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언 레시피> 2009
충동적이었다 요리를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애당초 음식이나 맛에 도무지 관심이 없어 ‘우리 오늘 저녁엔 뭐 맛있는 거 먹을까?’ 같은 고민 자체가 낭비라고 생각해왔다. 지친 일상을 따뜻한 음식으로 위로받는 온 세상 미식가들에게 비난받아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메마른 인생을 살아온 내가 요리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동네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셰프님을 소개받았다. 스타 선수일수록 스타 감독이 되기는 어려운 것처럼 본인이 아무리 요리를 잘한다 해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 아닌가. 요리 지도는 처음이라는 셰프 쌤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커리큘럼이 고민되는지 가벼운 인터뷰를 먼저 진행했다. 요리에 대한 나의 애티튜드, 평소에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가는지, 식성, 취향, 집에 어떤 요리 도구가 있는지 등 디테일한 사전 조율을 마친 다음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
계란 프라이나 라면, 3분 카레 데치기나 해 봤던 내가 부엌칼을 잡아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감자도 깎고 양파도 썰었다. 태어나 처음 만져보는 보랏빛 광택의 가지에 칼을 갖다 대자 탄성이 있는 폭신한 스펀지를 자르는 것만 같은 신기한 감각이 재밌어 한참을 썰고 다지며 갖고 놀았다. 속 터지고 답답할 게 분명한데도 선생님은 차근차근 진도를 이어갔다. 기본이고 뭐고 아예 아무것도 없으니 ‘TV유치원 요리교실’ 수준의 수업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지고 볶고 나면 얼추 그럴듯한 요리가 완성됐고 마지막에는 쌤과 함께 그날의 완성품을 시식했다. 수십 년간 살아오며 많은 끼니를 먹어왔지만 내가 먹어온 밥은 언제나 ‘타인의 작품’ 이었다. 어머니가 해주셨거나 취사병이 해줬거나 식당 아저씨가 만든 음식의 최종 결과물만 받아봤지 재료 준비부터 조리 과정 전체를 오롯이 내 손으로 진행한 건 처음이었다.
식탁에 놓여있는 건 아주 심플한 고기덮밥 한 그릇. 게임으로 비교하자면 내가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은 다른 이가 다 만들어놓은 만렙 캐릭터를 뚝딱 현질해서 결과물만 구매한 느낌이고 지금 눈앞에 있는 고기덮밥은 레벨1에서부터 수백 시간 생사고락을 함께 겪으며 키워낸 정든 캐릭터 같았다. 사랑스럽고 어여뻐 먹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조심조심 한 숟갈 떠서 맛을 보는데… 눈물이 또르르 흐를 것만 같은 느낌. 내 손으로 갓 만든 음식이란 정말 따뜻하고 맛있는 거구나. 생의 알파이자 오메가. 숨이 붙어 있는 한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함께 해야 하는 ‘밥 먹기’. 살아남기 위한 기본이자 필수인 요리 스킬을 연마하기 위한 수업은 매주 계속됐다. 선생님께서 사 오라는 준비물을 챙기기 위해 마트의 [채소/신선식품] 코너에 처음 들어가 봤다. 그동안은 [즉석/가공식품] 코너나 [빵/과자] 선에서 쇼핑을 끝내던 내가 낯선 여행지를 거니는 느낌으로 애호박과 주키니호박의 차이가 뭔지, 진간장 국간장 양조간장이 뭐가 다른지 고민하는 스스로가 좀 기특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체계적이었다. 기본에서 출발한 요리가 어떻게 분화되는지 꼼꼼히 알려줬다. 기본 채소들을 볶고 마늘과 양념으로 밑간까지 마치면 어떤 요리에도 통용되는 베이스가 준비된다. 여기에 된장 고추장 청국장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 나가면 강된장. 아니면 물을 더 넣고 두부와 된장, 감자, 팽이버섯, 고춧가루를 첨가하면 얼큰한 된장찌개. 양송이버섯과 간장, 우스터소스에 삶은 파스타면을 넣으면 오리엔탈 파스타. 다진 고기와 두부를 달달 볶고 이금기 두반장 소스와 설탕, 전분으로 농도를 잡아주면 마파두부가 뚝딱 하고 완성됐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마법의 세계. 기본 흰 티 위에다가 요렇게 옷을 걸치면 면접 복장도 되고 저렇게 툭 걸치면 데이트용 캐주얼도 된다는 걸 알려주는 내공 깊은 스타일리스트 같았다.
어떤 날은 한참 동안 마늘을 강판에 갈고 별생각 없이 손톱 냄새를 맡아봤는데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손끝에서 나던 그 냄새가 났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나를 안아주려는 엄마 손에서 싫은 냄새가 난다고 뿌리치고 투정 부렸던 꼬맹이 시절. 그 날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주려고 마늘을 다진 날이었던 거구나. 아가들 입에 들어갈 음식 하느라 허리 한 번 못 펴고 종일 요리만 했을 텐데 아들내미는 당신 손에서 마늘 냄새난다고 치우라며 소리나 질러댔으니…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반성합니다.
