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헷갈리게 하는 영화

영화 <플로우>

by Mooa

<나를 헷갈리게 하는 영화>

-플로우. sin 2024. 긴츠 질발로디스.



도입부의 힘


새로운 이야기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다. 나는 작가/감독의 팔을 살짝 붙잡고 낯선 곳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그 순간이 좋아서 소설을 읽을 때는 도입부의 몰입도를 가장 중요시 여기기도 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자면, 도입부의 능숙함을 주요 재미 요소로 생각한다. 누구의 능숙함이냐 하면, 화자(감독 또는 작가 또는 그걸 대변하는 배우)의 것이다. 도입부란 매력적인 문장/대사 한 줄 만큼이나 정보 전달이 중요한 구간이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련된 정보를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번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착실히 전달하는 일에서 곧 화자가 얼마나 노련한 이야기꾼인지 여실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정유정 작가의 《28》의 프롤로그가 내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숙련된 이야기꾼은 적절한 스피드와 온도를 유지해 가며 이유식 한 그릇을 멀끔하게 떠먹이는 베테랑 같기도 하다.

(이거 봐봐, 재밌다니까! 볼 수 있겠지? 재밌지? 재밌지?)


나는 시간을 들여 찬찬히 조직된, 확실한 설정에 환장한다. 탄탄한 판타지(넓은 의미로 현실 아닌 모든것) 세계에 자아를 의탁하고 흔히 말하는 과몰입하는 일에는 제법 자신 있다. 화자가 이끄는 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조금 더 보태어 상상하며, 때로는 다가올 일에 앞서 도입부의 룰을 스스로 환기하는 것이다. 예시로 <듄>을 살펴보자. 영화 <듄>의 프레멘들은 사막에서 불규칙한 걸음, 일명 모래 걸음으로 걷는다. 왜? 사막에 사는 샤이 훌루드(거대한 모래 벌레)가 일정한 리듬을 가진 움직임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불규칙하게 걸어야 하는 것이다. 걸음걸이 하나에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고리는 이야기 내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비척비척 걷는데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이유와 맞물린 설정들이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래서 <듄>에 열광했다. 그 이야기 속 세상이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을 법 하다, 아니 있고도 남는다-로 느껴졌다. 충분한 설득력이 내게는 중요한 가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번역의 실험 (신형철의 저서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제목 인용)


미와 아키히로가 연기한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을 좋아한다. 모로라는 커다란 들개 신이 주인공 아시타카를 일본어로 꾸짖고 비웃는 장면인데, 그의 목소리 톤, 단어 사이의 간격, 웃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적확하다고 느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직 그것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로의 입을 빌려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모로의 언어로 번역해 유창하게 말한다. 그와 별개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가장 압도적인 생명체로 존재하는 오무는 사람 말을 하지 않는다. 땅을 뒤덮고, 부해를 지키고,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그렇지만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정확하다고 느껴진다. 만일 오무가 말을 했다간 자연의 압도적이고 장엄한 느낌이 앞서는 대신,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캐릭터의 입을 빌려 말하거나/말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고 관객을 설득해 내는 것은 작품의 인상을 크게 달리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 같다.


모로가 신과 같은 존재라서 규격 외라고 판단이 된다면 야생을 배경으로 한 <라이언킹>이나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마다가스카>, 또는 옷을 입고 직업을 가진 동물들이 나오는 <주토피아>, <보잭 홀스맨>,
<아프리카의 샐러리맨>, <비스타즈>, <BNA> 같은 작품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비인간동물들이 등장해 영어 또는 일본어로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는 애니메이션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작품이고, 인간이 보게 될 작품이긴 하다. 개중에는 동물의 탈을 빌려 인간 사회를 패러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사람 말을 한다는 일종의 당연한 판타지, 기저에 깔린 설정이 묘하게 불편할 때가 있었다. 나는 언제 불편함을 느끼고, 언제는 느끼지 않는가. 내 안에 자리한 그 모호한 이유와 기준이 궁금했다.




