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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키 Jan 10. 2022

크리스마스 트리가 필요한 이유

카운슬러 릴리가 내 준 2021년 마지막 숙제

 12월이 되면 내가 있는 캐나다는 작정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치장한다. 살면서 '난 크리스마스를 너무 좋아해!'라는 말을 캐나다에 와서 처음 들었다. 내게 크리스마스는 다른 공휴일들처럼 그저 회사를 가지 않아서 좋은 날인데 누군가에게는 몇 달 동안 손꼽아 기다렸던 휴일이라니. 이해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선물 교환을 하자며 들뜬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았다. 원래 저렇게 해야 하는 걸까? 혹은 저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들뜬 사람들의 모습과 지나치게 냉소적인 내 태도 사이에서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 알아내려고 애쓰면서.


 상담 시간에 이 얘기를 하면서 살면서 한 번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민 적이 없어서 이런 분위기가 좀 낯설다고 했더니 카운슬러 릴리는 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는 명절로 여기지 않는 한국과 캐나다의 문화적 차이를 차치하더라도, 나는 유독 이런 휴일을 축하하지 않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고 답했다.

어릴 때는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성인이 된 후로도 홀리데이 충분히 즐기지 않았느냐고 릴리가 되물었다. 왜 캐나다에 온 지 3년이나 됐는데도 트리를 만들지 않았냐는 말에 평소 하던 생각들로 답했다.

지금 사는 집이 우리 집도 아니고 언제 어떤 상황이 생겨 이사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굳이 짐을 늘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트리를 꾸미고 장식하는 건 잠깐 좋을 뿐인데 그 뒷정리와 짐들을 보관하는 수고는 더 오래 걸리지 않냐. 그리고 무엇보다 '유용'하지 않은 것들에 돈을 쓸 필요가 있냐고.

릴리는 내가 주절주절 얘기를 늘어놓고 있으면 몇 번이고 앞서 한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들에 답을 하다 보면 스스로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트리를 사지 않은 나의 '합리적인' 이유들을 설명하자 릴리가 또 물었다. 그럼 언제 트리를 사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냐고. 고민하지도 않고 답했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을 때라고. 원하는 기간만큼 쓸모없는 짐들을 내팽개쳐 두어도 괜찮을 때, 아무도 나를 나가라고 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재정적으로 쓸모없는 것들을 살만큼의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나는 트리를 꾸밀 수 있을 거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릴리는 전에 했던 말을 상기시켜주었다.


You don't seem like living in the present.

너는 현재에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지금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참고 미루면 나중에 행복할 수 있는지. 지금 모두가 축제를 열 때 같이 즐길 수 없다면 나중의 행복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현재를 즐기지 않는 '합리적인' 이유들은 결국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not deserved) 여기는 걸로 보인다고 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자격'이라고 설명하든 '여유'라고 설명하든, 어쨌든 나는 지금 즐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결론에 대한 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고민과 문제들은 깊이 팔 것도 없이 유년시절로부터 시작된다.

부모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유년시절은 내게 평생 사라지지 않는 사막 같은 갈증을 주었다.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쓰다 보니 노력해 성과를 이뤘을 때의 성취감이 사막에 흩뿌려지는 이슬비 같은 효과를 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구도 지켜주지 않으니 스스로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나를 쉬지 못하게 밀어붙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게감이 목표를 향해 가는 원동력이 되어 많은 것들을 이루게 했다. 하지만 성취감은 신기루 같아서 지나치다 싶을 만큼 빠르게 그 효과가 사라졌다. 몇 달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취업준비를 하다 원하는 직장에서 마침내 오퍼를 받았을 때,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겨우 하루를 가지 못했다. 캐나다에 온 지 2주 만에 일을 구해 코로나 시국에서도 직장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출근한 덕분에 마침내 영주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그때의 행복은 고작 3시간이었다. 영주권 승인 소식을 듣고 3시간이 지나자 평소처럼 여러 가지 걱정들로 불안하고 바쁘게 사는 평소의 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겨우 많은 것들 중에 하나 이뤘을 뿐이니까 - 내가 즐길 수 없는 건, 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잠시 미루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지금 좀 힘들지만 나를 좀 더 채찍질하면 더 빨리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는 기분이 들 때면 나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렇게 포기해온 많은 것 중에 하나였다. 나중에 해도 되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걸 왜 지금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무시했다. 물론 희생한 만큼 성과들이 있었으니 내 삶의 방식들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고 여기지만.. 이따금씩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사는 게 버겁고 힘들다고 느껴져 무너지듯 울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때로는 집에서 남자 친구와 싸우다, 때로는 클리닉에서 누군가가 건넨 가벼운 인사말에, 때로는 길에서 혼자 생각하다가. 눈물은 시도 때도 없이 터지듯이 나왔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사는 건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 특별한 문제도 없고 대단한 사건도 없는데, 어쩌면 성인이 되어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진 지금이 일생에 가장 평탄하고 계획대로 가는 순조로운 시기일지도 모르는 지금이 - 왜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많이 이뤘고 많이 왔는데.. 왜 이렇게 끝이 안 보이는 막막함이 드는 건지.


