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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기면 반드시 누군가는 지게 되는 걸까?

— 확신의 시대를 지나, 여백의 시대의 그림 앞에서

by Purity and humility

대학 시절 교양과목 ‘동양미술의 이해’에서 처음 배운 개념이 여백이었다. 비워둔 곳이 빈칸이 아니라 숨이 드나드는 자리라는 설명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붓이 멈춘 지점에서 화면의 호흡이 시작되고, 멈춤이 있어야 다음 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말도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림을 볼 때 무엇을 더 그렸는지보다 어디서 멈췄는지를 먼저 찾게 되었다. 여백은 포기가 아니라 타인을 맞아들이는 준비라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562341102_25349623084663542_2500721571514705820_n.jpg <깨어나는 도시> 보치오니

그 시선으로 다시 본 보치오니의 ‘깨어나는 도시’는 다른 그림이 되었다. 처음에는 근대가 내뿜는 힘과 낙관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화면은 빛과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과 말, 기계의 움직임이 서로를 밀어냈다. 에너지는 넘쳤지만 숨을 고를 틈이 보이지 않았다. 변월룡의 ‘노동영웅 어부 부인’을 마주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 일었다. 믿음과 책임,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정면으로 드러났지만, 그 믿음이 너무 완전할수록 다른 표정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모두가 한 화면을 끝까지 채우려 할 때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조용히 일러주었다.

559363783_25349624144663436_4960436530042785220_n.jpg 변월룡의 <노동영웅 어부 부인>


정치와 경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 미국은 관세와 규제로 자국 산업의 색을 짙게 칠하고, 중국은 내수와 자급의 선을 굵게 긋는다. 공급망은 재배치되고, 서로의 시장은 더 까다로워졌다. 한쪽 색이 강해질수록 다른 색이 밀려나는 구조가 생긴다. 케인즈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했고, 슘페터는 낡은 틀을 깨는 변화의 필요를 강조했다. 그람시는 힘이 서사를 통해 일상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한 가지를 가리킨다. 모든 것을 내 방식으로 채우려 하기보다, 변화를 받아들일 틈과 대화의 자리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이 설 자리는 바로 그 여백에 가깝다. 수출과 기술 협력이 미국과 중국 두 축에 깊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에서 어느 한쪽만 바라보면 다른 한쪽의 색이 금세 바래진다. 그래서 산업은 한 나라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공급선을 나누어야 한다. 표준과 기술도 한 가지 선택지로 묶지 말고 서로 호환되는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 외교는 경쟁의 말투로만 말하지 말고, 협력의 문장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기업의 재고와 정부의 비상 자금 같은 완충 장치도 여백의 일부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아도 충격이 왔을 때 화면을 지켜주는 보조선이 된다.



여백을 배운 뒤로 나는 그림을 볼 때처럼 세계를 보려 한다. 크게 칠할 때도 필요하지만, 멈출 때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멈춤이 있어야 다음 선이 단정해지고, 남겨둔 자리에서 다른 색이 스며든다. 보치오니의 확신과 변월룡의 낙관은 지금 내게 한 문장으로 들린다. 나의 색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보다, 함께 그릴 수 있는 자리를 남겨둘 것. 그 자리가 넓을수록 우리는 숨을 고를 수 있고, 숨이 고르면 다음 장면을 차분히 그려낼 수 있다. 한국의 선택도 그 자리를 키우는 일에서 시작된다. 색을 덜어내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는 일, 그때 비로소 화면은 무너지지 않고 더 멀리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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