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장으로 각인된 기억
로쏘는 엄연히 말하자면 도시도 마을도 아니었다. 모리타니아와 세네갈 국경에 위치한 이 곳은 출입국 사무소가 있고, 환전소가 있고, 간단한 노점상 몇 개와 수많은 사기꾼이 진을 치고 있는 국경지대였다. 여느 접경지가 그렇듯 시끄럽고 활기찬 공기가 가득했지만 여행자로서는 '사기당하지 않고 통과하시오' 라는 퀘스트가 붙은 클리어 포인트로 보일 뿐이었다.
나는 퀘스트를 실패한 대가로 입국 브로커에게 돈을 뜯겼고, 환전소에서 부당하게 높은 환율을 두고 또 한번 언성을 높였다. 어둑어둑한 환전소 천막을 나오니 작열하는 아프리카의 태양이 다시 나를 반겨준다.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 없었던 국경을 바삐 빠져나왔을 때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후였다. 아니, 평정심을 잃은 적 없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수없이 많은 길 위에서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을 다 겪으며 얻은 것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가짐이었다. 예컨대 무슨 일이 일어났든 몸만 성하면 됐다, 라는 기조였다.
국경을 통과한 나의 다음 목적지는 생 루이라는 섬이었다. 대중교통이 열악한 세네갈에서 도시간 이동을 하려면 'Sept place taxi (7인용 택시)'를 타야 한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7명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일종의 합승택시였다. 열차나 버스 시간표가 딱딱 정해져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기약없는 기다림을 못 견뎌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진 게 시간 뿐이었던 나는 '7명이면 금방 모이겠네' 라는 여유로운 마음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30명짜리 미니버스가 꽉 찰 때까지 몇시간이고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7명쯤이야 우습지.
생 루이까지 가는 택시에 짐을 던져놓고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어슬렁 거렸다. 여러 대의 택시가 모여 있는 주차장에는 고맙게도 지붕이 있다. 땡볕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그늘막 아래에는 간단한 간식과 잡화따위를 파는 몇몇 노점상과 차, 커피를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신없던 출입국 사무소 근방과 사뭇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다. 그들은 흔치 않은 동양인 여자의 출현이 신기한 듯 순박한 눈으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지만 선뜻 나서 말을 걸거나 귀찮게 하진 않았다. 어딜 가나 사기꾼이 판을 치는 아프리카 땅에서는 유별난 일이었다.
별 특이할 것 없는 주차장 분위기에 금방 심심해진 나는 노점에서 땅콩 한 봉지를 사들었다.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던 노점상 아가씨들과 대화라도 해 볼 요량이었다. 나는 영어를, 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니 말이 통할 리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대화는 이어졌다. 어쩌면 그들과 나는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아무말대잔치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내가 카메라를 들어올리자 아가씨들이 꺄르륵 웃으며 손사레쳤다. 사진 찍는 시늉을 하니 기겁하며 몸을 피한다. 어떻게든 사진을 찍고 싶었던 나는 그들 앞에서 손을 싹싹 빌어보기도 하고 재롱을 부려보기도 했으나 그녀들은 여전히 주저하는 눈치였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찍어요!"
나는 옆에 있던 커피 파는 아저씨에게 카메라를 넘긴 후 아가씨들 사이로 들어가 앉았다. 주변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자 그제서야 그녀들도 웃으며 사진을 승낙했다. 카메라를 넘겨받은 아저씨는 제법 그럴듯한 포즈로 우리를 카메라에 담아줬다.
오래도록 혼자 다닌 여행, 몇 안되는 내 사진 중 하나가 이렇게 로쏘에서 찍혔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여지없이 표정이 굳어지고 억지웃음을 짓는 내가 이 사진 속에서만은 전에 없이 활짝 웃고 있다. 내 인생 모든 사진들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진. 시커멓게 타서는 화장도 안 하고 옷은 거지같이 입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가진 것 같아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타야 할 합승 택시 인원이 채워졌다. 이제 출발해야 할 시간이다. 노점상 사람들과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작별하고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택시는 후덥지근했지만, 노점상에서 얻은 즐거운 기운이 마음 한켠에 남아 꽤나 오랜 시간 미소 지을 수 있었다.
한두시간 남짓한 로쏘의 추억. 추억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고 평범한 기억이지만, 이상하게도 로쏘를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게 바로 사진 한 장의 힘일까. 국경에서 사기를 당했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그녀들과 나의 밝은 웃음만이 로쏘의 이름 아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