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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Oct 30. 2020

도망치다 발견한 행복

<서바이벌 패밀리> 2017


“선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천천히 뒷걸음질로 나오세요.”

한창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데 후배 녀석이 조심스럽게 내 옷자락을 잡아끌며 말했다. 꽤나 다부지게 당기는 바람에 한 걸음씩 엉거주춤 뒤로 끌려갔다. 쿠마모토시를 송두리째 덮친 큰 지진에 마을의 건물은 거의 다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주민들은 모두 근방의 체육관으로 대피한 상태고 고양이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유령도시였다. 마침 출입구가 잠겨있지 않은 상점을 발견해 안에 들어가 붕괴된 실내를 담고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지진에 직격 당한 건물 안의 모습이었다. 현장감 있게 담아 피해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 보니 건물 안 깊숙이 들어와 버렸는데 어느 순간 후배가 슬그머니 나를 잡아당긴 것이다. 왜인지 영문을 몰라 질질 끌려 나가며 천장을 보니 내가 서있던 자리 바로 위로 끊어진 철근 끄트머리에 거대한 콘크리트 덩이가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100kg은 족히 될법한 돌덩어리가 머리 위로 와락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래서 일본 취재진들은 모두 헬멧을 쓰고 있었던 거구나.



마음을 추스르고 주변의 일반 가정집을 촬영하자 지나가던 일본인들이 물끄러미 우리를 구경했다. 시골 마을이다 보니 방송국 ENG카메라가 조금 신기한가 보다. 편히 구경하시라 놔두고 박살난 현관, 깨진 유리창, 기울어진 담장 등 집 이곳저곳을 집요하고 샅샅이 담았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뒤편에서 구경하던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기 혹시… 이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그 집의 주인 내외분이셨다. 사랑하는 가족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열 받고 다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일 텐데 어디서 굴러 들어온 방송국 놈들이 (그것도 NHK나 후지TV 같은 메이저도 아니고 웬 듣보잡 외국 방송사가?!) 허락도 없이 내 집 구석구석을 카메라로 담고 있다? 이거 정말 크게 화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아닌가.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며 혼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맙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래도 운 좋게 아무도 안 다쳤어요. 옷가지랑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있나 살펴보러 온 거예요.”

황급히 인사를 드리고 가족 분들은 무사히 대피를 하셨는지, 다친 사람은 없는지 등을 묻자 두 분은 조곤조곤 대답했다. 가재도구며 티셔츠 같은 걸 먼지와 흙에 파묻힌 가구 안에서 꺼냈다. 더 이상 카메라를 들이 대기 송구스러워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돌리는 순간 아저씨께서 한 마디 하셨다.

“잘 담아주세요. 잘 담아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 많이 알려주세요. 그래야 앞으로 더 조심하지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먹먹했다. 수없이 많은 일본어 교재와 수험서를 봤지만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적절한 위로의 말’ 같은 건 본 기억이 없다. 최선을 다하겠노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남기고 대피소인 체육관으로 향했다. 전쟁이 터진 후의 피난민 수용소가 딱 이런 분위기일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농구 코트 위에 얼기설기 엮은 골판지 박스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비규환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 안에도 분명 질서가 있고 룰이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수돗물을 사용하고 식사를 배급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와 급조된 미용실이나 안마실이 운영됐고 상심한 노인들 옆에 앉아 말벗 봉사를 하는 대학생들도 많았다.



체육관 밖 잔디밭에는 대형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대가족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를 청하자 7~8명에 달하는 식구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어머니를 지목했다. ‘엄마! 엄마가 해! 이건 기회야! 한국 뉴스라고 하잖아. 엄마가 좋아하는 강동원상이 볼지도 모른다고!’ 모두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어머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지진이 났을 때의 상황과 지금의 대피 현황을 차분히 설명해줬다. 인사를 드리고 텐트를 떠나려 하자 마침 밥시간이라 소고기덮밥을 많이 만들었으니 우리도 한 그릇씩 하라며 한 주걱 가득 밥을 푸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두 손 두 발에 고개까지 내저으며 가까스로 사양했다. (일본어를 전혀 못 하는 후배 2명이 완벽한 일본어로 “아닙니다!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를 유창하게 외치는 기적을 행했다)


이 사람들은 뭘까. 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한 재난을 당했는데 마치 캠핑이라도 온 화목한 가족의 느낌. 슬프긴 하지만 마냥 울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 산 사람은 씩씩하게 살아 봅시다! 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몇 번은 마주치게 될 숙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자연재해는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수 이벤트구나. 분명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인데도 자연의 힘에 당당히 맞선 다음 찾아오는 패배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 그 안에는 가족이 있다. 재난 앞에서 한 인간은 약하지만 한 가족은 강하더라.






