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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무비 Nov 29. 2022

[영화쓰담] 11월 느린영화제 후기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 우리는 산으로 가야 해

  영화로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주고받는 공동체를 꿈꾸는 영화쓰담은 올해 느린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총 다섯 번의 상영회를 진행하였다. 당해 영화제 시즌이 끝나면 관객들과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단편 작품들을 1년 늦게나마 같이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전국에 있는 다양한 영화제뿐 아니라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단편 영화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공동체 상영이나 여러 가지 기획전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영화가 더 많은 공간에서 상영되고 감독과 관객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이에 영화쓰담에서는 느린영화제라는 이름 아래 작년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과의 뒤늦은 만남을 기획해보았다. 


  이번 달 느린영화제의 주제는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였다. 이유진 감독 연출의 <나들이>, 서지환 감독 연출의 <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 그리고 고경수 감독 연출의 <남남>을 상영작으로 선정하였다. 행사 당일에는 <남남>의 고경수 감독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각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으로 상영회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본 행사는 인디그라운드의 공동체 상영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작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상영작 중에서 다시 세 편을 선정하면서 “우리는 산으로 가야 해”라는 주제로 엮어보았다. 세 작품 속의 인물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비일상적인 행사를 치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것은 이혼한 전 남편의 장례식이기도 하고 ‘사냥’이라 불리는 서바이벌 게임이기도 하고, ‘시간을 갖자’는 핑계로 잠시 유보된 이별이기도 하다. 사실 매일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장례식은, 매일매일이 치열한 경쟁인 삶 속에서 서바이벌 게임은, 또 너무 쉽게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세상에서 이별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혼한 전 남편의 장례식장에 가려는 여성이 다른 여성 파트너와 오랫동안 동거하고 있는 장년 여성이라면 어떨까. 서바이벌 게임의 참가자가 같이 근무하는 동료 여직원을 좋아하는 여성이고, 이별하려는 커플이 군대에서 선후임으로 만난 남남 커플이라면? 이들에게는 애도의 공간도, 사랑의 공간도, 그리고 이별의 공간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들은 길을 벗어나 나들이를 가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사랑의 기억이 묻힌 산 정상을 오른다. 그야말로 산으로 가야하는 여정이지만, 그곳에서 이들은 마침내 불안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껏 사랑을 고백해도 된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며 먹먹하게 헤어질 결심을 해도 된다. 그곳에서 이들은 손자가 있는 할머니인 척, 사장을 두고 서로를 질투하는 라이벌인척, 군대 선후임인 척 할 필요 없이 그저 평범한 연인이어도 좋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경로를 이탈해 도착할 산이, 마음껏 애도하고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퀴어 커플에게 그런 공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자신들의 힘으로 그들만의 공간을 꾸려나가는 인물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세 작품을 고르고 함께 보게 되었다.


<나들이> (이유진, 2021)

호우주의보 rainydays pictures 제공
맨날 돌아가잖아 맨날 우리는 맨날 제때 가는 법이 없어 제때 그냥 편하게.

  <나들이>는 장년 레즈비언 커플인 여옥과 금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영화는 여옥의 전 남편 김철주가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와 함께 시작한다. 연인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들은 자꾸만 경로를 이탈한다. 이들은 기름값이 저렴(하고 한적)한 주유소에 들르기 위해 고속도로를 포기한다. 차선 변경에 실패해 우회하면서도 차를 세우고 강가에 앉아 "꼭 나들이 나온 것 같"은 기분을 내기도 한다. 이처럼 자꾸만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는 이들의 여정은 '결혼-출산-육아'라는 이성애 규범적 시간 밖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에 대한 비유에 다름 아니다. 

  반복되는 경로 이탈과 우회는 때로는 의도와 상관 없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여옥의 울분을 야기하기도 한다. 게다가 길을 돌아가는 중에 만나게 되는 낯선 인물들은 자신들을 문전박대한 고향을 상기시키며 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언제나 낯선 시선을 경계 해야 하는 레즈비언 커플은 차 안에서조차 마음껏 사랑할 수 없다. 주유소 직원이 괜한 질문을 하기 전에 기왕이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고 단속 경찰 앞에서는 손주들을 보러 가는 할머니인 척 연기를 해야 한다. 이들은 언제나 편한 길 대신 불안하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호우주의보 rainydays pictures 제공


꼭 나들이 나온 것 같다

  마침내 이들이 도착한 장례식장은 사실 추모와 애도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김씨 가문의 가부장 질서를 공고히하는 공간에 가깝다. 이곳에서는 정작 마지막까지 병수발을 든 철주의 두 번째 아내 미정보다 김씨 일가를 대표하는 동생 철환의 목소리가 더 크게 작동한다. 그는 애도할 수 있는 자격을 따지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여옥과 금자를 배척한다. 이들은 애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리마저 거절 당한다. 이때 오히려 미정이 여옥의 편을 들며 돕는다. 미정과 여옥은 한 남자의 전 부인과 현 부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을 잃고 공통의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로서 서로를 위로한다. 여옥은 병 간호로 지쳤을 미정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미정은 과거 여옥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을 대신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이처럼 여옥과 금자 그리고 미정은 규범적 관계를 이탈해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며 함께 길을 떠난다. 아주 작은 환대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한다. 이를 통해,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는 불안의 여정은 도리어 새로운 가능성으로 설레는 '나들이'가 된다. 


<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 (서지환, 2021)

필름다빈 film dabin 제공
날이 좋으니까 다들 에너지가 넘쳐 흐르나 보네 (...)
우리 에너지도 풀 겸 오랜만에 사냥이나 나갈까?

