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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05. 2023

원어민 선생님과의 1:1 온라인 수업

나를 공부하게 하는 사람들

환급 프로그램과 산의 채찍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 직접 대면해야 하는 선생님과 학우들이 던지는 눈초리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한번 잡힌 공부 습관이 그냥 바뀌진 않는다. 나에게 공부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 그 수단은 ‘해야만 하는 일’이 되고, ‘해야 하는 일’의 동의어는 ‘하기 싫은 일’이다. 공부를 하려고 딱 마음먹고 책상에 앉았을 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공부 안 하고 뭐 해?”라고 하면 갑자기 모든 의욕이 와르르 무너져 “안 해!!!”하면서 침대로 뛰어드는 것처럼. 남이 하라고 해서 하든, 내가 스스로 정하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하기 싫은 공부를 그나마 하게 만든 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선생님. 좋은 선생님, 재밌는 선생님과의 수업은 그 자체로 즐거워서 무한대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선생님을 보고 있는 게 좋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고,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비인간적이고 학생들을 찍어 누르려고 하는 선생님의 과목은 이겨먹기 위해서 분노와 자존심을 동력 삼아 공부하기도 했다. 따뜻한 마음도, 지식도 없는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교복 셔츠 안으로 이어폰을 넣어 몰래 음악을 듣거나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이팟으로 <그레이 아나토미>를 봤다. 그 와중에 칠판과 책 속에 있는 화면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듣는 척은 했다. 수업을 안 들은 티를 낼 수 없어 시험 기간에는 또 열심히 교과서를 읽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상대의 ‘눈치’를 보고 ‘시선’을 신경 쓰는 방식이었다. 사랑받기 위해서, 누군가의 자만심을 꺾기 위해서, 또 너무 큰 모멸감을 주지는 않기 위해서. 나의 공부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니까 다 커서 공부하는 지금도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필요한 거다. 숙제를 하지 않았을 때 실망하는 누군가를 보지 않기 위해 숙제를 하고, 대답을 잘했을 때 기뻐하는 누군가를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나는 그런 이들이 없을 때 여전히 드라마만 보기 때문이다. 






두 달간의 독학(드라마 보기, 독일어 드라마 아님)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학원에서는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일상에 발맞춰 온라인 1:1 원어민 강좌를 열었다. 인강으로는 어려운 말하기 연습을 추가로 하고 싶은 학생들을 위한 수업이었다. 학원에서 하던 오프라인 수업처럼 2시간짜리 강좌는 아니었지만 20분 동안 원어민 선생님과 화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 독일어 공부에 다시 ‘사람’이 생긴 것이다. 


또 호기롭게 수강신청을 했지만 첫 수업을 앞두고 긴장이 몰려왔다. 한국말 말귀도 종종 잘 못 알아듣는 나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깨끗하지 않은 소리를, 특히 외국어를 직접 대면하는 상황에서보다 훨씬 잘 못 알아듣는다는 걸 전화영어를 하며 깨달았었다. 고작 10분짜리 전화영어를 할 때도 매번 전화를 받기 전에 심장이 날뛰었는데 독일어로 1:1로 20분 동안 말을 해야 한다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모니터 너머의 선생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순 없었기에 굳은 얼굴에 입만 웃고 있는 무서운 모습으로 첫인사를 나누었다. 다정한 ‘엘리’는 왕초보에서 초보로 겨우 넘어온 나를 위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어눌한 독일어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엘리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단어를 하나씩 말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알아들어도 대답을 독일어로 하는 게 문제였다. 머릿속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났는데, 그 말이 입으로 나오질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에 독일어 어휘력이 너무 빈약했다. 배고픈 갓난아기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우는 게 이런 마음일까. 그냥 나도 우앙! 하고 울고 싶었다. 


어찌저찌 어버어버하며 20분이 지났다. 엘리는 끝까지 상냥하게 수업을 마무리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온몸에 진이 빠져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나의 허접 독일어와 긴장해서 어쩔 줄 모르는 바보 같은 모습을 들킨 건 엘리뿐만이 아니었다. 7평짜리 원룸 오피스텔, 그곳은 독립된 공간 따위는 없었다. 산이 옆에서 모든 걸 듣고 지켜보고 있었다. 


“와, 진짜 대박이었다.”

“왜.....”

“이제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래도 4달 동안 독일어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학원이 문을 닫은 후 두 달은 물론 했다고 하기도 그렇지만... 






무언가 잘하지 못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나는 첫 수업 이후로 다시 의지에 불타서 매일 2시간씩 꾸준히 공부를 했고, 수업이 끝나는 2달 후에는 더 이상 긴장하지 않고 쉬운 문장을 말할 수 있었다.로 끝나는 희망찬 이야기를 전하고 싶지만 반쪽짜리 완벽주의자, 잘하고 싶지만 게으른 나라는 인간은 수업 내내 꼼수를 썼다.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할 내용을 노트북 메모장에 미리 열심히 적어놓은 후에 수업 중에 읽다시피 말한 것이다. 말하기를 연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창피한 마음이 앞서 결국 무익한 시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두 달 후에도 내 프리토킹 실력은 제자리였지만 다행히도 이 수업에서 얻은 게 있었다. 바로 엘리와의 인연. 나의 첫 독일어 원어민 선생님이자 나의 첫 독일인 친구가 된 엘리는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고 독일에 오게 될 때까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에 사는 독일인과 독일에 가고 싶은 한국인으로서 대화가 잘 통했고, 소소하더라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


결국 이번에도 사람이 나를 계속 공부하게 했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의 힘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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