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또 멀리

영화 <콘클라베>

by Mooa

<가까이, 또 멀리>

-콘클라베. sin 2024. 에드워드 버거.


(결말 내용이 포함된 글이니, 영화를 꼭 관람한 이후에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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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 of dopamine (the origin of love 제목 인용)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책을 읽는 동안 요즘 말로 하자면 머릿속에서 도파민이 팡팡 터졌다.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말을 고르고 타인의 기분과 분위기를 살피느라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내 머릿속에서 책 속 풍경을 4D 영화로 재현하며(aka 상상) 후루룩 읽어 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런 자극적인 일이 공짜라니. 나는 도서관에 비치된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자리에 주저앉아 읽기도 하고, 집으로 퍼 나르기도 하며 11번 넘게 읽었다. 어릴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은 책을 읽는 행위를 지식을 쌓고 자기 계발을 하는 일명 '똑똑해지는' 행위로 해석하곤 하는데, 나는 그냥 오락거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최근에 병원에 입원해서도 소설 12권을 읽었다. 아픔도, 복잡함도, 내 마음속 어딘가의 짓무름도 잊게 해주는 가장 가벼운 수단. 책을 읽으면 머릿속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섹션이 활발하게 돌아가며, 현실을 감각하는 센서들이 둔해진다. 내가 살 수 있었던 유일한 우주 왕복 티켓인 셈이었다.


우리 집은 또래 친구들과 다르게 2006년 <궁>이나 2009년 <꽃보다 남자>등의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했었고(결국 친구 집에 가서 봤다. 2010년 <시크릿 가든>부터는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게임은 일주일에 30분 할 수 있어 동생들과 합쳐 한 시간 반 동안 돌아가며 테일즈런너를 했다. 당시에 태권도를 오래 다녔는데, 도장에 가면《나루토》가 있어서, 운동 전에 종이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열심히 닌자가 되는 꿈을 꿨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토토로>, <고양이의 보은>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을 주로 보여주셨다. 지난 글에 언급했듯이 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모노노케 히메>가 가장 좋았다. 처음으로 영화관에 간 것은 아마도 20009년 <셜록 홈스>다. 이렇게 재밌는 게 있다니. 지금 보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첫 극장 경험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이 황홀했다. 애석하게도 두 번째 영화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구매한 책은 구병모의 2009년작 《위저드 베이커리》 다. 동네 작은 서점에서 이 책, 저 책 둘러보다가 그냥 그 책이 사고 싶어져서 용돈을 털었다. 아직도 보름달빵을 보면 구병모 작가가 생각날 정도로, 한 귀퉁이에서는 설탕 맛이, 다른 쪽에서는 소금맛이 팍 느껴질 정도로 자극적인 책이었다. 아 마찬가지로 두 번째 책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미하엘 엔데의 《모모》 를 다 읽었을 때였나, 바로 옆에 랄프 이자우의 《거짓의 미술관》 시리즈가 있었다. 두꺼운 양장 커버가 멋있었다.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으나, 그 책은 내게 지금도 '가장 재밌는 책'을 꼽으라면 항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불변의 도서가 되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간성(intersex)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내 이웃 중에 누군가 이런 사람이 있겠구나. 세상엔 분명한 것보다 불분명한 것들이 더 많을지도 몰라. 정해진 곳에 딱 들어맞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닌 거야. 나는 위안을 느꼈다. 그 책은 단순 재미뿐만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어루만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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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영화를 보다 보면, 혹은 영화를 읽어 내려고 노력하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책 속에서는 서술되지 않은 것들은 등장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는 컷 사이즈의 변화, 점점 커지는 배경음악, 슬로모션으로 늘어난 텐션, 스팟 라이트를 키는 등의 행위로 무언가를 '티 낼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여러 가지로 산재해 있다. 마치 대화 중에도 우리가 비언어적 표현(표정, 몸짓, 시선 등)으로 서로의 의중을 읽어내는 일처럼 말이다. (물론 내레이션과 대화를 통해 의도를 분명하게 발화할 수도 있다. "나 너 싫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듯이. 어떤 사람들은 그 방법이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 길어질수록 설명적인 영화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도 영화 나름, 관객 나름일 뿐 누군가에겐 세련되었다고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콘클라베>에서도 그런 특정한 컷들이 있다. 콘클라베 전날 저녁 진보적인 성향의 추기경들이 모인 곳에 아주 천천히 들어가는 줌 인(디지털일 수도 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기도하는 로렌스의 단독 컷에 1분 동안 일어나는 앵글의 변화(틸업되면서 사이즈가 균일하지 않게 들어간다), 트랑블레에게 사퇴하라고 말하는 로렌스와의 투 샷 달리 인(아마도)이다. 이 세 컷의 공통점은 '들어간다'는 것이다. 때로는 긴장감을, 때로는 모호함을, 때로는 의미심장함을 더한다. 집중도를 올리고, 정말로 내가 그곳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반대로 '빠지는 컷'의 경우 다섯 번째 투표가 끝난 뒤 유력 후보에서 내려오게 된 아데예미의 모습을 비추는 컷이 있다. 앞서 나오는 트랑블레, 테데스코, 벨리니, 로렌스가 모두 웨이스트 샷 정도의 사이즈였던 것에 비해 텅 빈 좌석들이 다 드러날 때까지, 아주 작은 인간으로 보일 때까지 빠지는 사이즈가 열 마디 말보다 더한 정보와 감정을 표현한다.


