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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l 04. 2021

사진 한 컷, 진심 한 칸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2006


대학생이 됐다는 해방감에 취해 낙제에 가까운 학점을 받았다. 만회를 해야 했기에 익숙한 수업을 하나 들어보기로 했다. 학보사에서 매일같이 취재현장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던 터라 사진 초보 학우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판단. 그 결과 선택한 강의가 <사진의 이해>라는 이름의 3학점짜리 교양수업이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강사는 ‘교수님’ 보다는 ‘형’ 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만큼 젊은 감각에 열정 또한 넘쳤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젤라틴 실버프린트, 피사계심도와 황금분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매그넘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역사와 현재를 성의 있게 설명했다. 강의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그가 사진 그 자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사진만큼 재밌는 게 또 있을까요? 이걸 학생 여러분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어요. 우리 함께 한 학기 동안 행복하게 찍어 봐요!’ 사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한참이나 고백하던 선생님은 과제를 하나 내주었다. 인물 사진 찍어오기. 가족, 친구, 지인 누구든 상관없으니 사람을 한 명 찍어와 그 사진에 대해서 함께 얘기를 나눠보자 했다.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같은 과에 은근히 흠모하는 여학생이 있던 21살의 남학생에게 이보다 더 적절하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딱 좋은 과제였다. ‘아니 내가 뭐 딴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닌데… 모델 좀 도와주라. 다음 주까지 제출이라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 무슨 수업 첫날부터 이런 걸 시키는지 모르겠네 정말. 귀찮게시리…’ 겉으로는 투덜대면서도 입 꼬리가 움찔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학생은 선선히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4월 햇살이 화창한 교정 안 공원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촬영했다. DSLR도 아니고 핸드폰카메라도 아닌 시절이다. 한 컷 찍을 때마다 엄지손가락으로 ‘촤륵!’ 와인더를 돌려 필름을 감아야 하는 수동카메라 니콘FE. 연사가 안 되는 기종이라 느릿느릿, 정성껏, 한 장 한 장 담았다. 이렇게까지 집중하면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나?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 눈빛, 표정…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매, 주변의 따뜻한 공기, 봄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의 흔들림, 잎사귀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머무는 콧잔등의 보드라움까지 느껴졌다.


손톱만 한 뷰파인더를 통해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 또한 50mm 1.4 렌즈의 유리알을 통해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한참 동안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촬영을 이어간다. 평소에 그렇게까지 친한 편은 아니었는데 촬영을 하는 동안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평소 학교생활에선 볼 수 없던 무방비의 해맑은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한다. 송글송글 흐르는 땀방울이 눈을 찔러도 깜박이지 않고 참는다. 1000분의 1초. 말도 못 하게 짧은 찰나의 한 순간에 터지는 희미한 웃음을 오롯이 담아낸다. 찰칵 찰칵-!



그렇게 과제를 핑계로 이뤄진 촬영회는 무사히 끝났다. 촬영한 흑백 필름은 암실로 가져가 현상 인화했다. 엘리드 2호 인화지에 정갈하게 담아낸 사진을 다음 수업 시간에 가져갔다. 학생들은 자기가 찍어온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강사는 돌아다니며 한 명씩 코멘트해줬다. 낮잠 자는 막내 동생의 통통한 엉덩이, 저녁 찬거리를 다듬는 엄마의 뒷모습, 항상 타는 마을버스의 운전기사 아저씨… 저마다 다양한 인물 사진을 담아갖고 왔다.


어느덧 내 차례. 강사는 자리로 와 책상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친구들의 정다운 가족사진을 보며 계속 머금고 있던 얼굴의 웃음기가 조금씩 사라진다.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집안의 반대로 20년 전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연인의 얼굴이라도 보는 듯 시선은 점점 더 사진 속으로 깊게 빠져든다. 무얼 그리 심각하게 보는 걸까. 얼굴, 표정, 옷차림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샅샅이 살피던 그는 힐끗하고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요한 감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천천히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그렇게 좋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한참 동안 사진만 보더니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어휴, 사진에 무슨… 막 덕지덕지 엄청 묻어 있잖아요. 좋아하는 마음이. 후후.”

손가락 끝으로 사진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더니 힘내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는 다른 친구들의 과제로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일까. 좋아하냐고? 아니 막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뭐 근데 생각해보면 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21살 남자의 마음은 갈대인지라 나도 이런 갈팡질팡한 내 감정을 잘 모르겠는데… 근데 고작 사진이라는 종이 쪼가리 한 장에 내 마음이 그렇게까지 담겨있고, 그걸 슬쩍 보고는 바로 알아차렸다고? 그게 가능해? 뭐 이리 거짓말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 몰랐으니까. 사진  장에 찍는 사람의 진심이 얼마만큼이나 담길  있고 찍히는 사람의 기분은 어느 정도까지 표현될  있는지. 찍고 찍히는  사람 사이 감정의 온도가 어떻게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길  있는 건지. 어째서 사진이란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의 부재 증명인지. 그땐 정말 아무것도 랐다.







