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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7. 2018

1. <조선일보> 논술 합격문 검토記

언론사 준비생을 위한 가이드 [1] 문제 설정이 절반이다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앞선 <여는 글>에서 충분히 언급한 것 같아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2014년 <조선일보> 논술 시험을 검토한다.(신문사들 중에선 응시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라 선택했다. 선발인원 또한 타 신문사에 비해 많기 때문에 경쟁률이 가장 높다고 할 순 없다.)

 

<조선일보>는 전통적으로 논술에서 주제어를 단촐하게 제시하는 편이다. 감독관이 시험장에 들어와 단어 하나를 칠판에 쓰고 뒤돌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 질문도 받지 않는다. 순간 시험장에 정적이 흐른다. 응시생들 사이에서 이따금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약간의 웃음과 함께 새어나온다. '어쩌라는 거지?'      

ⓒpixabay.com

예컨대 2014년엔 ‘인사(人事)’, 두 글자만 적어놓았다. 2015년엔 ‘갑질’, 2016년엔 ‘보수’였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2013년엔 ‘권력과 권위, 상호의존관계인가 상호배척관계인가’, 2017년엔 ‘미국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 찬성하면 찬성하는대로, 반대하면 반대하는대로 논하시오’였다.

       

2017년을 제외하고 2013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가 요구한 논제는 구체성보단 추상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당면한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응시생이 가진 인문사회과학 개념을 동원해 문제를 스스로 설정하고 논거와 대안을 제시해야한다. 

     

이처럼 논제가 추상적일 경우, 사실상 단기간 대비는 어렵다. 당신이 살아온 삶 전체를 토대로 적어나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논제가 구체적일 경우, 그러니까 특정 화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경우는, 당신이 거듭해 연습한 논술문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한 편의 글을 작성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조선일보>의 경우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에겐 어렵고 다른 이에겐 이보다 더 대비하기 쉬운 시험이 없게 된다. 회사를 다니면서 기자를 준비하는 사람들, 예컨대 매일 신문을 챙겨보며 사안마다 입장을 정리하기 어려웠던 사람들에겐 상대적으로 유리한 출제 경향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에 해당했다.      

ⓒpixabay.com

일단 내가 적어낸 2014년 논술을 살펴보자. 낯 뜨거운 부분이 많지만 거침없이 자기 비판을 직후에 할테니 참고 읽어주시길 바란다. (제목을 반드시 기재하라는 지시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난 어느 글이든 제목을 적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고, 현장에서도 그렇게 했다)


제목 : 인사(人史)가 아닌, 인사(人事)의 시대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 ‘사’는 사(史)가 아니라 사(事)다.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벌여 놓은 갖은 일들, 즉 인사(人事)를 기록해놓은 것이 삼국유사란 뜻이다. 일연은 거인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왜일까? 역사란 거대한 시간의 축적물인데, 여기에 ‘정권’은 늘 변수(變數)로써 기능했기 때문이다. 반면 민초는 상수(常數)였다.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은 우리 민중들이었다는 뜻이다. 일연이 천착한 부분이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네의 일들, 그러니까 인사(人事)를 제외하고 역사를 논할 수 있겠는가.      


학계에서도 미시사에 대한 연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백영서 교수는 2달 전 펴낸 자신의 저서 <사회인문학의 길>에서 민중의 이야기, 즉 인사(人事)가 바로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학계의 지나친 거시사 연구 경향이 우리네의 이야기들을 많이 놓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과연 그렇다. 근대 역사학 연구란 대체로 실증에 바탕한 사실의 기록,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이로 빠져 나간 민초들의 이야기와 일(人事)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그것들 대개가 역사 연구에 포함되지 못했다. 역사의 정수가 사라진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들의 ‘이야기’가 다시 힘을 발휘하면서 미시사 연구가 역사 연구의 본류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어떤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줄기찬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정부가 이렇다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스스로 들고 일어나야했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참혹한 실상을 절절한 외침 속에 이야기의 형태로 담아 세계에 전했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 앞에서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들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들을 적어 널리 공유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될 것이라고 목놓아 외쳤다. 반향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전폭적인 공감이 세계 곳곳에서 날아들었다. 거시사 역사 논문에선 나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야기의 힘이 분출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격랑의 21세기는 이제 더 이상 거대 담론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게 됐다. 우리가 생존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끝내 삶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의 일들(人事)과 이야기는 힘이 세다. 역사는 역사가에게만 맡기기에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다. 우리도 일연 스님처럼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미시사가가 되는 것은 어떠한가. 어쩌면 그런 행동들이 모여 역사를 바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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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인사’를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아마도 출제 위원은 2014년 당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 난맥상을 염두에 두고 이 논제를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업에 바빴던 난 당시 어떤 인물이 지명돼 어떤 사유로 낙마하게 됐는지, 또 그로 인한 여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평가가 어떤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인사’가 주제어로 나오니 정신없이 펜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대다수가 짐작했던 주제였으리라. 많이 연습해본 주제.

