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부턴가 김훈 작가의 문장을 닮고 싶어 했다. 필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만을 군더더기 없는 단어로 조합해 전하는 것. 나아가 대체로 감정보다 상황, 행동을 설명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춤에도 오히려 독자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는 "내가 쓴 문장이 뼈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본인의 소망을 실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가가 쓴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라니, 신간 소식을 듣자마자 강하게 이끌려 《하얼빈》을 구입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이토 암살'이라는 대의를 정한 뒤 오직 이에 따라 행동하고, 준비하고, 관계를 맺고, 옮겨 다녔다. 혈육, 의병, 천주교단, 일제 등 그와 관련된 모든 세계는 그를 가두거나 제어할 수 없었다. 이를 두고 '강한 의지'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작품 속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나약함과 싸워 이기는 경지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숨을 쉬듯, 안중근 의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얼빈으로 향했다. 그렇게 만 30세의 나이에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또한 생을 마감했다.
작품에서 안중근 의사의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저격을 연습하는 장면에서는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라고 썼는가 하면, 거사 하루 전, 처자식의 거취를 묻는 우덕순(거사에 함께한 의병 동료)의 질문에 대해서는 "내 처자식들은 처한 형편 속에서 살게 된다. 어렵지만,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독자인 나로서는 이러한 감정의 공백을 어디까지나 나의 좁은 그릇을 바탕으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었고, 한 장 한 장 넘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력 또한 드러나지 않은 주인공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목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졌다.
시공을 초월해 부당함을 지적하는 태도는 늘 존재한다. 그중 어떤 태도는 단순한 돌발행동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어떤 태도는 권력에 눌린 도전으로 끝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태도는 그다음, 그다음 뒤를 잇는 지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그 비결이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한 '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정도란 행동을 덧대 두텁게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깊어진 확신은 '전달력'이라는 속성이 생긴다. 《하얼빈》 속 안중근 의사의 모든 말과 행동은 확신을 키우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 후에도 친족과 동포뿐 아니라 타국에까지 전해져 항일운동의 방향성이 됐다.
나는 부당함에 맞서 강하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인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