적재적소에 활용되면 이러한 기법들은 ~은 ~이다 라고 정해진 답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에 맞춰 관객이 스스로 영화의 문맥을 읽고 유추하게 만든다. 나는 그중 포커스(초점)를 활용한 방법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나를 가장 부자연스럽게 만든 게 바로 포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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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포커스를 넘기는(이동하는) 행위는 말 그대로 집중해서 보여줄 대상을 비추는 행위다. 넘기는 것에도 '스근하게'나 '칼같이' 등 방법에 따라 뉘앙스는 또 달라진다. 그런데 <콘클라베>는 쉽사리 포커스를 넘기지 않는다. 이 정도면 넘길만한데? 싶어도 넘기지 않는다(두 컷 정도 예외가 있었다). 예시로 어떤 영화의 컷은 가까이 있는 사물에게 포커스가 맞은 상태에서 건너편 화면에 모니터가 켜지거나(보통 모니터로 초점을 넘겨서 내용을 읽게 만든다), 누군가 말을 걸면(대화의 흐름에 따라 와리가리 할 수도 있다) 그곳을 향해 이동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눈길이 가게 만드는 것이다. (대체로 흐리멍덩하게 포커스가 맞지 않는 곳보다는 선명한 곳을 바라보게 된다.)


'넘긴다', '넘기지 않는다'는 하나의 선택이고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하나의 선택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면, 우직하게 넘기지 않는다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겠구나-라고 어림짐작하게 되기 마련이다. 영화를 다시 뜯어보며 두 컷의 예외가 있는 걸 찾았지만 그 경우에는 앵글 자체가 과감하게 변화했기에 (극 초반 콘클라베 전날 창문 공사에서 시작하는 컷, 전 교황의 방에 봉인을 풀고 들어가 남겨진 안경을 집어 들었을 때) 따라가야 마땅했다는(자연스럽다는) 결론이 일었다.


'넘기지 않음'이 돋보이는 컷들이 있다. 예시로 베니테스 추기경과의 첫 대면 직전, 벨리니와 로렌스가 대화하는 컷이다. 대사는 로렌스가 계속하고 있고 화면에도 등장하지만, 포커스는 리액션을 하는 벨리니에게 맞아있다. 반응 컷이라고 말하기엔 개인적으로 내게는 포커스가 안 맞아 웅얼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로렌스의 얼굴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은 로렌스가 계속해서 투표를 지속하게 되는 벨리니와도 서로를 잘 알 수 없다는 경계(境界, boundary)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또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콘클라베 전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테데스코에게 불려 가 옆에 앉은 로렌스의 컷이다. 아프가니스탄, 보편 교회, 다양성에 대해 얘기하는 로렌스의 얼굴은 초점이 나가 있고 식사를 하며 콧방귀를 뀌는 테데스코의 얼굴에 포커스가 맞아있다. 그리고 이동하지 않는다. 이 경우엔 테데스코에게 맞은 초점이 그의 주장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렷하고 세밀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서린 비웃음이 로렌스가 하는 말을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끼게 한다.


그 두 가지 컷에서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타자성이다. 나와 구분되어 있는 타인. 내가 잘 알지 못하고, 불분명한 대상. 그러나 나의 지근거리에 항상 존재하는. 나 아닌 것, 바로 당신. 나는 <콘클라베> 팀의 이 '넘기지 않음'이라는 선택지를 결말을 보고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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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또 멀리


콘클라베 전날 저녁, 베니테스는 식전 기도를 올리며 영어로 운을 떼고는 스페인어(모국어)로 말을 이어간다. 마찬가지로 첫날 투표를 앞두고 로렌스는 이탈리아어로 말하다가, 영어(모국어)로 바꿔 말을 이어간다.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테데스코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베니테스 역시 영어로 시작해서 스페인어(모국어)로 말을 잇는다. 영화는 이러한 순간들에 통역의 장치를 별도로 두지 않는다.


