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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19. 2023

B2 시험 분할응시작전

어려울 땐 떼어 놓아 보자

외국어 공부라는 게 이렇게 지난한 과정이 될 줄 모르던 병아리 시절에 세웠던 계획은 이러했다. 


2020년 1월 독일어 공부 시작

2021년 2월 B2 시험 응시 및 합격

2021년 4월 대학원 지원

2021년 10월 퇴사 및 바로 대학원 입학


이히리베디히(Ich liebe dich = 나는 널 사랑해)가 독일어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일자무식이었던 나는 외국어 공부에 대해서도 무식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는 게 없었다. 왕초보에서 인강만으로 9개월 만에 C1 시험에 합격했다는 학원의 광고를 보고 그보다 긴 1년 2개월이면 B2 시험 정도는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럽언어공통 기준에 따라 A1-A2-B1-B2-C1-C2로 나눠지는 레벨에서 입학원서를 쓸 수 있는 등급은 B2, 입학 전까지 달성해야 하는 등급은 C1 또는 C2이다. 즉 B2나 C1은 독일인 중고등학생 정도와 견줄 수 있는 언어구사능력인 것이다. 시험 유형을 파악해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말하기 시험이 문제였다. 약 1년 동안 독일어 공부를 했지만 여전히 글을 읽으면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 해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간단한 문장도 문장성분을 재조합하는 사고회로를 거쳐야 하니 입에서 자연스러운 독일어가 나오지 않았다. 교재를 볼 때를 제외하고는 독일어를 접하질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일의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공부를 병행할 체력과 정신력이 모두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2021년 새해가 밝은 후에도 코로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변이 바이러스와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는 확진자 수 때문에 하늘길은 굳게 닫혔다. 독일의 대학교들도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4월에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10월에 오프라인 수업이 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위보다도 해외생활과 경험이 더 중요한 나에게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강의를 수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보다, 좀 더 미래를 길게 내다보기로 했다. 그렇게 대학원 지원 시기를 1년 미뤘다. 






원서 접수까지의 기간이 1년 생겼지만 B2 시험 계획까지 1년 후로 미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1년 동안 공부에 손을 놓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나의 게으름과 시험 결과를 모두 붙잡을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B2 시험 분할 응시 작전. 대부분의 언어 시험이 그렇듯, 공인 인증 독일어 시험도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네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전에 치렀던 B1 시험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네 영역을 동시에 치러야 해서 각 영역의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점이었다. 언어 능력이 자연스럽게 골고루 발달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나마 독일어를 듣고 말할 수 있었던 학원 오프라인 수업은 문을 닫고, 인강으로 독학을 하면서는 독해력만 새 발의 피만큼 향상되었을 뿐, 말하고 쓰는 능동적인 영역을 적절히 계발시키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독일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이 아직 불가능한 내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는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 영역에 자주 출제되는 형식이나 구문을 외우는 등 효과적으로 답을 맞힐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는데, 나의 단기 기억력은 내용이 많을수록 심한 오류를 범하곤 했기에 가능한 시험공부의 범위를 축소해야 했다. 


다행히 내가 치르는 Goethe-Zertifikat 시험은 영역 선택 응시가 가능했다. 대신 4개의 영역을 동시에 치르는 것보다 다른 날 각각 치를 때의 응시료가 더 비쌌다. 그래도 불합격하고 재시험을 보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한 영역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시험은 1년에 4번 정도 열리고, 그것도 코로나로 인해 일정이 축소되었다. 그래서 나는 8월에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치고, 10월에 쓰기, 다음 해 2월에 말하기 시험을 보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렇게 되면 원서 접수 기간인 1년 후의 4월까지 응시 자격 요건을 갖출 수 있었다. 






일정에 여유를 만든 이후로 부담을 좀 내려놓고, 학습지 공부를 통해서 독일어 공부에 다시 재미를 붙이려 했다. 하루에 한 장도 귀찮아서 몰아서 할 때도 있었지만 환급 프로그램을 동기부여 삼아 꾸준히 공부했다. 시간이 많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7개월이라는 시간은 국수 말아먹듯 후루룩 지나가버렸지만...


