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뇌과학 이야기 #3] 뇌과학으로 바라보는 자유의지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1649)> [1]
과학적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니, 그동안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위해 했던 노력들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만약 우리에게 자유가 없고 우리의 미래는 모두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지금 내가 미래를 위해 하는 선택과 고민들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든, 어차피 내 미래는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면 우리의 미래가 어두울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 방 안에서 놀기만 하기로 결정하면, 내가 가진 돈을 모두 소비하고 생계유지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어제 심하게 다툰 친구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결정하면, 그 친구와는 소원해진 채로 중요한 인간관계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내가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고 다툰 친구에게 연락해 화해의 손길을 건넨다면, 우리는 좀 더 희망 있는 미래를 영위하게 될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미래를 바꿀만한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우리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은 허상에 가깝다. 대체 우리가 느끼는 자유의지와, 과학에서 바라보는 자유의지의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는 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저 전기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생화학적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자유라는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뇌에 대한 과학적 사실과 자유의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자유의지에 발생에 대한 나의 의견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동물로 태어나 식물로
바닷속을 들여다보면 신기한 생명체가 많다. 그중, 가장 내 흥미를 끈 생명체 중 하나가 있다. 이 생명체는 올챙이 형태로 태어나, 바다를 헤엄치며 자신이 정착할 곳을 찾아다닌다. 이 녀석들은 눈과 코를 닮은 기관으로 환경을 파악하고, 근육을 움직여 적절한 곳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한 번 정착할 곳을 찾으면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머리를 바위에 박고는, 본인의 뇌와 신경, 근육을 거의 모두 소화시켜 버린다. 이때부터 이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식물과도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자리에서 성장해,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멍게'가 된다.
진화를 통해 다듬어진 뇌의 기능
동물이 가지고 있는 뇌의 근본적인 역할은 선택을 만드는 것이다. 동물은 뇌를 통해, 위험을 판단하며 그 자리를 피하는 걸 선택하고, 본인에게 편안한 장소를 선택한다. 멍게가 유생 시기에는 헤엄을 치며 정착하기 적절한 장소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멍게는 본인의 뇌를 먹어치운 이후로는 더 이상 선택을 하지 못한다.
고등 동물의 뇌일수록 시간을 거치며 더 정교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고등 동물의 뇌는 단순히 자극에 반응을 하는 선택하는 과정을 지나,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분석해 여러 상황을 예측한다. 그래야만 여러 위험요소가 있고 먹을 것과 아늑한 곳을 찾기 힘든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모두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친구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해 그 순간부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그 오후의 일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기자고 시작했던 건 아니었지만, 괜히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어 상상한다. "아니, 너 말에는 문제가 있어"라고 말하며, 온갖 논리로 무장한 채 그 친구를 압도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나는 곧 우쭐해진다.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의 뇌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과학자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한 인류학자는 이 질문에 상상하는 능력을 뽑았다. [2]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도, 우리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려가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상황을 예측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심지어 경험도 없이 우리는 새롭게 학습을 한다. 놀랍지 않은가? 진화를 통해 발전한 우리의 뇌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상상을 하며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이로운 능력은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 준다. 과거의 선택이 바뀌었을 때의 결과를 우리에게 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보고 우리는 생각한다. '아, 내가 이런 선택을 했으면 그 결과가 정말 달라졌겠구나...'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다. '아,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혹은 '어휴, 내가 다른 선택을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우리는 이불속에서 이불 킥을 하기도 하고 베개를 붙잡고 안도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며 후회와 안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마치 과거로 다시 돌아갔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취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과자를 먹고 즐길 수도 있고 과자를 먹지 않고 참아냈다는 뿌듯함을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결과를 상상하는 능력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세계 모형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적절히 묘사하는 간단한 모형이 머릿속에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간단한'이라는 부분이 중요하다. 만약 내가 눈 앞에 있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고 해보자. 그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버튼에서 나온 가시광선이 내 안구를 통해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뇌로 들어온 뒤, 가치 판단 체계를 담당하는 신경 세포들을 통해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운동 신호로 전환되고, 그 신호가 근육으로 전달되어 버튼을 누르는 행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복잡해 보이지만, 이 또한 실제 과정을 굉장히 단순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신경 세포의 활동을 우리가 고려하려면 아무리 뛰어난 우리의 뇌라도 그 계산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눈으로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신경 세포 반응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상황을 단순화시켜 '나'와 '버튼'이라는 개체들을 이용하여 '내가 버튼을 누른다'라고 이 상황을 모형화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를 전쟁놀이에 비유했다. [4] 전술을 시험하기 위해 실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기에, 지도 위에 인형과 장난감 탱크를 이용해 전술을 시뮬레이션한다. 우리의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우리의 몸의 모든 신경 세포와 전기 신호를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와 주변 사람들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리적 작용들을 무시되며, 우리는 관찰 가능한 나와 주변 사람들의 선택 및 행동을 바탕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 한다.
