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를 보는 또다른 방법
추상화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은 흔히 멈칫한다. 익숙한 사물의 형상이 사라지고 화면을 채운 것은 알 수 없는 선과 색뿐일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이건 낙서 아닌가?”다. 그러나 추상은 설명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 감각을 통과하라고 강요한다. 낯섦 앞에서 불편을 견디지 못하는 쪽은 작품이 아니라 관객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화가 노천웅의 그림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그는 자연을 그리지만 단순한 풍경화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산과 물은 풍경의 모양을 빌린 정서의 기호다. 능선은 고독을, 물결은 세련됨과 삶의 흔적을 암시한다. 겉으로는 자연이지만, 사실은 내면의 풍경이다. 모네가 빛의 파편으로 순간을 붙잡았듯, 노천웅은 전통의 질감을 빌려 현재의 감각을 고정한다. 로스코가 거대한 색면 속에서 상실을 불러내듯, 노천웅은 한국적 풍경을 통해 감정의 좌표를 건넨다.
그의 힘은 전통을 파괴하지 않고 현대적으로 변용하는 데 있다. 많은 이들이 전통을 창작의 짐으로 여길 때, 그는 그것을 발판 삼아 전진한다. 낡음을 보존하지도, 완전히 무너뜨리지도 않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 위에 선다. 산수화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색과 질감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 균형이 노천웅을 독창적으로 만든다.
현대 추상작가들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구상적 규칙을 과감히 해체하고, 색과 선의 충돌 그 자체를 감정의 언어로 삼는다. 로스코의 색면이 관객을 침묵 속에 가라앉힌다면, 폴록의 드리핑은 혼돈의 리듬으로 감각을 흔든다. 추상은 설명 불가능성에서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작품 앞에서 “난해하다”만 되뇌는 것은 작품의 탓이 아니다.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쪽은 관객이다. 예술은 늘 불친절하다. 하지만 그 불친절은 방치가 아니라 초대다.
노천웅과 추상작가들의 차이는 기법이 아니라 태도다. 노천웅은 전통을 지켜내며 현대적 감각을 덧입히고, 추상은 전통을 무너뜨려 감정의 자유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결국 두 흐름 모두 관객의 내면을 향한다. 풍경이든 색면이든, 목적은 같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고 삶의 복잡성을 건드리는 것.
이렇듯 서로 다른 길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예술은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석할 수 없는 자리에서 더 깊은 감정이 태어난다. 노천웅의 푸른 산을 보며 고향을 떠올리고, 추상의 여백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일. 모두 진실하다.
예술은 늘 관객에게 묻는다. 그림의 의미가 아니라, 그림 앞에 선 ‘나’의 모습에 대해. 추상은 낯섦 속으로의 초대이고, 노천웅은 전통과 현대의 교차로로의 초대다. 관객은 그 사이에서 불편과 울림을 동시에 겪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단순한 결론이다. 설명할 수 없음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진실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