그저 조금 여유를 부렸을 뿐인 것 같은데, 읽기와 듣기 시험이 코앞에 닥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합격해야 한다는 마음을 담아 B1 시험 때는 비싸서 사지 않았던 시험 대비 문제집도 구입했다. 시험을 보는 것처럼 시간을 설정하고, 모의고사를 풀고 채점을 했다. 빨간색 비가 쏟아졌다. Lesen(읽기) 영역은 그나마 합격선을 넘는 60점대 후반, 70점대 초반 점수가 나왔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Hören(듣기) 영역이 문제였다. 50점대 후반, 60점대 초반이었다. 이대로라면 합격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시험 전 일주일은 출퇴근 시간에도, 회사에서 생각이 필요 없는 단순 노동을 할 때도 독일어 듣기 파일을 계속 재생했다. 진작 이렇게 살았으면 이미 독일어 고수가 되었겠다... 공부의 왕도를 이미 알고 있지만 닥치지 않으면 절대 하지 않는 나를 아무리 한심하게 생각해도 소용없었다. 그저 이제 더는 믿을 수 없는 나의 벼락치기 능력에 다시 한번 내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찾아온 시험 날, B1 시험에 실패한 지 정확히 1년 후에 남산의 시험장으로 돌아왔다. 이번 시험은 디지털 방식, 즉 지필시험이 아니라 컴퓨터에 정답을 입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답안지에 마킹할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동안 문제집이나 교재의 문제를 풀 때, 중요한 단어에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며 문제를 풀어왔었다. 그런데 화면에 떠 있는 문제에는 그렇게 표시할 방법이 없었다. 시험 전에 주어지는 빈 종이에 메모를 할 수는 있었지만 해당 문제 바로 옆에 표시하는 것보다 직관적이지 않아서 훨씬 비효율적이었다. 오히려 내 메모가 문제의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메모를 추가해야 하는데 시간이 더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합격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읽기 영역의 문제가 내 예상보다 너무 어려웠다. 


듣기는 더 가관이었다. 헤드폰으로 들리는 음성은 너무 빨라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1년 8개월 전, 학원 첫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가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 들렸다. 내가 그동안 공부한 언어가 맞는지 의문이었다. 한 문제 한 문제 넘어갈수록 웃음만 나왔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저 끌리는 숫자를 클릭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또 벌을 받는구나... 시간을 1년이나 더 늘렸는데도, 또 탱자탱자 놀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나는구나... 나는 정말 고쳐서 쓸 수 없는 노답 인간이다... 1년 전의 데자뷔처럼, 푸른 잎을 가득 드리운 나무를 아래 두고 남산을 터덜터덜 내려왔다.






몇 주 후 시험 결과 발표 날이었다. 두 영역 모두 재시험을 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제발 읽기만이라도 합격하면 좋겠다... 제발... 기도하며 시험 결과를 알려주는 인터넷 페이지를 열었다. 어디 보자... Lesen은 67점, 다행히 합격이었다. 걱정을 가득 안고 듣기 영역의 결과를 클릭했다. 



악! 


소리를 지르자 산이 방에서 뛰쳐나왔다. “왜! 무슨 일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찍기 신이 내렸나? 심지어 59점도, 61점도 아닌 정확히 60점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60점. 90점이나 100점과 똑같은 합격증을 받을 수 있는 점수였다. 


다시 비싼 시험비를 들여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감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이 합격증이 자랑스럽진 않았다. 실력으로, 능력으로 얻은 점수가 아니었다. 그저 9만 원을 아낄 수 있는 운일뿐이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찍기 운... 


10월에 치른 쓰기 시험에서도 고만고만한 67점을 받아 통과했다. 남은 건 단 하나. 버섯을 먹고 이빨 달린 꽃을 지나 식인 물고기를 피해 도착한 곳에서 마리오가 만나는, 불 뿜는 쿠파 같은 무시무시한 끝판왕. 바로 말하기 시험만이 활활 타오르는 다리를 앞에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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