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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Nov 13. 2020

그림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평생 한 번 겪기도 어려운 파업을 회사 생활 동안 참 여러 번 겪었다. 자잘한 건 제외하고 두 달 넘게 싸웠던 73일간의 파업과 여섯 달 정도 이어진 170일간의 파업이 가장 크고 강렬했다. 모든 생활이 규칙적이던 직장인들이 갑자기 일을 안 하게 되니 흘러넘칠 정도로 시간이 늘었다. 오전 10시쯤 회사에 모여 으쌰으쌰 노래 부르고 두어 시간쯤 집회하는 걸로 그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처음엔 동료들과 함께 점심 먹고 낮술도 한 잔 하며 경영진과 낙하산 사장, 나라님들 씹는 재미가 쏠쏠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여의도 증권맨들 사이를 비틀대는 호기도 부려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금방 끝날 것처럼 보였던 투쟁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각자 다양한 스타일로 장기전에 대비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거나 연애에 집중하기도 하고, 평소 하고 싶던 외국어 공부를 하는 사람, 책이나 영화에 심취하거나 미뤄뒀던 소개팅을 한꺼번에 몰아서 해치우는 선배들도 있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다 보니 묘하게도 사원 출산율이 가파르게 상승해 ‘파업둥이’ 라는 귀여운 애칭의 아가들이 태어나는 계기도 됐다. 걔 중에는 함께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비밀로 하고 몰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이들마저 있었으니 (사실 다 아는데 그냥 모르는 척 해줬던 거야 너희) 천여 명에 달하는 파업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호흡으로 엄혹한 시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입사 5년 차, 이제야 어느 정도 손에 일이 잡히고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오던 참에 벌어진 파업 사태는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광활한 오후 시간을 도대체 어찌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 예전부터 꼭 한 번 하고 싶었던 걸 이참에 배워보기로 했다. 그게 바로 ‘그림’ 이었다. 꼬맹이 때부터 끄적거리고 낙서하는 걸 좋아한 터라 학원 한 번 보내달라 그리 졸랐는데도 응해주지 않던 부모덕에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미술. 이대로 인생의 한으로 남은 채 끝나겠구나 싶었는데 때마침 파업이라는 좋은(?) 기회를 맞아 용기를 냈다.



[직장인 취미미술반] 이라는 허름한 간판의 집 근처 미술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좁은 교실에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이젤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연필, 수채화, 유화, 목탄, 동양화 등 종목은 다양했지만 저마다의 캔버스와 스케치북 속으로 고요하게 빠져든 상태였다. 남녀노소 다양한 수강생들이 있었는데 슥삭 거리는 붓질 소리 외에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귀는 새벽녘 호수가처럼 한없이 고요했지만 코는 달랐다. 후각을 통렬히 강타하는 낯선 냄새들은 카오스적인 환희 그 자체였다. 눅진하고 깊은 유화물감 냄새나 린시드 오일에서 풍기는 강렬한 휘발향, 4B연필에서 나는 흑연과 숲향기, 톰보우 지우개의 고무 냄새 등 온갖 것들이 뒤섞여 ‘미술 냄새’ 라는 신세계를 펼쳐 보였다.


문을 여는 순간 바로 깨달았다. 이 곳과 사랑에 빠졌다는 걸. 상담이고 뭐고 없이 첫날부터 수업을 받았다. 4B연필 하나 쥐고 초등학생마냥 선과 면을 그을 뿐인데도 마냥 신났다. 이것이야말로 원초적인 즐거움. 뭔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 완성한다는 기쁨. 영원히 기록으로 남는다는 불멸성. 머릿속의 상상이 그대로 손으로 구현되는 마술 같은 미술의 힘. 인간보다는 유인원에 가까웠을 고대인들이 동굴 안에 벽화를 그릴 때 그들도 이리 행복했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업은 끝났다. 빨리 다음 주가 왔으면...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미술 시간만 기다려지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미쳐 돌아갔다. 알량한 권력 좀 갖자고, 부자 되겠다고, 목에 힘 좀 주겠다면서 불법과 편법으로 규칙을 파괴하고 수십, 수백 명에 대한 해고와 징계의 칼춤을 추는 이들에 맞서 파업은 더욱 거세졌다. 그럴수록 미술학원에서 보내는 몇 시간 남짓한 수업 시간이 점점 더 소중해졌다. 속세의 번뇌와 고통은 잠시 잊고 오롯이 눈앞의 하얀 사각형에만 집중한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오후 6시면 학원에 도착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하얀 스케치북을 펼쳐 ‘그럼 오늘도 한 번 그려볼까?’ 씩씩하게 연필 들고 잠시 깔짝대다 보면 대뜸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이제 정리합시다” 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왜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라는 생각에 시계를 보면 밤 10시를 훌쩍 지나있기 일쑤였다. 학원이 이화여대 근처라 여대생이나 미모의 직장인들도 꽤 있는 편이었다. 여대 옆 미술학원에 다닌다고 회사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아주 좋은 전략적 접근이라며 칭찬하는 선배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학원을 다니자 미모고 뭐고 주변을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옆자리에 누가 앉았다 일어나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눈앞의 종이에만 집중하고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원장 선생님도 인상적이었다. 첫날, 연필로 얼기설기 그은 직선과 곡선만 보고도 내 성격을 정확하게 맞추던 쌤. 바움테스트 같은 학문적인 영역의 그림 심리 검사도 있을 정도이니 그림 가르치는 일만 십 수 년째인 원장쌤에게 그 정도는 별일도 아니었겠지. 조금씩 말을 트게 되면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왜 학원을 다니게 됐는지를 얘기하게 됐다.