<플로우>는 나를 헷갈리게 한다


그리고 여기, <플로우>가 있다.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들이 사람 말이 아닌 각자의 울음소리를 구사해 보다 주체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작품이 말이다. (혹은 원어를 대신해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만들어낸 *카피바라-낙타, *고래-호랑이의 경우도 있다) 동물들의 행동 하나하나 자세히 눈으로 좇다 보면 제작진이 이들을 사실적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보인다. 정말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화면 속으로 모셔오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쓰리디 모델링으로 각지고 생명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 움직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유기적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뱀잡이수리를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털이 없는 것처럼 납작하고 매끈하게 모델링 되긴 했지만, 털을 세심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급격하게 달라지는 제작 난이도를 상상해 본다면 납득하게 되긴 한다. 그래서 일종의, 최소한의 데포르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동물 본연의 울음소리, 본연의 습성과 행동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엄연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학계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처럼 서식지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물들끼리 이유와 설명 없이 모여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고, 그들이 사람 말을 하건 동물 말을 하건, 돛단배를 조종하건 유람선을 조종하건 하등 상관없다. 말 그대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판타지 세상이니까.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이곳은 어떤 것이 행해질 수 있는 판타지 세계인가? 나에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했다.


예시로 <해리 포터>라고 해서 모든 마법이든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세계관에는 가능한 마법과, 불가능한 마법에 대한 설명이 있다. 마법과 판타지가 만병통치약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한없이 유한하다. 그 세계를 있을 법한 세계로 만들기 위해 지탱하고 있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왜 <플로우>의 뱀잡이수리와 카피바라는 배를 조종하는 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왜 ‘이 작품 세계관에선 그들은 배를 조종하는 법을 알고 있다’고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냥 그러한 설정이라고 내게 무던하게 입력되지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첫째로, 앞서 강조되었던 지나친 사실성이 내게는 오히려 독이 된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자꾸 다큐 비슷한 것으로 오인한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어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잘 고증된 행동 양상을 보이다가 턱 하니 키에 발을 올리고 배의 방향을 조종하는가?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지? 잘 납득되지 않아서 영화의 흐름을 계속 놓치게 된다. 그들이 이족보행을 했거나, 옷을 갖춰 입었거나, 직업이 있었더라면. 그러니까 이미 인간을 흉내 내고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납득의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은 관객을 설득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지나치게 쉬운 방법이다. 동물을 동물인 채로 남겨두면서도 배를 조종해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로, 작품 전체적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또는 관객을 설득할 의지가 달리 없다. 이 영화는 제목 <플로우>에 걸맞게 지정된 결말을 향해 쭉쭉 거침없이 흐른다. 물이 왜 차오르는 것인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차오르는 것인지, 땅은 왜 갑자기 솟았는지, 고래가 다시 물로 돌아가듯 이 현상은 꾸준히 반복되는 일인지.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의 언어가 영화 속에 없더라도 영화는 컷과 비주얼, 사운드를 이용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생략한다. 또는 그런 것들에 관해 설명하였지만, 적어도 나는 쫓아가지 못했다. 때로는 이해와 납득, 설명과 해설보다 그저 감상하는 게 최선인 작품들도 있을 텐데 나는 이 영화를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꼈다. 나는 그런 해설자의 손을 잡고는 길게 꿈을 꾸지 못한다. 금방 금방 깬다.


사실 수해라는 커다란 재앙의 형태를 떠올려보면, 전반적인 흐름이 그에 맞춰 디자인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난데없다-가 아마 이 영화의 키 컨셉이 아닐까. 이 작품은 관객이 이야기에 저항 없이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다. 왜? 어째서?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기를 말이다. <플로우>는 나를 헷갈리게 한다. 일렁일렁, 또다시 물이 차오르고 있다.







2025.07.11.(금)

이 글은 숭례문학당에서 진행되는 한창욱 선생님의 아워뷰 모임에 참가하며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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