  숲으로 둘러싸인 대저택. 그곳에는 사장 부부와 세 명의 직원 하윤, 지영, 경천이 함께 지내고 있다.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다섯 남녀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이들은 곧 사장 기환의 제안에 따라 '사냥'이라고 불리는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양 팀이 모두 총을 들고 교전하는 일반적인 서바이벌 게임과 달리 이들의 '사냥'은 사냥꾼과 사냥감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다. 사냥감이 된 이들은 그저 도망칠 수 있을 뿐 그 어떤 방어 수단도 갖지 못한다. 사냥꾼의 공격 역시 일방적이다. 사냥꾼은 그들을 죽일지 살릴지 결정할 수 있는 생살여탈권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사장이 주도하는 '사냥' 게임은 그들의 권력 관계를 재확인하는 하나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장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고용한 직원에게 구애한다. (사실 또다른 남성 인물인 경천 역시 별다른 고민 없이 쉽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 사장은 그의 부인인 라희조차 자신이 언제든지 뽑아버릴 수 있는 '내성발톱'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며 큰소리를 치고 페인트총이 아닌 실총을 들고 하윤과 지영을 쫓으며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오히려 사장이야말로 넘치는 자신의 에너지와 힘을 참지 못하고 제맘대로 분출하는 들짐승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필름다빈 film dabin 제공


근데 나 죽이고 싶은 거 아니었어?


  사장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는 질서는 지영이 사냥꾼 손에 목숨을 맡긴 산토끼 역할을 거부하면서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지영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냥감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다. 하윤도, 라희도, 자기만의 무기를 들고 눈앞의 위협에 덤덤히 맞선다. 남자 사장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두 여직원 또는 사장의 총애를 받는 여직원과 이를 질투하는 사장 부인이라는 이성애 규범적 관계는 자신을 온전히 지켜야 하는 상황 앞에서 별다른 힘을 갖지 못한다. 

  이렇게 제목에서 모의되고 있는 대상인 'ㄴ'의 정체가 사장 기환인 것으로 밝혀짐과 동시에 하윤과 지영의 관계 역시 새롭게 재정립된다. 하윤은 조심스럽게 지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밝힌다. 깊은 숲속이라는 공간을 핑계로 너무도 쉽게 사랑을 내뱉던 남성 인물들과는 달리 하윤의 고백은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결국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생존 게임을 뒤로 하고 이들은 과감하게 길을 이탈한다. 그리고 마음껏 사랑을 속삭이고 입을 맞추어도 좋은 그들만의 장소를 발견한다. 


<남남> (고경수, 2021)

필름다빈 film dabin 제공
형은 어떻게 사람이 달라지질 않아요?

  민철은 현진과의 이별 장소로 산을 선택한다. 한여름에 산을 오르는 과정이 그러하듯 이들이 이별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민철은 그들이 주고 받은 사랑을 하나씩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요구에 따라 헬스장 이용권과 동화책, 기타와 가방은 다시 선물을 준 사람에게로 되돌아 간다. 이제 사랑의 기억은 마음을 짓누르는 짐이 되어 양편을 무겁게 오고간다. 

  그런데 등산 즉, 이별의 과정은 동시에 사랑의 흔적을 재발견하고 복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행군 때 군장을 대신 들어주었던 일이나 처음 관계를 가지고 장난처럼 군가를 부르던 일은 물건처럼 쉽게 반환되지 않는다. 산은 이별의 장소이기 이전에 연애의 기억이 곳곳에 묻혀 있는 사랑의 장소이다. 등산객이 많지 않은 한적한 산에서 이들은 마음껏 사랑을 속삭이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도 현진은 호기롭게 민철의 짐을 들어준다고 하다 쉽게 지쳤버렸을 것이고, 멋있는 걸 보여준다며 체조 링에 매달려 있다가 금방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천진난만하고 아이 같은 현진을 보며 민철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질 않"은 현진의 모습이 이제는 어딘가 무책임하고 철없고 무모하게 보인다. 현진을 사랑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민철은 더 이상 현진이 좋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군대에서 만난 특별한 연인은 서로 다른 게 너무 많은 '남남'이 되어 버린다. 


필름다빈 film dabin 제공
우리 사귀기로 한 날 부른 노래 한 번 해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끝까지 함께 정상에 오른 두 인물은 결국 서로를 떠나게 된다. 현진은 일방적으로 정리된 민철의 마음을 떠넘겨받은 채 정상에 남고 민철은 빈 몸으로 쓸쓸하게 하산한다. 그러나 곧 민철 역시 정해진 하산로를 이탈해 길을 잃는다. 해가 져 벌써 사위는 어스름한데 민철은 황망한 표정으로 무덤가에 서 있다. 사랑한 시간은 벌써 죽음에 닿았고 어떤 기억들은 영원히 땅속에 묻혔다. 민철은 죽은 기억의 무덤들 한 가운데 서서 기어코 찾아온 이별을 애도한다. 

  우리는 현진이 사귀기로 한 날 민철에게 불러준 노래가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이들이 어떻게 처음 관계를 맺게 됐으며 어쩌다 그날 <푸른 소나무>를 부르게 되었는지. 민철이 먼저 전역한 이후에 어떻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지켜나갔는지. 그간 어떤 연애를 했는지. 얼마나 만났는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민철의 여정을 따라가던 우리는 그렇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황망히 멈춰선다. 민철과 마찬가지로 끝내 평지에 가닿지 못한다. 이제 민철은 끝나버린 자신의 지난 연애를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죽은 사랑에 대한 괴로운 애도의 과정에서 누구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민철에게 이별 후 마음껏 아파할 수 있는 장소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로 하여금 경로를 이탈해 무덤가에 멈춰서게 만든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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