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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May 11. 2024

금요일 조퇴 작전


4월의 어느날이었다. 피어나는 어린잎들을 보면 내 손가락 마디 마디에도 뭐하나 돋아날 것만 같은 때였다. 간질거리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와 금토일 기차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주말 내내 밖에 있기로 하는 건 나 같은 내향형 인간이 자주 하는 결심이 아니었다.


 아직 다음 주의 학부모 공개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기차에는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금요일 조퇴를 사수하기 위해 수요일, 목요일 이틀 야근을 했다. 머리도 손도 느린 나는 금요일 오후 근무의 공백을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있었다.


​​


아이들 하교시키고 바로 서울역으로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목요일 밤에 미리 가방을 쌌다. 금요일 아침 묵직한 배낭을 메고 교문을 통과했는데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그런데 아침부터 진서가 어지럽다고 하더니 2교시 국어 수업 시간 중간에 책상 위에 토를 해버리고 말았다. 4학년씩이나 되어 친구들이 자기가 토한 걸 구경하는게 얼마나 창피할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서는 주변 눈치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국어책을 소리 내어 읽는 사이를 틈타 조용히 움직였다. 나도 처음 맞는 상황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휴지로 조용히 묽은 토사물을 닦아냈다.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이 누군가의 오바이트를 대신 치울 일이 얼마나 있을까? 스무 살 때 신촌의 어느 갈빗집 앞에서 못 이기는 술을 마시고 쏟아낸 친구의 흔적을 치웠던 기억이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난 이 구역의 선생이 아닌가? “여기 책임자 나와!”라고 하면 나서야 하는 사람이 나였다.


소문으로 1학년 아이들은 교실에 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맛보기인 걸까? 애가 쉬를 싸면 그건 뭘로 치워야 냄새까지 박멸하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검은 봉지에 휴지를 모아 담았다.


  그 난리를 치고도 점심시간은 곧 찾아왔다. 나는 생각보다 비위가 좋았다. 급식으로 나온 탕수육 튀김옷이 따끈따끈했다. 짜장면도 입에 다 묻히고 맛있게 먹었다.


  밥 먹고 나서 과학시간에는 화분에 강낭콩 씨앗을 심었다. 흙에 강낭콩 심고 물 주는 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지 몰랐다. 흙이 들어있는 비닐을 뜯다가 내용물이 사방으로 흩어진 아이도 있었고, 친구가 내 화분을 발로 걷어차고 갔다며 싸움도 났다. 화분 주인은 씩씩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실수한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기차를 제 시간에 타지 못할 것 같은 싸한 예감이 들었다. 얼른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둘을 화해시켜서 집에 보내야 했다.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 설명을 듣고 시시비비를 가려야했다.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켜야 하며, 형식적으로라도 서로 사과하는 과정을 만들어내야 했다.



  결국 오랜만에 꿈꿔본 금요일 칼 조퇴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 기차로 시간을 미뤘고 친구는 역주변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


엄청난 짜증이나 화가 밀려오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번 겪어본 일이었다. 다만 친구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한숨 가다듬고 속도를 내어 교실을 정리하고 나왔다. 짜증으로 덮어버리기엔 금요일 오후 시간은 내게 너무 귀했다. 퇴근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몸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그래도 기차 시간에 맞춰 역에 도착할 때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 날 따라 유난히 예쁜 노을을 바라보며 멍때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버스에선 배철수 아저씨의 음악캠프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와 잠시나마 분주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좋아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니 그제서야 마음까지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나 말고도 금요일 저녁 기차를 타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이 사람들에게 얕은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중간에 얼른 편의점에 들러 친구가 좋아하는 바나나킥 과자를 사서 나왔다. 이거라도 먼저 내밀어야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발을 3분 앞두고 헐떡거리며 기차칸에 올랐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친구도 내가 옆자리에 앉고 나서야 편하게 배낭끈을 벗었다. 얼른 바나나킥 과자부터 내밀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행히 같이 뛰어오던 동지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사히 올라탄 듯했다.​


'다들 금요일 퇴근하고 기차역 달려온다고 고생했어요. 일단 잘 놀다 옵시다. 주말에 날씨도 쨍쨍하다고 하네요. 실컷 걷고 예쁜 사진도 남기고 그럽시다. 일요일 밤에 돌아오기 싫은 건 그때 생각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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