대화도 없고 사랑도 없는 4명이 한 집에 살고 있다. 도쿄 시내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전형적인 중산층 4인 가족이지만 공유 오피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 마냥 공간만 같이 쓸 뿐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다. 회사에 지친 아버지는 거실에 죽치고 앉아 TV만 보고 대학생, 고등학생인 남매는 각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거치느라 정신이 없다. 친정에서 보내준 큼직한 생선이 징그러워 손질조차 못하는 심약한 어머니 혼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무미건조한 가정이다.



대화라고 해봐야 지겨운 잔소리뿐인 이 스즈키 집안사람들에게 어느 날 폭풍 같은 일이 닥친다. 일본 전체가 하루아침에 정전된 것이다. 그냥 정전도 아니고 기존에 갖고 있던 전자기기들마저 모조리 못 쓰게 되는 EMP아포칼립스가 터져버린 거다. 인구 4천만의 슈퍼 메트로폴리탄 도쿄는 한순간에 모든 게 마비된다. 전력으로 움직이던 모든 교통과 통신, 사회기반시설이 먹통이 되고 세계는 그 즉시 멈춰버린다.


숨이 멎은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바둥대는 보통 가족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 재난이 잦은 나라이기에 비교적 잘 대비하고 있는 편이라 자부하는 일본인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무서우리만치 현실적으로 혼란 속 참상을 속속들이 그려낸다.



모든 게 끊긴 상황인데도 몇 시간씩 걸어 어떻게든 학교와 직장으로 향하는 성실한 사람들. 물과 식료품을 사기 위해 마트로 달려가는 엄마들. 냉장고 안에서 썩어가는 음식. 그 와중에도 맡은 업무를 처리하겠다는 고지식한 회사원. 서둘러 짐을 싸고 피난길에 오르는 눈치 빠른 사람들. 며칠 안에 복구될 거라 막연히 낙관하는 이들. 배변 등의 현실적인 문제. 수도관리사업소 앞에 빈 생수통을 들고 길게 늘어선 사람들. 현금인출기 앞에선 새치기하지 말라며 몸싸움이 나고 지병이 있던 노인들은 죽어나간다.


일본 감독의 일본 영화인데도 ‘우리 일본은 이렇게 우수한 민족이다! 재난이 닥쳐도 서로 도와가며 이겨낸다!’ 가 아니라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법한 극한의 상황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편의점은 재난을 틈타 500ml 생수 한 병에 3만원이나 받는 폭리를 취한다.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 봐 아주 공손하게 “네에, 일단 저희 가게에서는 이 가격이라서요 양해를 좀 부탁드립니다” 라며 영업용 미소를 짓는 점주. 수족관에는 사람들이 쳐들어가 각종 희귀 어종을 모두 꺼내 생선구이를 해 먹기에 정신없고 시민을 통제해야 할 자위대는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노숙하는 도중에 남의 물과 식료품을 훔쳐 도망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도시에서는 도저히 꿈도 희망도 없기에 스즈키 일가는 자전거를 타고 아내의 친정 카고시마에 향하기로 결심한다. 따뜻한 기후에 농사도 짓고 있고 수산물도 풍부한 시골 마을이니 생존을 위해서는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서울 ↔ 부산 거리의 3배가 넘는 1300km를 헤쳐 나갈 일이 걱정이다. 그래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동네 마실용 따릉이 자전거에 몸을 싣고 떠나는 스즈키 가족의 머나먼 대장정.


고향 가는 길,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일까? 가족끼리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이 마냥 비장하거나 슬프지만은 않다. 오히려 약간 신나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가족 전원이 함께 외출하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일까? 막내딸이 유치원생일 때가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비록 대재앙이 원인이긴 하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4명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편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아내 미츠에는 아주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 뺨을 스치는 바람을 만끽한다.



폭풍에 휩싸이고 이산가족이 되기도 하고 들개를 피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지만 거의 3달을 쉼 없이 걷고 달린 끝에 고향 마을에 도착한다. 감격스러운 골인의 순간. 이미 이들은 도쿄 아파트에 살던 시절의 무늬만 가족이 아니다. 든든하게 서로의 생명을 지켜주고 끈끈하게 잡아당겨준 둘도 없는 혈육으로 재탄생했다. 고난의 행군이 이들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이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전력이 복구되고 나중에 도쿄로 돌아가면 또다시 툭탁거리고 각자의 삶에 바빠질 게 분명하다. 그래도 함께 피난 가던 나날들, 어촌 마을에서 하루 종일 몸을 써서 일하던 노동의 시간들은 이 생존 가족의 삶에 있어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순간들로 남았을 테고 그만큼 서로를 더 신뢰하고 굳게 의지할 게 분명하다.


'5월: 가정의 달 특선 영화' 로 방영돼도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작품을 보며 생각했다.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역시 가족이구나. 근데, 그러면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은 어쩌지?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지켜야 하는 소중한 이가 있기에 사람은 한없이 강해질 수 있는 건데 싱글족들은 그런 면에서 좀 무력하지 않을까? 그러다 떠올렸다. 맞아, 나에겐 내 사랑 고무나무가 있지! 여차하면 고무나무 한 그루만 딱 들고 피난길에 올라야겠다. 레옹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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