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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12. 2023

다시 한번 도전한 환급 프로그램(곱하기 2)

환급 프로그램이 공부에 도움이 될까?

B1 시험에서 실패한 후, 공부를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너무나도 막막했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B1 레벨 복습을 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우연히 학원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의 선생님은 말했다. B1 시험에 불합격했다고 해서, 아니면 본인이 B1 레벨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다시 이전 레벨로 돌아가지 말라고. 레벨이 올라간다고 해서 항상 새로운 내용이 나오는 게 아니고 이전 레벨에서 배웠던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에 계속 다음 레벨을 향해서 계속하다 보면 점차 모르던 것들이 익숙해질 거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한 레벨을 완벽하게 마스터하려고 반복하다 보면 오히려 지치고 힘들기 마련이라고.


그러고 보니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지 못하고 매번 마음먹었다 금방 때려치우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았다. 기초가 부족한 것 같아서 기초 영어회화를 공부하면 너무 쉬워서 흥미가 떨어졌다. 쉬운 문장도 막상 영어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적재적소에 뱉지 못하기 때문에 영어를 처음 배우는 것처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주 쉬운 영어를 다시 공부하다 보면 독해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내용이라 재미없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어져서 금방 그만 두곤 했던 거였다.


하기 싫고 재미없는 것이 디폴트인 공부에 그나마 흥미가 생기는 지점은 ‘모르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되고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꾸준히 나아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때. 비록 독일어 시험 합격선인 ‘네 영역 모두 60점 이상’은 받지 못했지만, 독해와 쓰기 영역에서는 60점대의 점수를 받았다. 독일어 알파벳도 읽지 못하던 불과 몇 달 전과 비교하면 확실한 성장이었다. 비록 잘 알아듣지 못하고, 말은 거의 못 했지만 독일어로 된 문장을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고, 문법적으로 정확하진 않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알파벳으로 구성된 단어라도 이전에는 저 단어가 프랑스어인지 이탈리아언지 독일어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단어의 뜻을 모르더라도 독일어라는 사실은 알았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동안의 공부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선생님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어려울 것이 확실하지만 일단 다음 레벨인 B2 과정을 시작해 보기로.






2개월 동안 재개되었던 오프라인 수업은 코로나 확산이 심화되면서 다시 열리지 못했다. 학원에서는 이번에도 나같이 강제성이 없으면 쉽게 공부를 그만두는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온라인 프로그램을 제공했는데, 이름하야 ‘100일 원정대.’ 또 다른 환급 프로그램이었다. 2달에 하나의 레벨을 완료해야 하는 이전 프로그램의 성공률이 낮았던 탓인지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한 레벨의 온라인 강의들을 100일의 일정에 맞춰 나눈 시간표를 제공하고, 한 주 동안 공부한 내용을 매주 1회 개인 블로그에 복습 + 후기 형식으로 포스팅을 완료하면 완료한 횟수만큼 적립금을 쌓아 현금으로 환급해 주는 방식이었다. 실제 수강생의 후기를 활용하기 위한 온라인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인 것이다. 나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블로그 포스팅이야 회사에서 매일 하는 일이고, 글을 올리려면 어쨌든 어떻게든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시험 합격에 대한 부담도 없고, 기한도 100일이면 이전에 비해서 넉넉하고, 수강료도 절약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조금은 덜어진 시간적 부담감에 마음이 편해진 것도 잠시, 게으른 주제에 의욕은 넘치는 나는 또 하나의 환급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학원에서 최근에 개발한 독일어 성인 학습지였다. 내가 처음 독일어 공부를 시작할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학습지는 처음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재밌게 공부할 수 있게 기존과는 조금 다른 컨셉으로 제작된 교재였다. 하루에 한 장, 말하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강의도 원어민과 한국인 선생님이 가볍게 대화하며 설명하는 방식이라서 딱딱하지 않았다. 게다가 3주에 한 번씩, 1년 동안 총 18번의 강의 후기를 블로그에 포스팅하면 강의료를 100% 환급해 줬다. B2 수업처럼 포스팅 개수로 환급되는 건 아니고, 기한 내에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그대로 실패였지만 3주에 하나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공부량은 하루 한 장이고, 이 강의로 부족한 기초, 특히 말하기를 연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잃어버린 독일어 공부의 재미를 다시 찾고 싶었다. 이미 배운 교재로 본격적인 복습을 하는 것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B2 공부와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A1 수업 이후에 독일어에 손을 놓아버린 산에게도 적절한 강의 같았다.


그렇게 학원의 마케팅에 너무 쉽게 말려든 나는 학습지와 B2 온라인 강좌, 두 개의 강좌를 동시에 결제하고 두 개의 환급 프로그램을 시작해 버렸다. 바로 얼마 전에 환급 프로그램에 실패한 인간이라기에는 사실 너무나도 어이없는 결정이었다. 인간은 이렇게 반성이 없다.






그래도 아주 반성이 없는 건 또 아니어서 이번엔 어떻게든 환급에 성공하겠다고 결심했다. 꾸역꾸역 일정에 맞춰서 강의를 들었다. 매주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과제는 매주 가던 오프라인 수업의 강제성과 같은 효과를 줬다. 아무리 공부를 미뤄도 토요일까지는 한 주의 분량을 모두 공부해야 했다. 보통 A1, A2, B1 레벨까지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언어의 영역을 다루고, B2 레벨부터는 조금 더 고급 어휘, 학문이나 정치, 경제, 사회 등에 관련된 텍스트를 다루기 때문에 언어의 레벨이 생각보다도 너무 높았다. 그동안 독일어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난생처음 보는 어휘가 쏟아졌고, 한 강의의 길이도 1시간은 기본이고 2시간 가까이 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피 같은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고통을 감내해야지...! 나는 친구들과의 제주도 여행에서도, 산과의 결혼기념일에도, 강의를 듣고 블로그 게시물을 올렸다.


결과는? 각각 100일과 1년의 환급 프로그램에 모두 성공하고, 수업료를 100% 돌려받았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B2 공부는 블로그 포스팅을 위한 가짜 공부나 마찬가지였고, 하루에 한 장씩 공부한 학습지는 기초를 다시 다지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비록 100일로 늘어나긴 했지만 짧은 기간 안에 욱여넣은 많은 공부량을 제대로 소화할 능력이 내게는 없었다. 바로 한 주 전에 업로드했던 게시물을 읽어보면, ‘내가 이 글을 썼다고? 저런 걸 배웠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가지 환급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하며 깨달은 한 가지, 어떤 공부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은 시간을 들여도 단기간에 많은 시간을 들인 것보다 오랜 날 조금씩 공부한 것들이 더 기억에 오래 남았다.






‘100일 원정대’는 힘들고 시간도 많이 써서 돈은 돌려받았지만 결국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오히려 시간과 체력만 소진해 버린 것 같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손해를 입은 건 나뿐만 아니라 학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3개월 동안 매주 1회 블로그 포스팅이라는 과제가 너무 쉬워서 참여한 학생들의 성공률이 매우 높았던 탓인지 학원은 그 프로그램을 첫 100일 이후에 다시는 오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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