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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키 Oct 27. 2023

학생도 피곤합니다.

출근길에 마주친 학생들을 보며 쓰는 글.

어디서 들은 말인지 누구에게 들은 말인지 정확히 기억도 안 나는데 쓸데없이 오래 기억에 남은 말들이 있다.


- 젊은것들이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아마도 학창 시절 공부하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학생들을 나무라는 선생님의 핀잔으로 들었거나, 아르바이트 하며 마주친 어른들에게 들은 소리였겠지.

왜 이 말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는지는 까닭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해가 안 되서였을까.

10대, 20대 느꼈던 피로감은 정말 피곤하다고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을까? 철도 씹어 먹을 나이라는데 정말 그게 내 최상의 컨디션이었을까? 알바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기절하듯 곯아떨어지던 내가 피곤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남은 생은 얼마나 피곤할 예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느덧 월급쟁이 10년 차를 바라보는 나이. 외근으로 집에서 좀 먼 곳으로 며칠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해뜨기 전에 집을 나와 버스를 타며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볼 기회가 생겼다.


재택 근무를 할 때는 9시까지 푹 자다가 아침 미팅 전에 겨우 일어나다가 외근 때문에 한 이 주간을 집에서 7시에 나와 지하철과 버스 두 번을 갈아타 출근을 했는데 정말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아침마마 누군가 흙이라도 불어넣은 것 마냥 눈이 따갑고 뻑뻑했다. 아직 캄캄해서 밤인지 아침인지 구분도 안되는 풍경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그런데 출근하면서 더 놀란 건 그렇게 일찍(내 나름)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철에 자리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역버스로 갈아타는 정거장엔 끝이 어딘지 모를 줄이 길게 늘어져 버스가 한대 더 온다고 해도 과연 탈 수 있을까 싶었다. 이 광역 버스는 지역에서 제일 큰 국립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였는데 그걸 알고 나니 비로소 어둠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학생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건 나 혼자, 대부분 후드티나 학교 잠바를 입고 있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오르니 앉을 곳은 커녕 서서 잡을 손잡이도 경쟁이 치열했다.


버스에 올라 혹시 먼저 내릴만한 사람이 있나 싶어 두리번 거리다 본 풍경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운 좋게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시험이라도 있는 건지 허겁지겁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코를 박고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멀미도 안나는지, 화면 가까이 코를 박고 한 글자라도 더 보려고 집중학는 모습이 짠했다. 대학교까지는 광역버스를 타고도 40분은 가야 하는데 이 학생들은 매일 이렇게 수업을 들으러 가는 걸까.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침에 탔던 버스를 반대방향에서 탔다. 때마침 하교 시간이라 버스는 이번에도 만석이었다. 버스 승차 후 카드를 찍고 몸을 돌리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침보다 더 안타까웠다.

좌석에 앉은 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꺾고 잠들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곯아 떨어져서 금방이라도 버스 바닥으로 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서있는 학생들은 손잡이 폴대를 벽 삼아 몸을 기댄채 졸고 있었다. 어디 다 같이 가서 육체노동이라도 하다 왔나 했다. 처음부터 바닥에 있었는지 무릎에 있다 떨어졌는지 모를 가방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았옸다. 이렇게 흔들리는 버스에서 저렇게 깊이 잘 수 있다니..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 싶어 마음이 안쓰러웠다.


물론 피곤한 거라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지난달부터 갑자기 바빠져 주말도 반납하며 일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짧은 해외 출장도 있어서 낮에 일을 끝낸 후 밤 비행기를 탔다. 돌아와서도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일했는데 내일 이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다른 팀원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한다. 몸은 하난데 여기저기서 빨리 해달라며 새로운 일을 던져준다. 마음 같아선 소리 지르고 뛰쳐나간 뒤 폰을 꺼두고 싶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잠을 5시간 이상 잔 적이 언제였나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래도 학생일 때가 좋았지. 그때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매일 밤새 술마시고 놀았다‘는 꼰대의 라인을 읊고 싶지는 않다. 누가 누가 더 피곤하게 사나 겨루는 올림픽에 나간 것도 아닌데 나는 피곤하고 니가 겪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따위의 우월감이 무슨 도움이 될까.

내겐 너무나 힘들고 막막하던 20대 시절은 그때가 젤 좋은 때라고 말하는 이들로 강제로 미화되곤 했다.


지금의 나는 피곤할지언정 막막하진 않다. 내가 선택한 일을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됐다. 숱한 밤을 눈뜨고 새운 20대가 있었기에 얻은 선물이다.

누군가 내게 20살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묻는다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No’라고 답할 것이다. 그 기나긴 터널에 갇힌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넘치는 체력을 다 깎아 먹고도 부족해 영혼마저 깎아 먹은 불난과 싸우던 날들이 난 그립지 않다.


그래서 버스에서 잠든 학생들을 보는데 짠한 마음이 들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로 - 시험에 인턴쉽에 봉사활동, 아르바이트까지. 공부도 해야 하고 사회경험도 쌓아야 하고 그 와중에 마음을 나눌 친구도 찾아야 한다. 많은 것들을 하고 또 해냈지만,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찜찜한 불안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물론 버스에서 마주친 학생들이 불안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지나간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올라 괜히 센티해졌자.


내가 대학생일 땐 요즘 것들은 힘든 건 안 하려고 한다는 둥, 끈기가 없고 눈만 높아서 중소기업은 안가려고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대기업에서 현금을 뿌리면서 제발 와달라고 하던 시절에 취업한 중년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단전 깊은곳에서 분노가 올라왔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내가 겪은 시대보다 훨씬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미디어를 보면 요즘 MZ 세대는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이기적이고 책임감도 없는 철부지 취급을 한다. 하지만 나이차이 많이 나는 동생을 통해 들은바로는 주변에 대학 졸업 후 1-2년을 노력해도 제대로 된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고생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채를 넣을 데가 없으니 다 자동으로 백수가 된다고. 경제가 어려워지니 너도나도 한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치열하다고 한다.

내가 대학을 떠난 지는 10년이 넘어가는데 사회 초년생 연봉은 정말 놀랍게도 그대로다. 더 적은 곳도 꽤 많다. 물가는 내 주변만 오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소수의 만행으로 그 세대 전체를 철부지로 취급하기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학생들도 피곤하다. 몹시.


괜히 옛날 생각이 나서 대변인을 자청하며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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