릴리는 내가 너무 많은 작은 행복을 미루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지쳐버린 거라고 말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현재의 희생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현재를 모조리 무시하다가는 내일까지 갈 힘을 잃게 된다고. 많은 돈을 쓸 필요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충분히 오늘을 즐길 수 있다고. 다만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만들기. 작은 거라도 좋으니 꼭 트리를 만들고 홀리데이 기분을 느껴보라는 숙제를 하려고 아마존에서 인조 트리를 주문했다. 예전부터 갖고 싶었던 따뜻한 색감의 전구도 사고 지나가다 들른 중고품 가게에서 오너먼트도 샀다. 낮에는 회사 일로, 밤에는 컬리지 수업으로 바쁜 날들이 이어져 한동안은 택배를 뜯지도 못하고 방치해뒀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 부랴부랴 나무를 조립하고 장식을 달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 12시가 다 돼서 인조 나무 잎들을 하나하나 펼치려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영화에서만 보던 크리스마스 트리에 오너먼트를 달아보는 순간은 살짝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후다닥 트리를 만들고 전구까지 달아 불을 밝혔다.



오너먼트를 많이 달지 못했는데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내년엔 장식을 더 많이 사야겠다.


 불빛이 반짝이는 트리를 본 순간 처음 떠오른 생각은 측은지심이었다. 이게 뭐라고 여태 한 번도 안 해봤을까. 대단히 비싸지도 않고 엄청나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겨우 이런 것도 평생 안 해보고 산 나 자신이 측은했다. 트리를 설치하는 순간 잠깐 재밌고 말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대학에 합격했을 때나 영주권을 취득했을 때의 짧은 만족감보다 트리가 주는 기쁨은 훨씬 더 컸다. 우울하고 흐린 밴쿠버 날씨가 주는 무기력감을 달래주기에 30불짜리 전구는 충분히 제 값을 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빠르게 반짝이는 트리를 보고 있으면 회색빛 하늘이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에 크리스마스 즐기기에 선배(?)들인 친구들이 준 카드까지 트리에 꽂아 두니 볼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 간지러웠다.

내친김에 돈 아깝다고 매번 지나치기만 했던 어글리 스웨터도 사서 입었다. 크리스마스 요정 모양과 방울이 달린 머리끈까지 사서 맸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외식을 할 때 입고 나갔더니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어글리 스웨터가 귀엽다는 칭찬을 들었다.

몇 년 동안 생각만 한 일들을 직접 해보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다.




친구들에게 받은 카드를 트리에 두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게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게 즐거운 일이었지만, 아니었다고 해도 얻는 게 있다. 시도해보고 결과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다음에 안 하면 된다. 대신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겠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남들이 즐기는 축제를 보고 쓸쓸해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냥 그랬어'라며 쿨하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건 트리를 꾸미고 안 꾸미고가 아니라, 현재의 내가 원하는 것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주는 것. 릴리가 하려던 말은 결국 '해봐야 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새해의 목표는 조금 더 현재를 즐기는 것으로 삼았다. 매번 잘 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온 나라가 신나게 즐기는 휴일들은 그 분위기에 맞춰 보려고 한다. 올해 여름에는 집 근처 개울가라도 가서 발이라도 적셔야지. 할로윈에는 작은 호박이라도 사 볼 예정이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꼭 공원으로 가 단풍나무 밑에서 사진을 찍어야지.


미래의 나를 웃으면서 만나기 위해, 오늘의 나를 좀 더 즐겁게 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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