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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Aug 19. 2022

쓸모없(어 보이)는 일로 기여하기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이것으로 여섯 권째 읽은 한병철 교수의 저서다. 저자와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이 시대가 나타낸 현상을 쪼개고 쪼개 낱낱이 꿰뚫어 보는 그의 능력에 매번 감탄한다. 얼마나 읽고 쓰고 사유해야 가능한 일일까. 그 정도를 고민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인사이트가 부러워질 때면 나는 또다시 그 '얼마나'가 얼마나인지 함부로 가늠하곤 한다.


《리추얼의 종말》은 번아웃을 겪는 나에 대한 처방전을 읽는 듯했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나를 낫게 할 방법을 기록해놨을 것이란 기대감이 올라와 서점에서 구입한 당일 단숨에 완독했다. 요컨대 저자가 내린 솔루션은 '리추얼을 실행할 수 있는 공동체를 모색할 것'이었다. 여기서 리추얼이란 생산, 소비, 노동에 반대되는 것으로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다른 저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병철 교수가 일관되게 경고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의식 과잉'이다. 요즘 만연한 우울증, 번아웃 같은 질환도 결국 과도하게 자신에게 몰입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개인의 탓이라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은 신자유주의 아래서 노동을 통한 생산을 반복하도록 설계되고, 이는 끊임없는 소비와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을 요구한다. (한병철 교수는 이를 '강제한다'고까지 썼다.) 갈수록 개인화되는 인간은 에고가 지나치게 강해져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결국은 우울증을 앓게 된다고.


그러나 '리추얼'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팽창한 에고의 크기를 줄이고, 행복의 기준을 바꿔낼 수 있다. 리추얼을 실행하면 소망을 충족하는 게 행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리추얼 자체를 달성하는 것이 행복으로 된다. 단 중요한 점은 리추얼이 개인의 노동, 생산, 소비 등을 하기 위한 수단이 돼서는 성립할 수 없으며, 공동체가 목적이 돼야 한다는 것. 자신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일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 오히려 참신했다. 유튜브 알고리즘부터 웹페이지 배너 광고 하나를 봐도 요즘 모든 생활의 초점은 '개인'에 있는 듯하니 말이다.


결국 다음 3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리추얼을 확립한다면 현재 나의 상태를 치료할 수 있다. 첫째는 본업, 소비 활동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찾는 것, 둘째는 그 일을 통해 기여할 수 있는 집단을 정할 것, 셋째는 그 집단이 외부인을 배제하거나 파괴하는 불건전한 집단이 아닐 것이다. 언제나 계획은 쉽고, 행동이 어렵다. 따라서 매번 극적인 변화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자가 치료를 시작해야겠다. 《리추얼의 종말》이 첫 번째 도미노 피스가 돼서 그다음, 그다음 피스를 넘어뜨리고, 지금 나를 누르는 거대한 무기력 마저 쓰러뜨려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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