시작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차들이 쌩쌩 다니는 학교 앞 도로. 신호등이 없어 좀처럼 건너기 어려운 횡단보도가 있다. 혹시 차를 멈추고 양보해주는 운전자가 있지 않을까 초등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고 좌우를 살피는 대학 신입생 시즈루. 그런 그녀가 흥미로우면서도 귀여워 갖고 있던 카메라로 몰래 사진을 한 장 찍는 같은 대학 신입생 마코토.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는 그가 찍은 사진에서 시작해 그녀가 찍은 사진으로 끝나는, 연애사진의 모든 것이 담긴 풋풋한 청춘들의 이야기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기만 한 두 신입생, 시즈루와 마코토는 함께 사진을 찍으며 가까워진다. 그녀는 그가 무척 마음에 들지만 정작 그는 같은 과 미모의 여학생에게만 관심이 있다. 엇갈리는 마음. 비켜가는 진심. 사랑에 미숙한 청춘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애매한 채로 시간만 흘려보낸다.



마코토: 시즈루는 생일이 언제야? 다음번엔 시즈루의 생일도 축하해야지.

시즈루: 기쁘게 띄워준 다음에 지옥까지 떨어뜨릴 셈이야? 내 축하 같은 건 됐으니까 이제 마코토는 미유키만 생각하면 돼. 미유키와의 사랑을 성취하는 것만 생각해.

마코토: 그게… 꼭 사귀는 것만이 사랑은 아니잖아.

시즈루: 응?

마코토: 짝사랑이라고 해도, 그건 또 그거대로의 완성된 사랑이 아닐까?


학과의 얼짱이자 대표 인싸인 미유키에게 도무지 고백할 엄두조차 못내 늘 주저하고만 있는 마코토의 한 마디. 그런데 이 대사는 사실 시즈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래, 짝사랑이라고 나쁜 거는 아니잖아. 혼자서 좋아하다가 아파하고 견뎌내고… 그런 게 청춘 아니겠어? 시즈루는 결심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제대로 된 짝사랑을 해보는 거야. 그 일환으로 마코토와 함께 사진 콩쿠르에 작품을 응모해보기로 한다. 출품작을 찍기 위해 마코토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 부탁하는 시즈루. 사진의 제목은 ‘키스하는 연인’. 함께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을 찍자고 한다.



너무나 직설적이고 난감한 부탁이지만 애초에 사진을 가르쳐준 것도, 콩쿠르를 알려준 것도 마코토였다. 그런 까닭인지 친구로서 사진모델 정도는 해주겠다며 그녀의 작업을 돕기로 한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호숫가. 햇살이 쏟아지는 숲. 바람에 넘실대는 꽃봉오리와 잎사귀. 마코토는 조심스레 시즈루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이 순간이 끝나버릴까 아쉬운 듯 천천히 셔터 릴리즈를 누르는 시즈루. 찰칵-! 그렇게 촬영된 한 장의 연애사진.


마코토: 슬슬 갈까?

시즈루: 난 좀 더 여기 있을래.

마코토: 그래. (…)

시즈루: 저기 마코토! …방금의 키스에 조금은 사랑이 있었을까?



그 말을 끝으로 시즈루는 멀리 떠나가 버린다. 철부지 여대생에서 벗어나 씩씩하고 당당한 ‘어른 여성’이 되기 위해 향한 곳은 뉴욕. 마코토가 가르쳐준 ‘사진’을 통해 밑바닥부터 착실하게 성장한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그녀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단단한, 멋진 여인이 된다. 마냥 귀여워해 주기만을 바라는 응석받이 여자친구가 아니라 좋아하는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연인이 되기 위한 긴 모험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언제나 늦는 법. 마코토가 뒤늦게 도착한 뉴욕에 더 이상 시즈루는 없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그녀의 사진뿐. 시즈루가 찍은 마코토의 사진이 벽 한 가득 걸려있다. 흑백사진이다. 알록달록한 색상이 빠져있기에 선과 면, 형태와 감정만이 오롯이 느껴진다. 수업을 듣는 마코토. 하품을 하는 마코토. 이를 닦는 마코토. 책을 읽는 마코토… 대상에 대한 사진가의 애정이 물씬 담겨 어느 한 장 허투루 찍은 컷이 없다. 뒤통수, 복숭아뼈, 속눈썹 한 올에 이르기까지 사진가의 사랑이 몽글몽글 배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결국 짝사랑. 이미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남자를 향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또한 사진 곳곳에 상흔처럼 담겨있다. 사랑과 슬픔의 애틋한 화학작용으로 완성된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며 뒤늦게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진심을 깨닫는 마코토. 사진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 백 마디의 말을 대신하는 사진 한 장. 시즈루는 훌륭한 사진가였던 게 분명하다.


사진 한 장에 웃다가 사진 한 장에 울음을 터뜨리는 세상 모든 방황하는 청춘들을 향한 감독의 따뜻한 헌사. 보고 나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며 싱그러운 사진 몇 장 찍고 싶어 지게 만드는 영화.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는 사진 속에 진심이 얼마만큼 담길 수 있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궁금했던 내 대학시절 의문에 대한 아름다운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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