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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티 Jul 29. 2024

글쓰기도 방학할게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맞는데요' 휴재를 하려고 합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쉬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쓸 말이 별로 없어서에요. 애매하게 44화로(밀리로드 기준) 마무리하는 것 보시면 얼마나 쓸 말이 없는지 아시겠죠? 최근에 자꾸 글감을 적다 보면 다 언젠가 했던 말들인 것 같은 거예요. 지난 몇 주는 더 이상 누룽지가 나오지 않는 솥을 박박 긁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요새는 길게 풀어낼 큰 고민이 없어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일을 시작하고 2년 동안 묵혀두었던 이야기보따리가 많았고, 서이초 사건의 여파로 생각도 많았던 때였어요. 지금도 하루살이, 한 해 살이로 지내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작년만큼 깊은 생각으로는 빠지지 않아요. 그저 하루를, 한 주를, 일 년을 무사히 가볍고 즐겁게 지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년 10월부터 10달동안 매주 한 편씩 쓴 마흔네 편(밀리 로드 기준)의 글들을 천천히 읽어봤어요. 어제 쓴 것처럼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글도 있고, 내가 이런 걸 썼었나 싶은 낯선 글도 있어요. 어쨌든 저 쨌든 매주 한 편씩 미루지 않고 꾸준히 썼다는 뿌듯함은 확실히 있네요. 몇 편의 글에 대한 뒷이야기를 짧게 남겨보면 이렇습니다.

 2화 <알아도 쓸모없는 다정한 질문>의 영준이는 지금도 놀러 오면 제 안부부터 다정하게 묻습니다. '선생님 요즘은 속 썩이는 애들 없어요? 요즘엔 뭐에 관심 있어요? 4학년 애들이랑은 적응 잘 되세요?'. 영준이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와 다정함은 더 짙어졌어요.

 7화 <내로남불>에서 쉬는 시간 아이들 몰래 간식 먹기의 어려움을 토로했었는데 지금은 연구실 의자에 앉아 편하게 먹습니다. 아이들도 교실에서 간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거든요. 급식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으면 받을 수 있는 급식 코인을 알뜰하게 모아 초코파이도, 젤리도, 쌀과자도 사먹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는 간식 먹을 때 덜 미안하답니다.

  10화 <바늘 사용법>의 소심쟁이 율이는 중학교 교복에 똑단발을 하고 놀러 왔어요. 고맙게도 얼마 전 제 생일을 기억하고 조각 케이크 하나를 들고 왔더라고요. 중학교 가서는 친구도 사귀고 적응 잘 하고 있으려나 가끔 걱정이 됐는데 표정이 꽤 편해 보여서 마음이 푹 놓였어요. 아직 같이 탕후루를 사 먹지는 못해서 9월에 율이 생일 때 같이 갈까 합니다.

  11화 <학교 앞에 산다는 것>에서는 학교 바로 앞에 살아서 편의점 맥주 한 캔 사 먹기도 신경 쓰인다고 했었죠. 뚜벅이라서 생활 반경이 워낙 좁았었는데 3월에 아버지의 중고차를 물려받게 됐어요. 쏘리 질러! 부릉부릉 차 타고 조금 먼 동네로 운동도 다니고 마트도 다니면서 인생 최대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밤에 음악 크게 틀고 드라이브하는 때면 노래방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13화 <6학년 담임이란>을 적으며 제가 6학년이랑 궁합이 맞는 것 같다며 또 해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6교시가 1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4학년 담임의 단맛을 알아버렸어요. 1년이 꽉 차게 힘든 6학년 담임을 다시 도전할 엄두가 지금은 안 나네요.

 33화 <투명 망토의 요정>에서는 3년 차의 권태기에 대한 불안감을 얘기했었어요. 학기 초에 두 달 정도를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출근했어요. 수업 준비도 최소한으로 하고 아이들에게 크게 정을 주지도 않았죠. 물에 동동 떠있는 것처럼 지냈어요. 힘 빼고 기다리다가 서서히 떠올라 지금은 슬슬 헤엄치고 싶은 에너지가 생겼어요. 전력 질주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애쓰지 말고 딱 내가 즐거울 수 있는 만큼만 허우적대보려고 합니다.

  44편의 글을 쭉 다시 읽다보니 이틀이 지나버렸어요. 그리고 오늘은 여름방학 첫날이에요. 이번 방학은 연수를 들으며 보내야 하지만 그래도 좋네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글쓰기도 방학이라니 뭔가 아쉬우면서 신나요(신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다음엔 긴 글 대신 그림 비슷한 걸 그려볼까 싶어요.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하며 여름 더위를 이겨내 보려고요. 과일은 갈아먹지 말고 그대로 먹는 게 제일 영양가도 좋고 맛있잖아요. 복숭아는 주스나 절임보다는 깎아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지도록 깨물어 먹는 게 가장 맛있으니까. 아이들과의 예쁜 찰나의 순간들에 긴 말을 더하지 않고 그림으로 옮겨보고 싶어요. 그림엔 잼병이라 오래 걸리겠지만 즐겁게 연습해볼게요.

연말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하는 배우들의 마음을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는 또 해야겠어요.

Special Thanks to...

항상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고, 교사로서의 고민도 공감해 준, 마감 자꾸 늦어서 민폐 끼치는 저를 용서하시어 끝까지 함께 달려와 준 파트너 그림작가 멱꾹님,

인스타그램 홍보도 제안해 주고 모두가 좋아요만 누를 때 무려 댓글도 달아주며 꾸준한 지원군이 되어준 홍샘,

글쓰기 처음 시작할 때 애정 넘치는 응원으로 어깨 뽕을 넣어준 율샘,

연재 요일 챙겨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꾸준한 독자가 되어준 든든한 덕이,

애정어린 응원과 조언 주신 동료 작가 영글음 작가님과 천재 작가님,

무려 구독까지 해서 챙겨봐주신 얼굴 모를 구독자님들, 첫 글부터 응원해 주신 초등학생 히로 쁘띠님,

친구 취미일 뿐인데 강제 독자가 되어 글의 편집자와 독자로 나서준 여러 친구들과 엄마,

밀리로드에만 적다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때 근사한 브런치를 사주며 응원해 준 동생,

모두 모두 고마워요~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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