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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Dec 30. 2019

아부의 기술

이 판은 내가 낄 수 없다

직장생활에서 직급이 높은 상사와 함께 일하는 것은 유독 내게 어려웠다.  괜히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눈치 보이기 일쑤였고, 회식에서 자리라도 잘못 잡으면 그 날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원급 인사와 가까운 자리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다. (으레 기업에서는 대표실 근처에 비서가 상주한다. 하지만 더러 회사 데스크에 비서가 있고, 비서 업무와 관계없는 말단 직원이 대표실 앞에 앉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매일 보내는 리포트에 임원이 're:-'로 시작하는 답변을 보내면 수치가 잘못되진 않았는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이메일을 클릭했던가. 하지만 나 같은 하수와는 다르게 임원과 상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들에게는 가끔 놀랄만한 아부 스킬이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정이 다르듯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직장생활을 하며 수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부에 관한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첫째, 어버이날의 추억이다. 당시 나는 모 공기업의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에는 부서장이 아니라 임원급 인사가 함께 계셨다. 어버이날 출근 준비를 하는데 과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서 꽃 좀 사 와."


별생각 없이 출근길에 꽃집에서 탐스러운 카네이션 바구니를 샀다. 그 꽃바구니의 주인공을 나는 미처 몰랐다. 일찍 출근한 과장님은 예쁜 걸로 잘 골라왔다며 칭찬하며 같이 임원실에 들어가자고 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잖아요. XX님 우리 기관의 제일 큰 아버지여서 제가 꽃 좀 준비해왔어요."


나는 과장님의 멘트에 닭살이 돋았다.  항상 애교스러운 말투와 의전 잘하기로 유명한 과장님이었지만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좀 오버가 아닌가 싶다. 수년 전의 일이라 과장님이 기관의 큰 어르신이라고 했었는지, 제일 큰 아버지라고 말했었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 외에도 과장님은 사소한 것을 잘 챙겼다. 이를 테면 사내 행사에 쓰일 다과를 굉장히 정성 들여 준비한다거나 임원이 좋아하는 취향의 간식을 구비해두곤 했다. 하지만 임원 외에도 모두에게 상냥했던 과장님이었기에 오버스러움이 밉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툰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인 나로서는 좀 충격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부 타임을 겪을 때 내 기분... 전 잠시 쉬겠습니다...)


두 번째 일화는 스승의 날의 추억이다. 수년 전 나는 모 캐피털사의 지점에서 근무했었다. 금융회사가 으레 그렇듯이 각 지점의 최종 보스는 지점장님이다. 캐피탈업의 특성상 지점장님은 종종 직원들의 영업을 지원하러 따라나서기도 하고, 본사의 업무 회의도 잦기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모처럼 지점 직원들과 지점장님이 함께 점심을 하던 날이었다. 지점장님은 어제 본인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온 가족들에게 자랑을 했노라 말했다.


"나 직장 생활하며 이런 적 처음이야. XX이가 나한테 많이 배웠다고 감사하다면서 스승의 날 기념으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보냈다니까. 온 식구들한테 다 보여줬지."


아, 직장인의 스승의 날이라는 이런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례보다 두 번째 사례는 조금 덜 오버스럽고 센스 있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그가 지점장에게 고맙게 느껴서 성의를 보였든, 립서비스였든지 간에 내가 상사의 입장이라도 부담스럽지 않고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우선 '많이 가르쳐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 상사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상사에게 잘 보이려 하는 모든 행동을 아부라고 칭하기는 힘들 것이다. 누구에게는 알랑거리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바쁜 직장생활에서 내게 마음을 써 준 상사들에게 가끔은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날이 있었다. 때로는 커피 한 잔, 때로는 자그마한 선물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표현했지만 말이다. 내 성격상 이번 생에 아부 스킬을 익히기는 힘들 것 같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고 하면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다. 그래도 가끔은 함께 일하는 동료와 상사의 기분을 좋게 해 줄 센스 있는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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