“그랬구나. 사실 모단님 말고 그 회사에서 우리 화실 다니는 사람 세 명 더 있어요. 다들 파업 시작하고 오신 분들이구요.”

아픔이 있으면 그림을 찾게 되는 걸까. 부서가 달라 얼굴을 봐도 모를 사람들이었지만 피 튀기는 전장을 벗어나 한숨 돌릴 오아시스로 미술학원을 고른 파업 동지들이 나 말고 몇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 꽤 반가웠다.


연필→목탄→유화로 이어지는 입문자 코스를 몇 달에 걸쳐 이어갔다. 그중에서 유화는 어린 시절에 봤던 “어때요 여러분, 참 쉽죠?” 밥 로스 선생님의 영향으로 언젠간 꼭 한 번쯤 해보고 싶던 사나이의 로망, 그림의 끝판왕이었는데 그걸 진짜로 시작하게 되자 뭔가 좀 뭉클했다. 기름을 듬뿍 머금은 붓으로 유화물감을 치덕치덕 발라가며 다양한 풍광을 그려보니 이게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매력 넘치는 기법이었다.



단 한 번의 붓질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두 겹, 세 겹씩 층층이 두텁게 쌓아 올려야 완성된다. 노란색 하나를 칠하더라도 그냥 흰 바탕에 칠하는 노랑과 회색 바탕 위, 붉은 바탕 위, 초록 바탕 위에 칠하는 노랑이 미묘하게 달랐다. 대충 봐선 모를 수도 있지만 제각각 다른 감정과 빛깔을 품고 있다는 게 희미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내면의 심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선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색상과 감정이 밑바탕에 탄탄히 깔려 있어야만 한다. 그게 없으면 어딘가 공허한 그림밖에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향한 애틋함을 전달하려면 진심과 정성이라는 씨줄과 날줄을 탄탄히 얽은 다음 그 위에 표현해야 하는 것이었건만… 그림이라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젊은 날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철없는 실수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잘 그리기 위해선 손보다 눈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배우지 않아도 색채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화장이나 옷을 매치하면서 감각이 길러진다고 하던데 지극히 평범한 남자인 내게 그런 센스는 없었다.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릴 때와는 달리 색을 쓰기 시작하자 관찰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원장쌤이 날 붙잡고 말했다.

“지금 저분의 얼굴이 정말 살색으로만 보이세요? 잘 한 번 봐요.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옷에 한 번 부딪혔다가 다시 올라와 얼굴에 닿고 있어요. 창문에서는 옆 건물 광고판 불빛도 쏟아지고 있지요? 제가 보기엔 콧방울에는 보라색도 좀 보이고, 뺨에는 쑥색 같은 느낌도 있고, 턱 쪽 그림자에는 회색이랑 붉은 빛깔도 아른아른한데요?”


정말 그랬다. 고작 얼굴 하나인데 이렇게나 많은 색이 숨어 있다니, 처음으로 자각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상의 다채로운 색들이 그제야 느껴졌다. 눈을 뜬 거다. 알게 되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 옷, 물건, 나무, 화단, 건물, 음식…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세상 만물은 말도 못 할 만큼 다양한 색으로 이뤄져 있었다. 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그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이는 붉은색 립스틱 5개를 두고 이게 어떻게 같냐고, 구분이 그렇게 안 되냐고 고개를 저으며 한심해하던 여성 친구들의 심정을 이제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보는 눈도 달라지고 표현하는 것도 달라졌다. 금손들처럼 잘 그리진 못하지만 상관없다. 어디 출품할 것도 아니고 프로가 될 것도 아니다. 그리는 동안 내가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행복하게 그려나갔다. 대부분의 작품이 유명 작가들의 모작이었지만 그것 또한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곡을 어설프게 커버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게 아마추어의 특권 아니겠는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족적을 아장아장 따라서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개무량했다.


유화 다음으로는 수채화에도 한 번 도전해보자며 신나 하던 어느 날 파업이 거짓말처럼 끝나버렸다. 하루아침에 회사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불규칙한 퇴근과 빈번한 주말 근무로 학원은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세상만사 내팽개치고 미술에만 집중하던 넉 달 간의 시간이 지금 돌이켜보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당시에 그렸던 그림을 오랜만에 다시 꺼내봤다. 모든 게 서툰 초보 주제에 의욕만 철철 넘쳐 앞만 보고 저돌적으로 내달리던 감정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폭풍 같던 야만의 시절.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8호짜리 캔버스와 실드 유화물감.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림이 참 고맙고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한 조각의 그림이 그들의 삶에도 포근한 위로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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