세 이야기 모두 진심과 호소가 담긴 것이었다는 점에서 모국어로의 회귀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애초에 이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나의 경우 내 머릿속 언어는 한국어로 출력될 때 가장 유실률이 적다. 영어 또는 일본어 등으로 생각하거나 말하려면 우선 한국어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나는 슬프다(sad)는 말할 수 있어도 서글프다는 영어로 무엇인지 모른다. 앞선 세 가지 이야기의 경우 '말하는 나 자신'을 우선시했다는 점.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내 속의 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내기 위해 모국어를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꾸밈없는 자신으로 존재할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이 있다면, 신은 내가 한국어로 말하고 당신이 영어로 말하고 있어도 다 알아들으시겠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들에게 전하게. 나는 상식적인 접근 방식을 지지한다고(stand for). 게이나 이혼 같은 문제에 대해서. 나는 절대로 라틴어 기도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부모가 무지하다는 이유로 자식을 줄줄이 갖는 것도 반대해. 역겹고 억눌린 그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네. 이렇게 전하게.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우리 교회 내에서도 견해 차이를 인정한다고."


"아무래도 여성 문제는 뺐으면 합니다."


"어째서? 난 표를 얻기 위해서 내 의견을 숨기고 다른 사람처럼 행세하긴 싫네."


극 중에서 벨리니와 로렌스의 진영은 자유주의, 진보 성향의 그룹으로 묶인다. 벨리니(스탠리 투치)가 저 대사를 할 때는 속이 시원하다 싶을 정도로 좋았다. 나와 성향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이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벨리니가 표방하는 진보에는 게이, 여성이 있지만 그들을 포함한다고 해서 사회의 전부가 아니다. 테데스코와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해서, 로렌스의 말을 빌리자면 벨리니만이 모든 안건의 정답은 아니다. 위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여성 문제는 뺐으면' 한다느니 더 많은 부동표를 가져오기 위한, 다수를 향한 움직임이 있다. 아데예미의 말을 빌리자면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하기 위해서겠지. 저기서 '누구'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아그녜스 수녀의 말을 빌리자면 invisible-보이지 않는 사람들). 이것은 흔히 나오는 '사회적 합의'의 레퍼토리와 '나중에'의 방식이다.


리소르지멘토 광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난 뒤 투표를 중지하고 모인 추기경들 앞에서 베니테스가 발언한다. 종교전쟁에 대해 열변을 토로한 테데스코의 다음 순서이다. 뭉근한 암부가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는 차분하게, 혹은 참담하게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고 묻는다. 나는 휴전 국가에 살고 있지만 전쟁을 모른다. 그들 중에서도 전쟁을 직접 겪은 이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경험담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다. 당사자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번 콘클라베 중 가장 강력한 프로파간다로 작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전쟁이라는 말에 순응하려고 했는지 체감이라도 한 듯이, 베니테스 추기경을 당선시켜 콘클라베를 종료시킨다. 누가 누구를 뽑았는지, 얼마나 뽑았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확신 사이에서 존재하는 게 어떤 건지 저는 알아요."


새로운 교황이 되기 직전, Clinic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찾아온 로렌스에게 베니테스는 위와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고 힘 있는 대사였다고 생각한다. 로렌스가 콘클라베 첫날 다양성과 확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베니테스는 로렌스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미지의 존재이다. '여성의 신체를 보유한 간성 교황의 탄생'은 로렌스가 생각하던 '진보'의 테두리 안쪽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교황도 결국 사람이기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성직 매매(트랑블레)나 성추문(아데예미) 만큼이나, 혹은 보다 더 로렌스를 얼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는 대전제(교회법)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몸 보이지 않는 곳 어딘가에 여성의 신체가 함께한다는 것을 이유로 로렌스가 베니테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순간 차갑고 낯설게 변한다. 그는 황망하게 주저앉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되려 베니테스가 로렌스를 어르고 달래듯 말한다.


"I was what I always been.

...I am what god made me."


'세상의 확신 사이에 존재하는 자'는 소수자를 설명하는 섬세하고 시적인 수식어 같다. 나는 그가 복강경 자궁 절제술을 받지 않은 간결한 이유가 극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을 만큼 좋았다. 이거지! 싶었다(모든 사람이 수술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은 절대 아니다). 시대에 필요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화란 이런 거구나. 어떤 것도 그저 소재로만 쓰고 버려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투표를 할 대 용지에 손을 대지 않고 그릇을 이용해 미끄러지듯이 넣는 것조차 좋았다. 사람 손으로 뽑는 것이 아닌, 신의 뜻으로 임명해 달라는 듯한 신성한 느낌이 났다.


아주 가까이에 있었지만 가볼 생각을 못 해 너무나도 멀리 있던 곳, 우리 모두의 등잔 밑. 바로 '당신'이란 섬에 대해 <콘클라베>는 2시간 동안 신명 나게 살풀이를 한 것 같다(가톨릭 영화에 살풀이란 말이 맞나 싶긴 하다만, 대체할 말이 생각나면 바꾸겠다). 투표와 함께 영화는 끝났고, 사람들은 지금 당신의 답을 기다린다. 다 같이 불러보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ㅇㅇㅇ. 그 이름 아릅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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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금)

이 글은 숭례문학당에서 진행되는 한창욱 선생님의 <영화 토론과 비평 읽기> 74기 모임에 참여하며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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