세세한 요인들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기에, 사건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오류가 발생한다. 내가 버튼을 누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이미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이 동작하듯, 뇌에서 신호가 물리적으로 전달되고 처리되는 자동적이고 인과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뇌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단순히 모형화되어 있던 '나'라는 개체가 '버튼을 누른다'라는 행위를 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나'라는 개체가 '버튼을 누른다'까지의 행위를 하는 데에 필연적 과정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실제로는 물리적 과정에 의해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개체가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도 존재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버튼을 누르거나 누르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실체가 아닌 해석
우리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세계 모형을 통해 탄생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자유의지는 실체라기보다는 뇌가 만들어낸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그럴싸한 견해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자유의지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갈 필요는 없다. 우리의 뇌가 물리적 요소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자유의지라는 느낌에 대응하는 뇌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존재할 것이며, 그 상호작용은 우리의 행위에 유효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자유의 진화적 가치
생각해보자.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과정 속에서, 최선의 결과가 예측되는 선택의 경우를 배우게 된다. 또한, 미래를 바꿀 수 있단 이 자유로운 느낌은, 상상 가능한 선택지들 중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계산하게 하는 동기부여를 하도록 해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해 하는 노력들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즈(Franz M. Wuketits)는 우리가 선택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 느낌은 진화의 산물이라 주장했다. [5]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배우고, 미래의 상황을 예측해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해주는 능력은 개체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진화를 통해 뇌의 기능이 발달함과 동시에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지라는 느낌은 그 자체로 뇌의 기능으로써 혹은 문화적 관념으로써 자연선택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관한 고찰을 마치며...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의 과정은 힘들고 답답하다. 이 과정은 내가 내린 선택을 허무하게 만들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하며, 자유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과학적 관점의 우주와 내가 느끼는 자유의지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던 내 바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여러분이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질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질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달렸다. 이 글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뒤로 하고, 이제 몇 가지 남은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자유의지의 과학적 담론을 듣고 나서, 우리는 왜 허무함에 빠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하는 노력이 의미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이루어진 논의와 운명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운명론적인 세계관에서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든지 결과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전 글(자유의지 2편)에서 논의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현재의 결과는 과거의 선택과 노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결정론과 운명론을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 허무함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우리 삶을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그동안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얻었을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개념인 듯하다. 우리가 어떤 미래를 그리든 노력하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생각할 때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은, 우리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면 그 미래가 올 것이라는 행복감에 기반한다 생각한다. 자유의지 자체에 대한 감정과 행복한 미래를 그릴 때의 감정을 분리하는 작업을 통해,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롭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주는 이점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 느낌은 하나의 개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동기 부여해준다. 따라서 고민을 통해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해냈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선택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의 과정을 통해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을 대체적인 삶의 목표로서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자유의지 1편 참고)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선택은 자유롭다는 착각 안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다. 진정 나로 인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선택을 의심하고 주변에 영향들과 투쟁하고 선택에 따른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고민해야 한다. 끝없는 상상과 고민을 통해 우리는 '나'를 위한 선택, 즉 자유로운 선택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긴 글을 통해 설명한 것은 물리법칙에 의해 순간순간이 결정되는 우주에서 어떻게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모순 없이 나타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 아니다. 더 겸손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서 최선으로 느껴지는 설명을 제시한 것에 가깝다. 자유의지가 진화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자유의지 개념이 그 과정을 통해 진화했다는 인과적 관계를 설명하진 않으며,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의식과 자아 등의 뇌의 기능이 있기 때문에 논리를 완벽하게 메꾸고 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던 우주를 주체성 없이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시작한 추론이기에,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추후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자유의지에 대한 여러분의 결론이 어떻게 났든, 이 여정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던 작업이라 믿는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유는 투쟁 속에서 얻어져 왔다. 프랑스혁명, 노예 혁명과 같은 자유 혁명의 첫 시작은 항상, 내가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힘들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며,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를 것 같은 이 고민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어떤 결론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것을 마치든, 이런 고민은 분명 여러분을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유롭지 않은 걸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P.S.
* 이 글의 제목인 '자유의지가 없다'는 좀 더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기 위해 고른 단순하고 어쩌면 공격적인(?) 표현이다. 내 주장에 대한 오해를 줄이고자 다시 제목을 표현해 본다면 '현재 살아가고 있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으며, 여러 문화에 내포되어 있고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흔히 자유의지라고 하는 믿음은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일 것 같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유의지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한다. [6] 첫 번째,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원천은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결정론적 우주에 살고 있고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우리에게 이 두 가정은 참이 될 수 없다. 만약, 이 가정의 허점을 꿰뚫고 자유의지 자체를 새롭게 정의해 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견해이다. 개인적으로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은, 합의되지 않은 자유의지에 대한 정의들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우주관 사이의 싸움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한 합의가 어려운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정의와 우주관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인 것 같다. 새로운 정의와 우주관을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의견이 모두 통합될 수 있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 재미있는 것은 반대로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글의 메인 관점 중 하나는, 결정론적 우주에서도 한 개체가 자유의지를 느끼는 것은 가능하다이며, 이는 개체가 세상을 머릿속으로 어떻게 모형화하냐에 달렸다. 즉, 우리가 몸속 복잡한 요소를 무시하고 생명체 하나하나를 개체화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남은 문제가 있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통해 세상을 시뮬레이션하지만, 내 명령어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인가?
*** 마지막 문장에서 말하는 자유란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자유의지를 생각하는 과정은, 자유라는 단어가 가진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다.
[1] Milton, J. (2004). 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p. 8). Simmons.
[2] Fuentes, A. (2017). The creative spark: How imagination made humans exceptional. Penguin.
[3] Dennett, D. C. (2004). Freedom evolves. Penguin UK.
[4] Dawkins, R. (2016). The selfish gene. Oxford university press.
[5] 권수현. (2008).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대립 해소를 위한 방법론적 대안-데닛의 양립론을 중심으로. 철학 연구, 35, 41-71.
[6] Harris, S. (2012). Free will. Simon and Sch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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