어느 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요리는 사치스러운 일인 게 맞다. 한 사람 먹겠다고 준비하기에는 재료값 비싸고 만드는 시간은 오래 걸리는데 10분이면 뚝딱 먹고 사라지니 허무하기까지 하다. 남는 건 뒷정리와 설거지, 음식물 쓰레기. 잔뜩 사둔 남은 재료는 버리기 일쑤.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그동안 몇 주에 걸쳐 요리를 가르쳤지만 바쁜 회사 생활에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요리는커녕 라면 하나 끓이기도 힘들 게 분명하다. 이해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요리를 할 수는 있는데 귀찮아서 안 하는 것과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니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제자님을 어설프게나마 요리를 할 수는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싶었고 어느 정도 그 뜻을 이뤘다. 이제 그만 하산하시도록…”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일요일. 잠에서 깨 점심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다 얼마 전 사둔 감자에서 슬슬 싹이 날 기미가 보이는 걸 발견했다. 더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잘게 썬 다음 전분가루와 함께 골고루 익혀 겉바속촉의 감자전을 만들었다. 몽땅 갈아서 부침개 스타일로 부치는 게 정석인 건 알지만 ‘채 썬 감자칩’ 느낌으로 바삭한 텍스쳐를 한 번 살려봤다. 햇살 눈부신 식탁에 앉아 고소하게 익은 감자전을 오물오물 먹고 있자니 뭔가 좀 뿌듯했다. 휴일에 짜파게티가 아니라 감자전을 부쳐 먹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스로를 아끼고 보듬는다는 게 이런 건가? 이제 보니 요리란 사랑 그 자체로구나.
하와이섬 북쪽의 호노카아 마을. 호놀룰루나 와이키키 같은 세계적인 관광지와는 다르게 원주민과 백인, 몇몇의 일본인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작고 소박한 동네다. 연인과 놀러 와 오픈카로 해안도로를 달리며 기분 내던 일본 청년 레오. 그러나 둘 사이에 뭐가 그리 안 맞았는지 하와이까지 와서는 한참을 다툰 끝에 이별하게 된다. 상처 입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라도 필요했던 걸까. 레오는 여행 도중에 보았던 ‘호노카아 마을 극장’ 에서 알바를 하며 고요한 하와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질주하는 세상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흘러넘치는 햇살과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넉넉히 품은 채 느리고 조용하게만 흘러가는 마을.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 늘어지게 하품하는 창가의 고양이. 통통한 소년은 경쾌하게 우쿨렐레를 튕기고, 건강하게 그을린 마을 아가씨는 빗자루를 들고 씩씩하게 가게 입구를 청소한다.
극장의 명물 간식 마라소다 도넛을 만들어 납품하는 할머니 집에 밀가루 배달을 간 레오. 아무 인기척이 없자 출출한 김에 냄비에 담긴 생선조림을 살짝 맛보다 그만 천상의 맛을 느껴버린다. 기껏해야 인스턴트 라면 나부랭이로 끼니를 해결하는 서글픈 청춘에게 정성이 가득 담긴 생선요리는 충격이었던 거다. 그러나 사실은…
비이: 그건 고양이 밥…
레오: 네? 엄청 맛있는데요.
비이: 그거 고양이 먹이라고요.
레오: 아, 죄송합니다.
비이: 나중에 다시 와요. 사람 먹이 만들어줄게요. 내일 와요.
어딘가 좀 엉뚱하면서도 하와이의 바람을 쏙 빼닮은 맑은 눈동자를 한 비이 할머니의 호의로 레오는 할머니 댁의 식객이 된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 (원제: 호노카아 보이)>는 이렇게 시작된 할머니와 청년의 조금은 독특한 식사 동행 길에 따라나서는 작품이다. 음식영화의 미덕이 그러하듯 정갈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할머니의 요리에 한 번 반하고, 호노카아 해변의 투명한 바다와 느릿느릿 귀엽고 소박한 마을 풍광에 두 번째로 반하게 된다.
비이 할머니는 꾸역꾸역 입 안 가득 음식을 욱여넣는 레오를 위해 날마다 실력 발휘를 한다. 좀 주책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매 끼니 밥을 해준다는 설렘에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할머니.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예쁜 옷을 입고 요리해보기도 하지만 둔감한 레오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할머니와의 저녁 식사에 새로 사귄 여자친구나 데려오고 말이다.
영화의 가장 큰 갈등 구조라고 해봐야 할머니의 질투나 극장주 아저씨의 팔 부상 정도가 전부인 <하와이언 레시피>. 이 귀여운 영화는 따뜻한 밥을 맛있게 먹는다는 게 상처투성이인 우리네 인생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타인을 위해 기꺼이 음식을 해주는 마음이란 어찌나 숭고한지, 자기 먹을 것 딱 하나밖에 안 남은 마라소다를 상대에게 선뜻 건네는 게 얼마나 거룩한 사랑인지 속삭이듯 알려준다.
새빨간 오픈카에 (아오이 유우라는) 절세미녀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조차 뚱한 표정으로 인상이나 쓰던 레오였는데 영화의 마지막, 할머니를 향해서는 싱그러운 눈웃음을 함박 지으며 인사한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통해 한껏 사랑받은 레오는 그 또한 나중에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 것이 틀림없다. 사랑은 받아본 자가 베풀 수 있는 것처럼 따뜻한 밥 한 그릇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이니까.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레오는 어쩌면 우에노 아메요코 옆에 작은 식당을 하나 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된장국과 꽁치구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긴 따뜻한 가정식을 한 상 가득 대접하는 기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비이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한 스푼씩 담아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