채 사라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눅눅한 여름과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찾아올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환호성 가득한 불꽃놀이도 함께 찾아올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가족영화의 거장이 제시한 또 다른 가족(家族)의 가능성이란 무엇인지.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과 우리의 머릿속에 깊게 뿌리내린 정상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탈피하려는 새로운 공동체 탄생의 실험이 이뤄지는 지금 이 순간. 한 우물을 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꾸준함의 힘’을 느껴보자. 어느 경지에 도달해있는 영화, 지금부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라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물론 그의 영화에 대한 이 감상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때로는 한 생명의 삶을 좌지우지하기도 하는 애착 관계의 형성은 생각보다 별 일없이 일어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려면, 혹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누군가와 가족이 되려면 꼭 천재지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이미 구성된 대안 공동체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린의 시간을 보자. 오사무와 노부요, 하츠에와 사키. 모두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네가 굶주리지 않았으면, 저항하지 못하고 맞지 않았으면, 이 추운 날 바깥에서 얼어 죽지 않았으면-에서 출발한 마음이 어느샌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에 도달했을 뿐이다. 쇼타는 처음엔 인정하기 버거웠지만 자신의 동생으로서, 자신이 선택한 가족으로서 린을 받아들이게 된 거고. 


 우리는 무엇으로 이어져 있나? 극 중의 인물들은 그것을 계속해서 떠올린다. 때로는 서로에게 묻고 대답하며, 나중에는 타인에게 질문을 듣고 스스로 그 답을 떠올려보려 노력하기도 한다. 좁디좁은 마룻바닥에서, 취조실에서, 문구점에서, 주차장에서, 시장에서, 해변에서, 이미 출발한 버스에서. 그들이 있었던 모든 곳에서 말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데, 둘 다 자신만의 사연을 겪고 사람 다섯이 있는 우리 집으로 왔다. 무리에서 탈락하고, 일가족이 사람에게 몰살당하고, 자동차 안에 숨어 하루를 연장하다 착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구조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이름은 카레와 짜장이. 이 둘은 내 가족이다. 가족이 될 존재의 자격은 필요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족은 스스로 조건을 씌웠다. 우리로선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는 이 둘을 책임지고 보살필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힘들 때 우리가 힘을 줄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아이들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하고. 


 한국에는 “이름도 성도 모른다”라는 재미있는 속담이 있다. 순수 재미 100% 라기엔, 서글픔도 좀 묻어나는 말이랄까. 왜냐하면 이 속담의 뜻은 “어떤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가, 가족이 아니면 생판 남이라는 식의 말들이 많다. 나는 이걸 좀 비웃고 싶다. 좀 많이 비웃고 싶다. 이름도 성도 모르면 어때. 말이 안 통하면 어때. 이 사람이 지나온 과거를 내가 좀 모르면 어때. 피가 물보다 진해서 뭐 할 건데. 나는 지금 당신과 살고 있는걸. 나는 투명한 물처럼 흘러 당신이 탄 배를 힘차게 밀어주고 싶은걸. 그 결과 당신이 내가 있는 곳에서 저 먼바다로 멀어지게 되더라도. 손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더라도. 나는 당신의 항해를 응원하고 싶으니까 말야.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속박이 되기도 하는 혈연관계와는 달리, 얼렁뚱땅 만나게 되어서 맺어진 관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들. 바로 이 지점에서 내 마음과 경험이 배우 안도 사쿠라가 연기했던 배역 노부요와 맞닿았다. 엄마라고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의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네가 있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래도 괜찮아. 그치만, 그치만 말야. 사랑한다면 이런 거야. 사랑한다면, 널 아프게 하지 않고, 널 울게 하지 않고, 새 옷을 사준다고 때리지 않고. 너의 말을 강요하지도 않고. 너를 이렇게 그냥, 꼭 안아주는 거야. 하고. 




