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싫으면서도 사람이 좋은 이유
나는 종종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인류애가 없다’고. 그럴 때면 사람들은 다분히 의아해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누구보다 사람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수년간 시도하고 있는 채식을 지향하는 태도 또한 그렇게 보이도록 한 이유 중 하나일 테고. 그렇지만 나의 태도는 완고하다. 나는 인간이 싫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인간이라는 ‘종種’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생명을 얻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욕망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그렇게 설계되었고 거기에 불문율은 없다. 여기서의 욕망은 단순히 건강, 부에 대한 부분적 '욕심'의 개념보다는 언제나 가진 것에 금세 적응하면서 그와 동시에 더 나은 것을 자연히 '또'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말한다. 욕망하는 부분까지는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인간은 적당히 만족하고 멈추는 법을 모르는 데에 동물과의 명확한 구분점을 둘 수 있겠다.
인간은 왜 만족을 모르는 걸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심지어 스스로 환경운동가임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계절이 바뀌면 새것을 갖고 싶은 욕망에 여지없이 휩싸이는데 나는 적당을 넘어서 이미 넘치게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내 모습을 보는 게 꽤 힘들었다. 나를 포함한 주변인, 또 더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지켜보아도 왜 인간이 이토록 욕망에 취약한 존재인지, 왜 욕망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고 의문만 커져갔다. 각자가 가진 양심의 크기 정도야 다를 수 있지만 결코 올바른 일―뻔히 답이 제시되어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을 위해 주어진 제 행복을 버리는 행위까지는 선뜻 망설이는 모습, 그 때문에 나 자신마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고작 이런 게 인간이라니. 이런 게 나라니.
내가 인류애라는 단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 계기는 역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여느 날과 같이 취미인 독서 생활을 즐기던 어느 날 우연히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언제부터인지 당시 뉴스나 TV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채식’, ‘비건’, ‘기후 위기’와 같은 단어에 크게 관심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이게 뭐길래 자꾸 나오지, 싶은 마음에 가볍게 책을 집어 들었다. 아무튼 시리즈니까 아무튼 대충 알려주겠지. 먼저 단언하겠다. 이 책의 내용은 가히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가벼운 교양서적의 모습을 한 ‘아무튼’ 시리즈에서 제명되어야 한다고. ‘아무튼 이런 거야-‘라는 식의 가벼운 지식을 기대했던 나는 그 책을 읽은 날, 세상에 금이 가고 인생이 온통 휘어져버렸다. 정확히 나를 향해 조준되어 날아오는 총알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가련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는 떨고 있었다.
책의 내용은 21세기의 지금 내가 사는 평범한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마치 호러, 공포 소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충격적인 육류, 낙농업 산업의 실체가 저자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단편식으로 나열되어 있었는데 나는 도저히 그 모든 일이 현실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이게 소설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면의 세계라도 너무 가혹하고 처참했다. 이 사람이 급진주의자일 거라고, 어떻게든 믿고 싶지가 않아서 더 많은 책과 다큐, 영화를 보았지만 책보다 더 참혹한 현실을 마주할 뿐 예고에 없는 실연을 당한 후 그 실연의 과정을 억지로 삼켜내는 사람처럼 나는 충격과 부정, 분노를 거쳐 해탈, 받아들임의 단계로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왜?’를 달고 사는 지극한 사고형(T: Thinking)인 내가 어린 시절이라고 달랐을까. 어린 날을 돌이켜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들이 만연해 있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어른들의 대답은 마뜩잖았다. 가령 니모는 가족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를 마지막 순간까지 응원하면서 왜 저녁 밥상에 올라온 고등어는 파헤쳐 먹어도 되는 것인지, 동물농장에 나오는 아기 돼지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입혀가며 귀엽고 친근하게 여기게끔 만들어놓고 어떻게 점심으로 돼지갈비를 먹는지, 왜 우리 집 강아지는 호사를 누려야 하면서 저토록 예쁜 눈을 가진 소는 구워 먹어도 되는 건지. 그러니까 왜 얘는 되고 쟤는 안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왜 하나만 할 수 없지?’ 어린 날의 이 혼란은 사실 너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살아있는 동물과 마트에 진열된 썰린 고기 사이의 연결고리가 완벽히 끊어져 있는 데에 제기된 나의 의문은 애초에 묵살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었고, 어른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에 불과한 나는 그저 그래야 하는구나-에서 그래도 되는구나-의 슬픈 방향으로 기어이 나아갈 뿐이었다. 세상이 우리를 모순덩어리의 인간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물을 사랑하는 착한 아이임과 동시에 고기는 남기지 않고 배불리 먹는 기특한 아이여야 했다. ‘그러니까, 네?’
