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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02. 2023

게으른 인간을 위한 환급 프로그램

돈이 나를 공부하게 할 지어니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모든 대면 활동이 금기시되고 학원도 문을 닫자, 막막해졌다. 그렇지만 독일어 공부의 심지에 방금 막 붙은 불을 꺼뜨릴 순 없었다. 동시에 알고 있었다. 내 불은 너무 조그맣고 약하다는 것을. ‘피곤’과 ‘귀찮음’이 후- 하고 살짝만 바람을 불어도 그 불은 휘익-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질 거였다.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을 처단할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진 녀석이. 


우리처럼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들을 잡아두기 위한 또 다른 유혹. 바로 환급프로그램이다. 유난히 외국어 공부에 있어 이 ‘환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업체들이 많은데, 그건 다 나 같이 돈 좋아하면서 게으른 사람들이 무진장 낚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장에의 욕구는 강하면서 체력과 의지력이 부족하고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동기와 강제성으로 스스로를 묶어두려고 한다. 거기에 게으름을 이겨낸 후의 보장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환급 프로그램이다. 


내가 선택했던 강좌는 주중에 인터넷 강의로 독학 후, 일주일에 한 번 오프라인 수업에서 선생님과 학우들과 함께 그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오프라인 강의와 온라인 강의를 따로 결제해야 했다. 다른 인터넷 강의 기업이 그러하듯이 여러 가지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A1, A2, B1 레벨의 모든 강좌를 묶어서 판매하고, 수강 신청일로부터 9개월 내에 B1 어학시험에 합격하면 전액을 환급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수강료는 백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지만 나의 계산법으로는 ‘12개월 할부로 하면 한 달에 십만 원도 안 되니까 괜찮은데?’였고, 그에 이어 ‘합격하면 그냥 무료로 공부하는 거잖아?’에 이르러 클릭 몇 번으로 그 늪에 발을 퐁당 담가버렸다. 


사실 고민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에어팟을 준다는 광고에 혹해 영어 회화 인강을 결제해 놓고, 고작 몇 번 사이트에 접속하고는 1년 수강권을 허공에 날려 버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독일행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고, 오프라인 수업이라는 추가적인 강제성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외치는, 난데없는 긍정 대마왕이 내 지갑을 열어버렸다.


그런데 그 오프라인 수업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나를 책상 앞에 앉히는 건 ‘돈’ 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던 수업이 사라지자, 우리 집에 사는 공부 메이트는 순식간에 내 손을 놓아 버렸다. 어차피 본인은 어학 성적이 필요한 게 아니니 정말로 독일에 가기 전에 조금만 공부하면 된다는 게 요지였다. 환급도 어차피 나만 시험에 통과하면 받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본인은 집에 와서 뒹굴거리면서 나에게는 채찍을 휘두르는 자로 포지션을 바꿨다. 서로 놀자고 꼬드기던 때는 장단이 잘 맞았는데 오히려 이제는 내가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려고 하면 곧바로 으름장을 놨다. 


“어허, 어디 침대로 기어들어와. 저기 책상에 가서 앉아!”

“아니, 나 지금 너무 배부르고 힘들어서 일단 좀 쉴래...”

“어허, 안 돼. 강의 하나 듣고 와.”

“아니, 30분만 쉬었다 한다니까?”

“어허, 강의 30분 듣고 쉬어!”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날은 같이 공부하지 않고 잔소리만 하는 그에게 원망과 짜증 폭격을 왕창 퍼붓기도 하고, 어떤 날은 시무룩한 얼굴로 책상에 앉으면서 그렇게 겨우 교재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공부하고 돈도 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어디 있다고. 이걸 받으면 한 달이라도, 보름이라도 회사를 빨리 관둘 수 있다. 그래, 하는 거다... 하는 거야... 독일 가야지...’


그렇게 의지력을 불태웠다. 그래. 내가 이걸 해내면 백만 원이 생기는 거다. 백만 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야... 




*<알파벳도 모르던 제2외국어 공부기>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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