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까칠함
언젠가 한 번은 발뒤꿈치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발뒤꿈치의 '까칠함'이라고 해야 하나.
몸의 신체기관 중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다. 뭐 각자 나름의 신체적 콤플렉스가 있을 것이고, 나 같은 경우는 다소 연약한(?) 상체에 비해 큰 엉덩이와 허벅지가 어릴 때부터 가리고 싶은 부분이었으니, 신체적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패션감각을 기르는 일(뭐 얼마나 패션 감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은 필수 미션이었다. 적당한 연차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적당히 적당히 가리고 보이면서 적당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당하게 보기 괜찮은 수준으로 몸의 맵시 만드는 일은 적당히 가능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부분은 아니다.
발뒤꿈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니 발뒤꿈치를 신경 쓰이는 신체 부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평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화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갑자기 발뒤꿈치 갈라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전후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발뒤꿈치에 대한 그 교사의 발언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 화학교사는 정확하게 '여자의 발뒤꿈치 갈라짐'에 대해서 혐오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 여자는 지저분하고 게으르며, 그런 뒤꿈치는 꼴 보기 싫다는 말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아마도 그런 여자가 우리 엄마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엄마는 매일 일을 했으며(지금도 그렇지만) 늘 그렇게 갈라진 발뒤꿈치가 아파서 뭔가를 열심히 바르고 양말을 신고 자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엄마의 발뒤꿈치는 한 번도 붙은 적이 없다. 한 달 치 사우나를 끊어놓고 아침마다 목욕탕에 가서 뒤꿈치를 긁고, 자기 전에 로션을 바르고, 뒤꿈치만 씌우는 양말 같은 것을 신고 자지만, 엄마의 발뒤꿈치가 다시 붙을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때부터 나에겐 이상한 태도가 자리 잡았다. 당연히 네가 우리 엄마의 노동과 고통을 아느냐며 그 화학 선생을 싫어하고 욕하는 마음과 동시에 내 발뒤꿈치는 늘 새 살처럼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자꾸 다른 사람들 발뒤꿈치를 봤다. 갈라지거나 각질이 있지는 않는지, 겉으로 잘 보이는 부분은 아니지만 너는 거기를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엄마의 노동과 고통을 보여주는 부위였지만 동시에 엄마의 발뒤꿈치도 붙어서 깨끗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뒤꿈치는 나에게 단순히 청결의 대상은 아니었다. 꼴 보기 싫은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척도였다.
그런 나에게 생긴 발뒤꿈치에 대한 두 번째 사건은 재작년쯤이었나, 그 당시 만나던 옛 남친과 있던 일이었다. 우리 집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던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그러다 내 발뒤꿈치가 그의 정강이 부분을 스쳐 지나갔다. 그 친구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내 발을 밀쳤다. 따.갑.다.고. (그의 입장에선 밀친 건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확 밀쳐내진 기분이었다.)
그 친구도 늘 자기 발뒤꿈치를 관리하는 친구였다. 뭐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함이 있는 친구라 지 몸도 열심히 씻고, 내 몸도 열심히 씻으라 하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허지웅보다는 덜하긴 하지만) 먼지가 있으면 질색팔색 하는 스타일이었다. 잔소리할 때마다 싸우긴 해도 깔끔한 건 좋으니까 대부분의 경우 나는 맞춰주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결벽증에 가까운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래도 깨끗한 편이다.
내가 아무리 평소에 발뒤꿈치를 관리한다고 하더라도 매일 거기를 긁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칠할 때도 있고, 사실 전동기기로 각질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보습이 충분하지 않으면 건조한 시절에는 건조할 수밖에 없다. 손이 건조하고 거칠한 게 안 씻어서 그런 게 아니듯이 말이다. 핸드크림을 습관처럼 계속 바르는 것처럼 뭔가 보습을 해주지 않으면 발뒤꿈치도 씻기만 한다고 보들보들한 건 아니다.
그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화학교사가 떠올랐다. 어쩜 이렇게 다들 발뒤꿈치로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지. 처음에는 내가 약간 미안해했지만, 이내 나는 나의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게 뭐라고, 내 뒤꿈치가 거칠거칠하면 로션을 발라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렇게 나를 밀어낼 수 있냐고. 그 친구는 나의 서운함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의 해소되지 않은 감정과는 별개로 그날은 그냥 그렇게 넘어가버렸다. 그는 발뒤꿈치에 담긴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그는 기억도 못 할수도 있지만, 그날의 기억은 나에게 여전히 각인되어있다. 우리가 서로의 과거에만 남게된 건, 어쩌면 발뒤꿈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같은 겨울만 되면 (아니 이미 가을부터), 온몸이 건조하고 거칠거칠해지는 계절만 되면 발뒤꿈치는 더욱더 존재감을 나에게 들이민다. 나는 샤워할 때마다 거의 매번 전동 각질제거기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각질을 갉아내려 애쓴다. 위이이이잉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뻣뻣한 오른쪽 다리는 뒤꿈치가 잘 보이지도 않아 이상한 자세로. 어떤 때는 새 살이 나온 것도 모르고 전동기를 돌려 상처가 날 때도 있다. 사실 각질 제거도 제거지만 부드럽게 만드려면 보습을 잘해줘야 되는데, 씻은 다음에 뭘 바르면 다시 더러워(?) 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로션을 안 바르는 게 문제다. 최근에는 뭘 열심히 바르고 양말도 신고 보들보들한 뒤꿈치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을 욕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애쓰는 주인 때문에 내 발뒤꿈치는 오늘도 괜히 분홍색 기계에 나풀나풀 깎여나가고 있다.
그놈의 보들보들한 발뒤꿈치가 뭐길래,
내 기억 속의 남자 두 명은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언젠가 발뒤꿈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이제 그만 발뒤꿈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