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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과장 Jan 29. 2024

내 손가락 말고 저 달을 봐주세요.

(C) 김준권 작가 판화 '달뜨는 월출산'

1월이 금세 지나가고 있다. 이쯤이면 정부안에서 부처별로 올 한 해 동안 진행할 대략적 정책이나 사업의 윤곽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며칠뒤, 우리 과가 한 해 동안 진행할 정책에 대해 고객에 해당하는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정책설명회를 연다. 고객이 겹치는 바로 옆 부서도 마침 비슷한 성격의 설명회를 기획 중이어서 날짜를 맞추어 행사를 같이 열기로 했다.

1부에서는 옆 부서에서 각종 평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2부에서는 우리 부서에서 기관대상 지원내용에 대해 설명을 이어가기로 했다. 팀장이 몇 달간 공석인 상태에서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의 A주무관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관 담당자들로부터 1부 행사 참석문의가 많다. 350석 규모의 행사장을 준비했지만, 신청자는 이미 400명을 넘어선 상황. A주무관에게 상황 보고를 받고, 기관들의 참석 의지가 강한 만큼 희망하는 기관들은 가급적 제한 없이 참석할 수 있도록 큰 행사장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일단, 600명 이상 수용이 가능한 인근의 대규모 회의장을 예약해 두었다.

상황을 고려하여 큰 규모의 행사장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옆 부서와 협의토록 A주무관에게 지시했다. 몇 분 뒤 돌아온 A주무관.

"과장님, 이미 행사 진행 관련 안내 공문이 오늘 2번 나간 상황이어서 행사장 변경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행사장을 500미터 정도의 가까운 곳으로 변경하는 것인 만큼, 공문이 나갔더라도 고객입장에서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 생각을 다시 한번 전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온 A주무관.

"과장님, 이번에도 공문이 2번 나간 것을 이유로 어렵다고 합니다."

큰 정책방향을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도 넉넉한 사안에 대해 옆 부서가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체, 그 2번 나갔다는 공문 내용은 뭔가요?"

"네, 참석한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 오전에 한번 더 설명회를 열겠다는 내용입니다."

"네?..........;;;"

참석을 희망하는 기관들이 설명회에 더 수월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옆 부서에서 조치를 한 것인데, 오히려 우리 과에서 무리하게 장소변경을 고집한 꼴이 되었다.

 A주무관은 옆부서가 2번째 내보낸 그 공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과장이 지시한 '행사장 변경' 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이 옆 부서의 조치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보고의 핵심이 빠지고 말았다.

행사장 변경 필요성이 사라져 당초 행사장에서 설명회를 여는 것으로 정리됐다. 달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을 주의 깊게 바라봐준 A주무관의 열렬한 성원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김과장이 들었던 손가락을 가만히 본다.  

"래, 손가락이 조금 굽었. 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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