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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09. 2023

시원하게 말아먹은 독일어 B1 시험과 환급 실패

시험 후 알게 된 나의 진짜 실력

대망의 시험을 앞두고 4일간의 연차휴가를 냈다. 8월 말이었다. 다들 여름휴가를 위해 회사를 쉬었지만 나는 해변에서 칵테일 한 잔을 들고 누워 있는 대신 7평짜리 방에서 침대의 유혹과 싸우며 독일어 공부를 해야 했다. 목요일에 지필(읽기, 듣기, 말하기), 금요일에 구술(말하기) 시험의 일정이었기에 추가로 휴가를 낸 화, 수 이틀 동안 나의 벼락치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계획이었다.


가지고 있는 교재를 훑어볼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시험 모의고사 문제집은 따로 사지 않았다. 일반 서점에서는 문제집을 구할 수도 없었고, 독일어 학습 전문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하기에는 가격이 상당했기에 과감하게 패스한 후 수중에 있는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학원에서 받은 교재에 있는 문법과 어휘 위주로, 영어 내신 시험 공부하듯이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말하기 시험이 가장 걱정스러웠지만 이틀 동안에 말하기 실력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쉬운 주제가 나오고, 위기상황에서 나오는 초능력이 발휘되기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시험은 아침 9시부터 시작되었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남산에 있는 시험장에 도착했다. 자고로 시험엔 감독관이 “필기구를 제외하고 책상 위엔 아무것도 남기지 마세요. 적발될 시 부정처리로 간주합니다.”라고 말할 때, 가방 안에 자료를 집어넣기 직전에 보려다가 보지 못한 단어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볼 수 있겠지, 생각하며 막판 스퍼트를 위해 교재를 바리바리 챙겨 갔다.


독일어는 나만 공부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시험장을 꽉 채웠다. 모두 열심히 저마다의 공책과 교재, 프린트 등을 집중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는데도 결연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곳곳에서 산발하는 집중과 결의의 에너지를 느끼자, 긴장이 몰려왔다. 여기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시험을 치러 온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B1 시험을 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부량과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시험에 응시한 건, 이번에도 생각 한편에 운을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또한 네 영역 각각 100점 만점에 60점만 넘으면 합격이었다. 살아오면서 치른 무수한 시험에서, 대부분 실력에 비해 좋은 점수를 받곤 했다.(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수능에서는 첫 교시에 나사가 풀려 큰일이 났었다.) 가진 지식과 상식에 비해 점수가 좋았던 이유는 단언할 순 없지만 소소한 운과 벼락치기로 끌어올린 단기기억력, 정확히 몰라도 잘 때려 맞추는 유추능력(?) 덕분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떻게 잘 때려 맞추면 절반이 조금 넘는 60프로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 언어의 구사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은 학교에서 배우던 교과목과는 달랐다. 그렇게 얼렁뚱땅 코앞에 닥쳐서 조금 공부한다고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고작 8개월, 사실은 4개월 동안 하루에 1-2시간 공부해 놓고 모국어로 적어도 5년을 매일 같이 듣고, 말하고, 쓰고, 읽으며 살아온 어린이와 같은 수준의 독일어 구사 능력을 인정받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필 시험이 끝나버렸다. 모르는 것 투성이니 당연히 시간이 모자랐고, 펜을 굴리는 거나 마찬가지의 확률로 답을 찍었다. 나와 함께 공부한 원어민 선생님들은 나의 수준을 고려해서 아주 천천히 말해주는 거였고, 듣기 시험을 위해 녹음된 성우들의 말은 가차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들은 단어를 알아듣기도 전에 다음 단어로 넘어가서 머리가 뒤죽박죽 되는 속도로 재생되었다.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근거 없는 운을 소망했던 다음 날 말하기 시험에서는 정말로 운 좋게 어렵지 않은 주제가 나왔지만 운도 박살 내 버리는 말하기 실력으로 채점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파트너와 함께 주어진 주제에 대한 계획을 짜는 것으로 말을 주고받는 영역에서는 같이 산으로 소풍을 가는 게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 놓고, 갑자기 바다로 가면 돈이 많이 들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지경이었다. 엘리와의 수업에서 하던 것처럼 즉흥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미리 준비한 문장을 읽다 보니 생긴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시험장을 나오니 웃음만 나왔다.


‘와, 진짜 망했네.’


 역시 인간은 요행을 바라면 안 된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혹시?’ 하는 마음으로 객기를 부린 거였다. ‘대충 어떻게 되겠지~’ 하고 살아오던 것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걸, 그동안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고 앞으로도 이 정도로 대충 공부한다면 이 나이에 절대 독일에 가지 못할 거라는 자각이 남산을 내려오는 발걸음 발걸음마다 뼈에 사무쳤다.







다음 날은 샘과의 B1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수업 시작 전, 샘쌤은 그동안의 단어 테스트에서 가장 점수가 높은 학생에게 선물 수여식을 하겠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앉아 있었는데 샘은 내 이름을 불렀다. 정말로 어리둥절한 얼굴로 샘의 손에 들린 작은 선물을 건네받았다. 단어 테스트에서 1등을 했는데, 시험에서는 아는 단어보다 모르는 단어가 훨씬 많았다. 다시 한번 나의 단기기억능력에 놀랐다. 너무나도 짧은 그 기억력에.


초단기 기억력을 가진 덕택으로 스타벅스 상품권 2만 원을 얻고, 수강료 환급 실패와 시험 응시료로 120만 원을 잃어버렸다. 120만 원보다는 118만 원이 낫지. 커피 값은 아끼겠네. 공부하러 스타벅스 가야지... 헛웃음을 참으며 손에 스타벅스 카드를 꼭 쥐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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