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시작하는 사람들
지난 3월 25일, 올해는 반드시 기록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되새기기 위해 게스트 포함 총 열네 명의 사람들이 쓰담에 모였다. 우리는 <성적표의 김민영>을 함께 보고,‘기록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성적표의 김민영>을 공동 연출한 이재은 감독은 평소에 기록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본인이 ‘기록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에 맞지 않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걱정을 내비쳤다. 주제를 미리 정해두고 토크를 요청한 상황이라 게스트로서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 역시 미안한 마음이 들던 차였다. 꼭 ‘기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편하게 나눠주길 청하며 부디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 걱정들이 무색하게 이재은 감독은 부러울 정도로 부지런히 기록하는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다. 목적지로 이동하는 중에 무심코 흘러가는 일상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일이 그의 습관인 듯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기록하는 일이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긴 나 역시 누군가 나를 ‘숨 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저보다 숨을 잘 쉬는 사람도 많을 텐데요…’하고 괜히 머쓱해질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성적표의 김민영> 속 정희 역시 참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을 실천한다. 삼행시클럽 회원답게 진지하게 삼행시를 짓고 김민영조차 잊어버린 ‘김민영이 쌓아올린 작은 공’을 목록화한다. 또, 친구로서의 김민영에 대한 성적표를 작성하고 민영의 이름을 빌린 <숲의 정령>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성적표의 김민영>을 세 번째 보는 것이었지만 이번에야 눈에 들어온 장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서울로 올라가는 정희의 백팩 바닥에 적힌 “유정희"라는 이름과 그의 전화번호 같은 것. 이런 걸 보면 정희는 마치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사람 같다. 민영이 인생의 다음 단계로 거침 없이 나아가는 동안 정희는 그가 두고 간 것들에게 마음을 쓴다. 정희는 ‘김민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실현되지 않은 과거를 남김 없이 담아 민영의 현재에 늘어놓는다. 정희는 둘의 역사에서 발생한 유물의 보존을 담당하는 아키비스트이자 김민영이라는 대상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연구자이다. 정희의 기록은 항상 다른 사람, 특히 민영을 향해 있다. 정희는 과거의 김민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존 가능한 기록으로 남기고, 분기점 위에 선 김민영의 현재를 평가한다. 그리고 숲의 정령의 비유를 통해 김민영의 오지 않은 미래를 전망한다.
반면, 민영이의 기록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줄 아는 정희와 달리 민영의 속내는 일기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편입에 성공하면 서울 집을 받기로 했다는 민영은 얼핏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예쁜 손녀딸인 듯 보이지만 정작 벽에 걸린 가족 사진 속 민영이의 자리는 없다. 테니스장 아르바이트만 합격해도 축하를 해주고 비스듬히 자라는 아이의 속도를 존중해주는 정희의 집과 달리 민영의 집은 자꾸만 발전을 재촉한다. 민영이는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라고 읊조리는 민영의 말은 삼행시 클럽의 해체 선언이자 동시에 인생의 한 순간을 미련없이 과거로 남겨둘 준비가 됐다는 결의이다. 그런 민영이가 마음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장소는 오로지 그의 일기장뿐이다. 정희는 의도치 않게 그런 민영의 동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정희는 민영이라는 대상에 가졌던 애정을 오롯이 담아 그와의 시간을 갈무리한다. 김민영 평론에 가까운 김민영의 성적표에는 정희만이 독해할 수 있는 수많은 각주가 숨겨져 있다. 언젠가는 아슬아슬 겹쳐진 둘의 시간이 완전히 떨어져버리고, 민영은 정희의 그림처럼 깊은 산속에서 오지 않는 미래를 기다리며 약초를 캐는 숲속의 정령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정희만큼 민영이를 애정하고 독해할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 말해주고 싶다.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누군가 테니스장 관리실 장면에서 보이는 작은 모니터에서는 무슨 방송이 나오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감독님은 영화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들어간 장면이라고 덧붙이며 해당 영상이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한 장면(작중에서 정희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제주공항 안에서 제주도 구경하고 온 꼴찌족’ 에피소드)임을 밝혔다. MZ세대의 지금을 담고 있는 듯하면서도 90년대생들에게 내 것 같은 아련한 향수를 가져다주는 이유가 바로 이런 디테일 때문이 아닐까. 보편적인 청춘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연출자들의 소중한 시절을 꼼꼼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그러므로 사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감히 말해본다). 우리들의 한 시절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누군가의 기록 속에 남는다.
상영회 이후 2주만에 다시 만난 소수의 인원은 을지로의 작은 공간에 모여 못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충분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서인지 ‘정희인 줄 알았던 내가 알고보니 민영이?!’ 류의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재은 감독의 말마따나 민영이도 누군가에게는 정희였고, 정희도 누군가에겐 민영이었을 것이다. 각자 지나간 인연들이 떠올라서인지 몇 번이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아직 찬 바람이 얇은 유리문을 흔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겨우내 이 작은 공간을 덥혔을 히터는 벌써 찬장 위로 올라가 있는데 막 4월이 된 초봄의 밤은 아직 시렸다. 우리는 밤이 더 깊기 전에 모임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모임을 마치기 30분 전, 우리는 각자 짧은 글을 짓고 그 중 나누고 싶은 것을 공유했다. 다섯 중 둘은 장차 쓰게 될 글을 예고했고, 셋은 삼행시를 짓고 낭독했다. 삼행시라는 건 (<성적표의 김민영>을 볼 때도 느꼈지만) 내가 쓰기는 수치스러워도 남이 쓴 걸 듣기에는 참 좋은 작업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성적표의 김민영>을 대상으로 했던 두 번의 모임이 모두 끝이 났다. 우리는 바야흐로 ‘기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올해가 끝나면 우리는 스스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될까? 아니면 기록하는 일쯤이야 숨 쉬듯 당연한 일이 되어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말조차 거추장스러워질까? 어떠한 방식이든, 기록으로 조금은 달라질 우리의 모습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