내게 이름을 준 사람아, 그 이름을 불러줘요


 사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망설였지만 한창욱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영화의 한계이자 가능성은, 문학과는 다르게 인물의 생각을 찍지 못한다”라는 그 한마디가 말이다. 영화와 글의 사이에서 이제껏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내려온 튼튼한 동아줄 같은 한마디였다. 나는 항상 감독의 뜻을 내가 오독하면 어떡하지 고민이 많았다. 꼴에 나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 그랬을까? 근데 그거, 뭣도 신경 쓸 일 아니더라. 이미 그 사람의 손을 떠난 일이더라. 우리는 덕분에 그동안 영화의 어느 구석에든 나를 투영하여 상상할 수 있었고, 다채로운 인물을 각지게 단정 짓지 않을 수 있지 않았던가. 1개의 영화로 70억 개의 감상이 담긴 새로운 것을 재생산할 수 있었고, 1명의 감독이 만든 이야기로 70억 가지의 삶에 각기 다른 영향을 끼치게 할 수 있었고 말이다. 


 심지어 나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마법 같은 날 이후로 모든 인류가 체득한 기술이었으니까 말이다. 극 속 인물의 마음과, 생각과, 결심과, 오기와, 투지와, 속뜻이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더라도 관객은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나. 그래, 나는 그냥 내 얘기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 편의 영화라는 저울 위에 내 마음을 남김없이 올려두고 솔직한 무게를 재면 끝날 일이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아이들은 스스로 가족의 해체를 거부한다. <어느 가족>에서의 아이들은 스스로 가족의 해체를 선택한다. 쇼타는 극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익숙하게 도둑질을 하던 것과는 달리, 극의 후반부에서는 동생을 도둑질에 가담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게 불가피해지자 난동을 피우고 붙잡힌다. 일부러 붙잡혔다고 굳이 오사무에게 말한다. 일부러 다리 위에서 뛰어내린다. 나름 <어느 가족>의 가장처럼 보였던 오사무가 돈을 벌러 나갔다가 다리를 다쳐 돌아왔던 것처럼, 자신도 책임의 상징을 갖춘 것 마냥 깁스를 한다. 스스로 뒤죽박죽인 삶에 일시 정지 버튼을 찾아 누른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리셋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제는 자신의 동생이 된 아이의 삶을 바꿔주고 싶어 한다. 


 나에겐 정선아라는 아빠의 성 ‘정’, 엄마의 성 ‘선’, 돌림자인 ‘아’를 쓰는 이름이 있고, 무아(없을 무, 나 아 無我)라는 청소년기를 보낸 다른 가족이 준 이름이 있다. 나는 두 가족에게서 태어났고, 두 가족에게 걷는 법을 배웠고, 두 가족에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익혔다. 이쪽 집에선 선아라 불리고, 저쪽 집에 가면 무아라고 불린다. 이름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닐까. 내가 내 이름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누군가가 지어주는. 나를 인식해주는 사람들에게 내가 인정받는 경험의 기반. 누군가 소중히 놓아준 내 삶의 초석 말이다. 


 유리였다가, 쥬리였다가, 린이 되었어도. 아이는 그 아이 그대로였듯이. 쇼타가 파친코 주차장에 두고 가려고 고민했던 아이에게 쇼타라는 제 본명을 붙여 주었듯이. 집 떠난 언니가 동생의 이름을 쓰면서 울듯이. 이름은 존재의 윤곽에 쳐진 부적이다. 남에게 나를 인식시키고, 나의 형태를 내가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나는 그래서 특별하디 특별한 이 가족에 이름이 붙지 않아서, 그저 ‘어느’ 가족이라서. 그 점에 마지막 박수를 치고 싶다. 이름이 부적이라면서 이게 또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나는 그들의 막연함을, 제한 두지 않음을, 고집부리지 않음을. 그런 한여름 소나기 같은 변덕스러운 모습에 꽂힌 게 분명하다. 지금, 바깥에 비가 오는 것 같다. 나도 달릴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그러나 내 동생과 함께 할 수 있는 선에서 비 내리는 길을 달려 집으로 가고 싶다. 입고 있는 옷, 이 옷쯤은 흠뻑 젖어도 괜찮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3차원의 여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