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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Feb 03. 2020

최악의 농담

말리는 시누이도 밉더라

"야, 너네 같이 여행 갔었냐?"


팀장이 화요일에 출근한 동료 A에게 말했다. 그는 다른 팀 직원과 공공연한 연인 사이였다. 지난 주말 닥친 태풍으로 제주도에는 비행기가 뜨지 못했고, 그는 월요일에 부득이하게 결근을 했다. 다른 팀 그의 연인도 같은 날 출근을 하지 못했다.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인데 팀장은 군소리를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면 다행이었다.


"@@이 잘못했네. 남녀 칠 세 부동석 몰라?"


선임 B가 더 보탰다. 그 뒤로 팀장은 신나서 몇 마디 더 신소리를 해대며 웃었다. A는 겸연쩍은 듯 웃었지만 등 뒤로 들리는 농담에 나는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쾌감에 젖어들었다. 


불쾌한 농담을 들을 때마다 나의 기분은 흐림 :(


매번 업무가 많다고 죽을상을 하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난감한 농담거리를 찾을 때마다 팀장의 눈은 번쩍였다. 천진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사내  커플이 같은 날 연차를 낸다거나 같은 여행지를 다녀온 낌새를 눈치채면 "내 그럴 줄 알았다."며 혼자 알기 아깝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은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사내커플인 제 여자 친구와 여행 다녀왔다고요!라고 광고하고 다닐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사내 커플의 관계와 만남에 대한 농담 혹은 조롱은 내밀하게 성희롱의 성격을 담고 있기도 했다.


팀장을 만나기 전에는 저런 류의 저급한 농담은 텔레비전 속 나쁜 상사들만 하는 줄 알았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성희롱에 관해서는 과하다 싶을 만큼 엄격한 내규가 있었다. 금융권이라면 으레 비슷한 문화겠거니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 by 사람, 회사 by 회사라는 얘기가 이래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같은 회사에서도 좋은 분들이 많았다. 단지 내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한 건 선임 B였다. 잘못된 농담으로 모두가 얼굴이 굳어지고 분위기가 적막해진 상황에서 그는 팀장의 농담에 살을 보태었다. 거봐, 이건 농담이잖아.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잖아.라는 팀장의 가치관에 힘을 보태주는 것 같았다. 굳어진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느라 떨떠름하던 팀장도 그가 농담을 거들기 시작하면 그제야 더 크게 웃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야근이 많던 연말의 어느 날, 오랜만에 팀원 모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말 많던 팀장이 그날도 대화를 이끌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는 나이트클럽 이야기를 했다. 팀원 중 누구도 그런 주제를 먼저 식사자리에서 이야기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팀장의 친구가 나이트클럽에서 부킹 후 원나잇을 했는데, 여자가 고소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 모텔까지 사이좋게 둘이서 간 것이 밝혀져 무고죄로 여자를 역 고소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본인들은 또 나이트를 갔다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이런 얘기가 재미가 있나 싶었다. 다른 누군가는 추켜세우며 대단하다고 깔깔 웃었다. 듣기 싫은 농담의 산통을 깬 것은 나였다.


"원래 친구 얘기라고 하면서 다 자기 얘기한다던데요? 아하하하."


눈치 빠른 다른 직원들이 깔깔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와 내 수준이 비슷해지는구나 싶었다. 직장 상사에게 저런 무례한 말을 던진 나도 돌아이였다. 그런데 더 찝찝한 기분은 그 조직에 계속 머물다 보면 나 역시 언젠가는 저급한 농담에 말을 보태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사람들의 정서는 닮아간다. 그 조직을 떠나면서 느꼈던 후련함에는 그런 이유도 약간 녹아 있었다.


십 년 뒤의 나는 직장 동료에게, 부하에게 어떤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 될까. 말수가 없어 농을 던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누군가의 직장생활에서 나쁜 본보기로 남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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