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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고 끊어질 것 같은 마음을 견딜 수 있을까?

– 세대의 마음을 잇는 보이지 않는 경첩

by Purity and humility

살다 보면 마음이 한없이 밀려날 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감정이 갑자기 밀려올 때가 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도 어려운 순간이 있다. 그런 밤이면 넷플릭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속 한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퇴직 후 결국 주저앉은 김 부장을 그의 아내가 말을 건네지도 않고 조용히 끌어안아주던 순간이다. 위로가 말이 아니라 몸짓으로 흘러가는 그 장면은 오래된 마음의 결을 건드렸고, 내가 걸어온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김부장 명세빈.jpeg <서울에 자가를 갖고 있는 대기업 김 부장 이야기의 한 장명>


가족은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곳이다. 보웬이 설명한 가족체계이론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충격을 흡수하고, 또 누군가는 뒤늦게 균형을 배워가며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 왔다. 말로 정해진 역할이 아니라 세월이 만들어낸 결에 따라 저마다의 위치가 생긴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집을 지탱했고,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간격을 조율하며 긴장을 덜어냈다. 나도 그 틈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아 살아왔고, 이제는 그 자리에서 아이를 바라보게 되었다.


세대가 이어지는 방식은 부르디외가 말했던 자본의 흐름과 닮아 있다. 삶의 태도와 선택의 기준, 실패를 다루는 방식 같은 것들이 말없이 전해져 다음 세대의 방향을 만든다. 아버지가 열어주었던 문이 있었고, 나는 그 문을 지나 지금의 자리에 왔다. 이제는 그 문을 이어서 열어야 하는 자리에 서 있다. 어떤 문턱을 낮추고 어떤 문을 함께 닫아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내가 어린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마음이 조금씩 형태를 드러낸다.


3.jpeg <퇴사한 김 부장을 안아주는 아내>



관계를 지탱하는 힘은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감각과 가깝다. 큰 말보다 작은 일상의 반복이 더 오래 남는다. 식탁 위에서 김이 피어오르던 순간, 늦은 밤에도 전화를 받아주던 사람의 존재, 서로의 피로를 말없이 읽어내던 집안의 공기 같은 것들. 설명되지 않는 풍경이 관계를 붙잡고 세대를 연결한다. 생활이 끊기지 않는 한 마음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2.jpeg <희망퇴직한 김 부장을 안아주는 아내>


우리는 결국 반복되는 작은 일상 속에서 서로를 붙들며 여기까지 왔다.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날이면 오래전 누군가가 살며시 문을 받아주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기억 하나가 다시 하루를 견디게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문과 문을 이어주는 작은 경첩이 자주 떠오른다. 소리 없이 닳아가며 문을 지탱하는 그 구조물이 있어야 문은 움직인다. 관계도 그렇다. 화려한 대화나 선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리의 마음들이 경첩처럼 세대를 붙들고 왔다. 한쪽이 기울어지면 다른 쪽이 조금 더 힘을 주고, 그렇게 균형을 되찾으며 문은 다시 열리고 닫힌다.


살다 보면 마음이 벼랑 끝에 설 때가 있다.

그런 날에도 문은 아주 느리게나마 열린다.

누가 억지로 밀어준 것이 아니라, 이어져야 할 마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을 버티게 하는 건 결국 말이 아니라 오래 기다려준 마음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문이 흔들릴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문과 문을 이어주는 작은 경첩. 소리 없이 버티고, 삐걱거리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그 금속의 조용한 인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견뎌온 모든 순간은 결국 그 경첩이 되어 서로를 붙들어준 시간들이었다.

흔들리는 날에도 문이 다시 열리는 이유는, 경첩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대신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삶을 다시 붙들게 만든다. 세 대를 건너온 마음들이 나를 지나 아이에게 향해 간다는 생각이, 내 어깨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문밖의 어둠은 여전하지만, 문을 지탱하는 마음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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