나는 정말이지 하나만 했으면 했다. 먹어도 되고 먹으면 안 되는 게 ‘종’으로 나뉘는지 ‘귀여움의 정도’로 나뉘는지, 그렇다면 그 귀여움은 어떤 식으로 정의되는지, 애완견과 도살장의 개를 구분할 수 있는 어떠한 차이점 따위가 존재하는지 단순히 그 분류법을 알고 싶었다. 분류법이라도 있으면 눈 감고 따를 용의마저 있었다. 고기는 맛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들었던 어린 날의 노력은 무참히 실패를 거듭했고 결국 나도 집안의 제일가는 고기대장 막내로 떳떳하게 성장했다. 해결되지 못한 의문점은 마음 한편에 박아두고 입은 나날이 발전하는 고기요리의 맛을 향유하면서 즐거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그러한 모순쯤은 모두가 합의하면 쉽게 묵살할 수 있는 게 지금의 사회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다만 백 번을 양보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아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곧 사회 그 자체였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지만. 결국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건 이 ‘암묵적 합의’를 눈가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음, 그렇다면 난 이제 어른이고 싶지 않은걸. 풀지 못하고 대충 넘긴 고난도의 수학 문제를 시간이 흘러 다시 들춰보듯 처박아둔 의문들을 다시 흘겨보았다.
인간이 육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길러졌기에 이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웬만한 고집과 배짱이 아니고서는 실행하기 어렵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내 몸(건강)과 내 집(환경)을 지키기 위해 육류 소비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2015년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 암 연구소 IARC에서는 가공육(햄, 베이컨, 소시지 등)과 적색육(소, 돼지, 양고기 등의 붉은색 고기)을 각각 1군, 2A군의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이들 육류의 섭취가 암을 유발하거나(1군)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2A군)는 과학적 근거가 쌓인 탓으로 축산업계에서 발 넓게 조치해 온 국가 규모의 로비마저 이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다 막아낼 수는 없던 모양이다.
우리는 고기의 탄 부분을 먹거나 줄담배를 피우면 암에 걸리기 쉽다는 상식쯤이나 알지, 대부분은 고기 자체가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물론 알고 싶어하지 않기도 하고. 이는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이 부족해 죽을 것 같은 환경을 조성해 낸 육류산업의 참으로 뿌듯한 성과로, 결국은 단백질 신화다. 일단 나부터가 설득되어야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인간의 유형인지라 내가 먼저 실험해 보기로 했다. 고기 대신 식물성 단백질만으로 제 몸뚱이가 기능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말이다. 세상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가족, 지인들만은 그 단백질 신화라는 사기극에서 끌어내려야만 했기에 진심으로 매달렸고, 대충 해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고정관념의 바위를 깨야 했으므로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는 늠름한 계란으로 거듭나려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유전적 질병인 재발성 류마티스 관절염(손과 손목, 발과 발목을 비롯한 관절에서 단기간, 주기적으로 염증이 나타나는 퇴행성 관절염)을 거의 완치했고 고질적인 만성 소화불량을 크게 개선하는 효과를 보았다. 또한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어떠한 병치레도 없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채식에서 시작된 나의 의문은 자연히 더 넓은 분야로 나아가 플라스틱, 쓰레기 처리, 패스트 패션, 탄소배출과 같은 전체적인 기후위기와 관련된 서글픈 현실들에까지 가 닿았는데 모두 다른 이름을 하고 있지만 전부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소름 돋았다. 도저히 이것만 신경 쓰고 저것은 무시할 수가 없는 형태였다. 이제라도 목소리를 보태야 했다. 내 선에서 최대한 정제하고 걸러낸 정보만을 사람들이 너무 충격받지 않게끔 극도로 조심스럽게 전하고, 아주 작은 마음의 파도라도 일으켜보자는 기대감으로 주변에 알려 왔지만 수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아, 알지. 중요하지. 근데 어떡해.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나처럼 조용하고 타협적인 환경운동가가 힘을 발휘하기에는 너무도 잔인한 '인습'이라는 벽 앞에서 왜 TV에 등장하는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들이 탄생하는지 그 배경마저 이해하게끔 하는 현실이었다. 나는 환멸감에 죽어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인간이고 싶지가 않아서.