      

난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워 이길 수 없었다. 와중에 실마리를 한자에서 잡았다. 감독관은 ‘인사’라고 한글로만 써놓은 것이 아니라 인사(人事), 즉 한자를 병기해뒀다. ‘그래! 인사 난맥상을 쓰지 말자. 인간의 일에 대해 쓰자. 일 사(事)자가 들어가는 재미난 사례가 없을까.’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삼국유사였고, 이를 단초로 논지를 전개해나갔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추상적인 주제가 나오면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주제 자체를 너무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같은 주제여도 다른 영역을 다루면 당신은 이미 그 영역에서 가장 앞서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당신이 차지한 영역이 출제자의 본래 의도와 어긋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논술은 ‘논리 전개’에 무리가 없는지를 보는 시험이다. 쉽게 말해, 말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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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 번째 문장 앞 부분으로 돌아오자.

     

난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라고 적었다. 당신은 기자가 될 사람이다. 현업에 들어오면 반복적으로 배우게 될 테지만 기사에선 독자를 잡아끄는 첫 문장(리드)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몸에 밴 채점 위원들은 첫 문장을 유심히 본다. 합격을 바라는 글에서 첫 문장이 평범한 것은 죄악이다. 그러니 ‘훅(Hook)’이 들어간 문장을 써야한다. 당대의 통념, 미신, 신화,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맞서는 글을 써보겠다고 치고 나가면 채점자들도 호기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적어도 one of them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리드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괄식 글을 기자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서두에 내밀자. 그 예로 2013년 논제 ‘권력과 권위, 상호의존관계인가 상호배척관계인가’를 검토해본다. 이 경우 확실한 당신의 입장을 첫 문장에 밝히는 것이 유리하다. 상호의존적이라고 판단하면 그 주장을 간명한 문장에 담아 리드에 적는 것이다. 주변을 맴돌다 3문단에서야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건 합격을 목표로 하는 기자 글쓰기에서,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pixabay.com

정리해보자. ‘인사’라는 논제를 받아들었다. 우선 남들이 다 쓰게 될 방향과 다른 각도를 검토하자. 그리고 그 영역에 해당하는 예시를 끄적여본다. 논리를 만든다. 나 같은 경우는 4문단으로 개요를 짰다. 문제제기(통념 비판)-역사적 맥락 검토-당대 현실 검토-제언이다. 이후 눈을 잡아 끌면서도 당신의 주장을 요약할 첫 문장 몇 가지를 굴려본다.     

 

(개요 짜기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논하겠다. 일단 이 정도만은 말해두자. 개요 짜는 데 너무 시간 많이 들이지 마라. 아마 이는 다른 언론사 준비반 강사들의 주장과는 다소 상반된 내용일텐데, 난 이 글을 전적으로 준비생 입장에서 적어내려 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내 답안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 구체성이 떨어진다. 당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슈에 대해 육하원칙에 따라 서술한 문장이 없다. 기자들에겐 더더욱 치명적인 결함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시험장에서 난 해당 사례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구체적 사례를 간명하게 3문단에 적시했다면 글에 대한 평가가 좋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마지막 4문단에서 창의적인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1~3문단에서 내놓은 주장을 반복하며 약간 살을 덧대는 데 그쳤다.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지를 더 강하게 피력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1000자 내로 제한된 짧은 논문에서 반복은 미덕이 아니다. 사유가 부족했다. <조선일보>는 논술과 작문을 합쳐 2시간을 배정하는데, 당황한 마음에 확장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능력 부족이다. 

    

이같은 결정적 하자에도 불구하고 필기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논제를 다른 각도에서 검토했기 때문일 것이다. 난 그렇게 판단한다. 언론사가 신입을 뽑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를 이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대한 새로운 척이라도 해서 일단 필기를 통과하자는 말이다. 말만 맞게 쓰면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신문사의 성향도 약간은 고려하자. 정치적 성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글에서 그리 어렵지 않은 한자를 몇 차례 병기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그렇게 적었다. <조선일보>는 타 신문사들보다 한자 능력을 높이 산다. 그러니 당신의 글에 포함된 단어 중에 한자를 정확히 알고 것이 있다면 이를 병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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