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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lli Jan 23. 2022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열흘 간 제주에서 삽니다 3

벌써 제주에 내려오고 여섯 밤을 잤다. 이제 4번의 밤을 더 보내면 다시 육지로 가야 한다. 처음에 제주에 왔던 한 3일간은 바다를 엄청나게 봤다. 하루 만에 북부에서 서귀포로 내려와야 했기에 동부 해안을 지나오면서 바다 구경을 질리도록 했다. 아니 질린 줄 알았는데 바다는 아무리 봐도 안 질리더라. 종달리 쪽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그렇게 예쁜지 처음 알았다. 생각보다 차는 별로 없었고, 다음에 이 길을 한 번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호텔에 본 나혼산에서 박나래가 내가 차로 지나간 길을 걸었다. 와우, 이제 이쪽에 사람이 또 많아지겠지만, 박나래처럼 그렇게 많이는 못 걷겠지만, 박나래 절반만큼은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겨울 제주'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겨울 제주는 바다보다 현무암으로 야트막하게 둘러싼 돌담 안에 자라고 있는 초록 초록한 밭작물, 그 뒤로 펼쳐지는 바다 같은 하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뼈골까지 시린 우리 동네에서는 초록색을 볼 수도 없는데 제주에는 여기저기서 초록빛 밭이 펼쳐진다. 그 밭작물이 당근인지, 배추인지, 열무인지 까막눈인 나는 알 수 없지만 돌담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록초록은 보기만 해도 다정하고 귀엽다. 그래서 자꾸 사진을 찍어보지만, 사진에는 도무지 그 옹기종기 다정함이 담기지 않는다. 한적한 동네에서 차를 운전하다 여러 번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금방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박나래가 걷던 길도 그런 돌담과 밭이 많이 나왔는데 그래도 드론으로 하늘에서 찍으니까 그럴싸하게 보이긴 하더라.


그렇게 한 3일 바다를 실컷 봤지만 정작 서귀포 시내에서 묵은 이틀 간은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없었다. 하루는 1100 고지를 향해 달려다가 내 작고 소중한 레이의 바퀴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아 중간에 포도 뮤지엄으로 운전대를 돌렸다. (아, 그래도 우연히 외돌개에서 일몰은 봤네.) 그다음 날은 하논 분화구에 가서 조금 걷다, 숨도라는 중턱 카페에 들렀다가, 올레 시장을 구경하다가 호텔에 들어갔다. 어제는 오전에 스타벅스 (그래도 여긴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서귀포 스벅이라고)에 가서 오후에 있을 줌 세미나 대비 공부를 하고, '치유의 숲'에 가서 1시간 반 정도 걷고, 다시 파스쿠찌에 가서 줌 세미나를 하고, 딱새우회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뭔가 중간중간해야 할 일이 있어서 카페를 찾긴 했으나 사람이 많은 바닷가 카페는 시끄럽고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만 주로 다녔다. 마치 현지인처럼,


그래도 왔다 갔다 하면서 저 멀리 서귀포 바다나, 저 멀리 한라산은 볼 수 있었다. 내가 바쁜 이틀 간은 다행히(?) 날씨가 좋지 않아서 바다에 갔어도 예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는다. 오늘은 서귀포에서 협재로 이동하는 중인데, 최대한 바다 가까이 달리면서 저 멀리 보이는 바다 구경을 하고 있다. 바로 코 앞에 있는 바다에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주도에 운전하면서 좋은 점은 중산간 도로에서 시내 쪽으로 내려올 때 바다 수평선을 내 눈높이에서 마주한다는 점이다. 나는 분명히 높게 있는데 바다도 산만큼 올라와있다. 그래서 괜히 구경하는데도 없이 요기조기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아무 계획도 안 세우고 왔지만 게하에서 만난 사람들이 알려준 밥집이나 숨겨진 카페, 걷기 좋은 길만 찾아가기도 바쁘다. 남은 4일 간 송악산 둘레길도 걷고, 본태박물관도 가고, 책방 소리소문도 가고, 흑돼지도 먹고, 일몰도 봐야 한다. 어우 아무 계획도 안 세우고 왔는데 왤케 할 게 많은지, 그래도 지금 온 카페(Andus)는 꼭 오고 싶어서 가는 길에 들렀는데 (바다는 안 보이지만) 창가에 귀여운 1인석 자리도 있고, 옆에 식당(Goro)에서 맛있는 밥 먹었다고 3천 원 할인도 해주시고, 뒤에 숍에서 인센스도 사고, 사장님이 마들렌 서비스도 해주시고, 생각보다 조용해서 좋다(입가심하라고 홍차도 주셨다, 내일 또 오고 싶은데 3일간 휴무라고 ㅠㅠ). 이 카페 자주오게 다음에는 모슬포 쪽에 숙소를 잡고 며칠 동안 있어야겠다.


여행은 일상처럼 하라고 했던가, 그래서 제주도까지 와서 나는 일상처럼 일도 하고 게을러도 하고 있다. 엄마는 똑같이 지낼 거면서 굳이 뭐하러 거기까지 가서 그러고 있느냐고 했지만, 내 이번 여행은 목적은 단지 여기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지내도 좋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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