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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lli Jan 17. 2022

무계획과 계획 사이, 어딘가 있어

열흘 간 제주에서 삽니다1 (제목 표절)

나는 지금 제주에 있다. 부럽다면 죄송하지만, 나도 내가 부럽기 때문에 자랑할 수밖에 없다. 약 열흘 뒤 원래 공간으로 돌아가는 날, 아마도 나는 오늘의 내가 가장 부러울 거다. 어제, 아니 오늘 새벽 2시가 다돼서 잠에 들고 7시 전에 일어났어야 하는 바람에 사실 매우 피곤하다. 그래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들어가서 드러누워 있었다. 그러다 관광객 주제에 숙소에만 있으면 제주한테 미안하기도 해서 근처 카페에 와서 '일'을 한 건 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실 갈 데가 없어서 숙소로 먼저 간 거였다.


나는 원래 엄청난 계획쟁이었다(뭐, 이건 사실 상대적인 거긴 하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터키였는데,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이 별로 많이 가던 곳은 아니었다. 왜 거기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기준이 되는) 한국사람 너무 많지 않은 곳, 그러면서 친구들은 죄다 유럽여행을 갔으니 유럽은 못 가겠고 뭔가 근처 어디를 찾다가 그곳으로 정한 것 같다. 첫 해외여행이고, 영어를 잘하지도 않고, 그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이(2007년) 구글맵 대신 종이지도를 들고 다니던 때였으니, 계획을 엄청나게 짰다. 엑셀 파일에 날짜별로 관광지와 갈 장소 쓰는 사람, 그게 나였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맛집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계획 짜는데만 한 달은 걸린 거 같기도, 아마 계획 세우는 과정 자체가 너무너무 즐거워서 그랬겠지? 같이 갔던 대학교 후배는 성격이 무던하고 쿨했던 친구라 계획이 제대로 되든 안되든 크게 개의치 않고 즐거이 같이 다닐 수 있던 것 같다.


이 계획쟁이가 처음으로 '계획대로 안 되는 구나.'를 깨달았던 순간은 두 번째 해외여행인 캄보디아를 갔을 때였다. 임용을 3차까지 다 보고 임용 발표가 나기 전 그 사이를 기다릴 수 없어 우리 과 언니를 꼬셔서 캄보디아를 갔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긴 했지만 대만도 경유하고 앙코르와트도 좀 더 느긋하게 보게 시간을 많이 들여서 일정을 짰다. 그리고 씨엡림에 도착한 첫날, 숙소를 찾는 것부터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예약을 다 하는 시스템이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땐 그냥 숙소 이름과 주소가 알고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바로 체크인했던 듯) 내가 알아온 숙소 주소를 툭툭 기사가 알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에다 우리를 내려다 줬다. 무서웠던 그 밤에 우리는 일단 그곳에서 잠을 자기로 하고 다음날 내가 찾아봤던 주소지의 숙소를 찾았다. 그런데 그 숙소는 없어진 건지 뭔지 역시 또 찾을 수 없었고, 근처에 다른 숙소 주인이 우리더러 오라고 했다. 가이드북에서 보지 못한 숙소라서 의심은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할 수 없이 묵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너무 친절했고 숙소도 좋았다. 숙소 이름이 Mother's 게스트하우스 였던 거 같은데 또 가게되면 묵으려고 외워놨다. 여튼 그때부터 계획쟁이를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은 없구나.'를 깨달은 후 '계획대로 안 되어도 좋잖아?'라는 경험은 이방인이 된 곳에서 처음으로 가능했다.


그 이후에는 적당히 적당히 계획을 세우고 간다. 빡빡하게 일정을 짜 봤자, 내가 여행을 온 건지, 일정에 끌려다니는 건지 모를 때가 있어서다. 그래도 걱정쟁이라서 숙소는 거의 다 예약하고, 교통수단도 최대한 예약하고 가려고 한다. 2007년처럼 모두가 예약을 안 하고 간다면 나도 예약을 안 하고 가겠지만, 이제는 전 세계인이 예약을 하는 상황이라, 다소 난감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바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에어비앤비에서 숙소 예약이 가능한 지 모르겠지만, 내가 갔을 때는 현지에 가서 숙소를 구했다(그때도 가능했는데 내가 몰랐을 수도 있다). 거기는 마을이 아직 살아있어서 그 집에 가서 물어보고, 없다고 하면 호스트가 같은 동네에서 숙박업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방을 구해주었다. 그래서 숙소를 옮길 때마다 시간이 많이 들고 여러 노력이 들었다. 이 집에 갔다 저 집에 갔다 작은 방에 4명이 낑겨 자기도 하고 하루 만에 방을 옮기기도 했다. 매번 예측 불가한 상황이 생겼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래서인지 쿠바 여행은 너무너무 재밌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다음 해에 스페인에 갔을 때는 모든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해놓고 갔었다. 그래서인지 자유여행인데, 여행사로 간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늘 계획을 세워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미래를 통제하고 싶어 하지만, 진짜 기억에 남는 건 예측 불가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즐겁고 고단했던 사건인 것 같다. 뭐, 안전하게 잘 끝났으니 추억이 되는 거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획과 무계획 사이를 배회하기로 했다. 나중에는 너무 바빠서 계획을 세울 시간도 없기도 했다. 그래서 꼭 가고 싶은 곳(또는 하고 싶은 것)을 한 가지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여행을 가기 시작했다. 물론 '꼭'에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마음의 여지를 둔다. 그래야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으니. 그래서 이번 제주에는 아무 계획도 안 세우고 뭘 보러 갈지 크게 정하지 않고 왔다. 그냥 막연하게 숙소 근처에 오름을 오르고, 숙소 근처에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고, 동네에 있는 독립서점도 가보고, 영어 논문을 5편 정도 보고, 책을 3권 정도 읽고 오면 좋겠다는 생각만.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은근히 바쁘네. 아무 계획도 안 세우는 게 이번 여행의 계획이었는데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서점이나 카페,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 걸 보면 무작정 삶의 장면에 뛰어드는 일은 꽤나 의지가 필요한 일인 거 같기도 하다. 이 카페도 한 10분은 검색하다가 왔으니. 이렇게 계획과 무계획 사이에서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적당히 균형을 잡는 날도 오겠지.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를 만날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정할 수 없는 게

삶의 묘미 아닌가.

라고 하면서 내일 어디 갈지 찾아보는 나는,

모순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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