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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07. 2023

분명 9개월이 있었는데, 시험까지 두 달이 남았네

공부하는 척만 해도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엘리와의 수업이 끝나갈 즈음이었던 2020년 7월, 학원에서는 오프라인 강좌를 다시 열었다. 코로나가 장기화될 것이 분명해져 모두 마스크를 끼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던 시기였고, 학원이 문을 닫은 지 4개월 만이었다. 남은 날이 많은 줄 알았던 9개월의 환급프로그램은 종료까지 세 달이 남아 있었다. 내가 신청한 환급프로그램은 신청일로부터 9개월 이내에 B1 시험에 합격했다는 증명서를 제출하면 약 100만 원의 온라인 강좌비 전액을 돌려받는 프로그램이었다. 공인인증 독일어 시험은 한국에서 그렇게 자주 열리지 않았고, 결과가 나오는데도 3주가 걸렸다. 시험 성적표 제출 기한을 고려해 시험을 칠 수 있는 가장 늦은 일정은 8월 말이었다. 나에게는 사실 고작 두 달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름 꾸준히 한다고 했지만, 그건 게으른 인간 기준 ‘나름’ 일뿐이었다. 6개월 동안 독일어를 공부했지만 학원의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했던 처음 두 달 이후 나머지 4개월은 사실 실력 향상이 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것도 그럴 만했다. 공부라고 했던 건 퇴근 후에 30분 인강 듣기가 전부였고, 그것도 한 날보다 안 한 날이 더 많았다. 외국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단어 공부’는 따로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뜻을 찾아보고 이해한 다음,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함께 기억 저 편으로 넘겨 보냈다. 엘리와 함께 했던 온라인 수업은 일주일에 고작 20분이었고, 그것도 수업 직전에 사전을 뒤져가며 할 말을 만든 다음 그대로 읽기만 했다.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척’만 하는 나날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오프라인 강좌가 다시 열린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로또 당첨 같은 대운은 없지만 소운과 종종 중운이 따르는 인생에 찾아온 또 한번의 럭키. 그래, 이제 진짜 공부 좀 하라고 나를 학원에 갖다 넣는구나. 이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키는 대로 공부해 보자!






내가 신청한 수업은 B1 레벨, 레벨 분류 기준에 따르면 해당 언어로 일상생활을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내 수준은 겨우 독일어로 자기소개만 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B1 시험에 합격하려면 시간이 없었다. 어려운 반에 그냥 집어넣어두고 어떻게든 해 내라고 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선생님은 ‘샘’이었다. 샘쌤과의 수업은 처음 A1 레벨에서 했던 것처럼 주중에는 인강으로 예습을 하고, 일주일에 한번 학원에 와서 같은 진도를 다시 한번 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샘쌤은 당연히 두 시간의 수업 내내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아, 지금은 뭘 시키는구나.’ ‘아, 이거 쓰는 거구나.’ ‘뭐라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웃자.’ “하하.”하며 어물쩍 넘어가기를 반복했다.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학우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대~충 알아들을 순 있지만 말을 못 했고, 샘쌤이 질문을 하면 교실에는 에어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욕적인 샘쌤은 소극적인 우리에 굴하지 않고 수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끌어 갔다. 같이 게임을 하고, 롤플레잉을 하는 등 혼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룹 수업에서는 적절히 활용되어 공부에 즐거움을 더했다. 영어처럼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공부가 이제야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학생에게 B1 수업은 쉽지 않았다. 일단 주중에 들어야 하는 인강은 B1 레벨이 되자마자 급격히 어려워지고 분량이 늘어났다. 이전에는 길어야 30분이었던 강의가 1시간에 가까워지고, 어휘와 문장의 수준이 갑작스레 껑충 뛰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정보가 쏟아지면 내 뇌는 작동을 멈추고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교실 책상에 맨날 엎드려 자던 학생은 집에 있는 책상에서도 엎드려 자는 직장인으로 자라기 마련이다.


샘은 매주 수업 시작 전에 단어 테스트 종이를 나눠줬다. 테스트가 있으니, 억지로라도 단어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 공부를 할 때마다 가장 나를 가로막는 건 어휘였다. 그나마 맥락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이해가 가능해야 정보를 머리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인간에게 냅다 다른 소리가 나는 단어는 도무지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시험이 있을 때만 반짝 공부하곤 했는데, 계속해서 말하지만 인간은 쉽게 변하질 않는다. 열아홉에서 십 년이 흘러도 단어 공부는 하기 싫고 단어는 안 외워진다. 일주일의 기한 내에 주어지는 단어는 100개. 5일 동안 하루에 20개씩이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양이다. 그러나 하기 싫은 건 안 하면 안 될 때까지 미루는 인간은 아주 가끔 에너지가 있을 땐 수업 전날, 대개는 수업 당일에 100개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떤 날은 어영부영 답을 쓸 수 있고, 어떤 날은 머리가 새하얬다. 몇 분 전에 답을 쓴 단어를 교재에서 보고는 샘한테 난생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난생처음 본다는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다짜고짜 휘리릭 받아들인 정보를 해마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가차 없이 시냅스를 끊어버리는 게 당연했다.


시험 준비를 위해서 진도를 최소 시험 1주일 전에는 모두 나가야 했지만, 정해진 일정대로 공부하기도 빠듯했다. 일단 주 5일 직장인의 삶에서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쏟아지는 업무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면, 독일어 산더미에 파묻혔다. 출근 전 아침에 인강을 듣고, 퇴근 후 인강을 듣고, 주말에 학원에 가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에 급급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이해하고 복습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시험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100만 원이 손에 살짝 들어왔다, 빠져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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