실제로 미국에서는 많은 환경운동가가 분신자살을 한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이면을 발견하고는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이 극에 달해 그 울분과 설움을 제 몸에 지핀 불로나마 밝혀내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이기를 저버린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희생자였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답답함이 절정의 공포감으로 치달을 때 한시라도 더 빨리, 더 효과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간절함이 폭발해서 생긴 우발적 생각이었고 동시에 인간으로 존재하기가 힘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상상 속에서의 계획은 극적일수록 큰 효과를 기대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들어줄까. 불구덩이로 떨어지는 친구에게 미친 듯 소리 지르고 손을 잡으려 뻗는데 그 친구는 정작 놀이기구라도 탄 듯 웃으며 나에게 손 흔들어줄 뿐인, 그런 형국이었다.
누군가를 너무 깊이 사랑하면 때때로 불안해지거나 문득문득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지금의 행복을 언제 잃을지 모른다는 마음에 미래에서 빚져오는 불안감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내 사랑의 양이 너무 커서 툭 삐져나오는 벅찬 눈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가끔 울었다. 절망스러워서. 어쩌면 평생을 살면서 계속해서 나에게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줄 이 ‘인간’이라는 종의 내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걸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미워할걸. 그래도 혹시,라는 기대를 더 일찍 저버릴걸.
차라리 그 과정에서 인간혐오자로 거듭났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그런데 젠장, 나는 사람이 좋다. 가만히 앉아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면 그 움직임이 어찌나 새롭고 매번 다채로운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생명들은 어쩜 저렇게 다 다르고 예쁠까, 다름에서 오는 예쁨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포기가 안 됐다. 그래서 이 복잡한 마음이 다시 한번 극에 치달으면 나는 짐을 챙겨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끼자’는 목표로 떠난 여행지 곳곳에 앉아 무턱대고 지나가는 사람을 그려댔는데 종이 위에 내려앉은 사람들은 심지어 더 귀여웠다. 효과가 있나? 또 다른 하루에서 사람을 마주하는 건 내심 고통이었지만 이 삶을 포기할 자신이 없는 자의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 무언의 행위는 단발적으로 가끔씩 효과를 발휘했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잔인하다’고.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게끔 한 ‘내’가 잔인하다고, 자신은 고기를 평생 먹을 것이고 이 점에서 아주 떳떳하다고,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오, 세상에. 이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도 하고 저 멀리 우주로 붕-하고 날려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매번 안쓰럽다는 시선만 받다가 그런 반응을 보니 오히려 새로워 이제 더는 황당하지도 않고, 이제는 정말 세상을 막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걸 흑화라고 하나. 덕분에 많은 걸 놓아버려 삶이 한결 편안해졌고 이 황당한 일화로 나는 점차 슬럼프를 극복하고 지금의 건강한 모습에 이르렀다. 정말 감사해요.
스스로가 ‘신’ 임을 자처하는 지금의 인간은 후대에 어떤 식으로 기록될까. 먹기 위해 과하게 밀집시켜 키운 농장에서 발병한 병으로 살아있는 수백 만의 목숨을 한시에 끊어놓기도 했다가 또 밥상에 필요한 양만큼의 생명을 기어이 다시 ‘생산’해내고야 마는, 개체수 조절에 의심스럽도록 능한 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제 정말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 다다랐다. 아, 이 굴레는 계속되겠구나. 인류사는 언제나 싸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이 공존해 왔고 그들이 아웅다웅하며 부둥키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구나-하는 생각.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인간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남들 말대로 내가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건가? 진실을 외면하는 게 다수의 선택이라서? 그래도 모르겠다. 나처럼 진통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어둠을 받아내고 있어서 그나마 지금의 속도로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고 스스로 위안 삼기도 하지만 여전히 양가감정이 든다. 그저 아카시아 잎을 하나 하나 떼어내듯 내 마음의 갈피조차 운명에 내맡겨버렸다.
사랑은 언제나 아프다. 사랑이 어디 제 마음대로 되던가? 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피하면 다시금 찾아오는 게 사랑인 것을.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제 할 일 하며 묵묵히 살다 보니 이제야 세상에 일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의 파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마 나처럼 ‘왜?’를 무시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그 물음을 파헤친 탓에 생긴 물결일 게다. 그곳의 모든 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를 저어보자고. 힘들 땐 노질을 잠시 쉬더라도 방향키만은 반드시 그러쥐고, 그러다 다시 힘이 나면 제 속도로 조금씩 저어보자고. 그 배가 끝내 어디로 당도할지는 다만 끝까지 저은 자만이 알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