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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26. 2023

독일에 와서 다시 느낀 문맹의 기분

간단한 문장도 잘 말하지 못하는 2년 차 독일어 학생

아주 오랫동안 꿈으로만 간직하던 일이 현실이 될 때, 누군가는 가슴 벅차 감격하고, 누군가는 기대와 다른 세상에 실망한다.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었다. 


한국을 떠나는 날 아침,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내 생각한 건 이상하게도 ‘죽음’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던 그날 아침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당시는 코로나 백신 3차 부스터샷 접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였고, 동시에 매일 확진자 수를 경신하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우리나라보다도 확산의 기세가 꺾이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간다는 건 스스로 죽음의 소굴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산과 나는 둘 다 아직 코로나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 어두운 미래가 펼쳐졌다.



S#1. 독일의 한 작은 집 / 밤


침대에 누워 있는 나. 땀을 뻘뻘 흘리고 죽을 듯이 기침을 한다. 기침을 하다 손을 펼쳐보면 피가 가득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온다. 통화를 시도하다 결국 포기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 옆에 누워 있는 산. 마른 얼굴이 앙상하고 얼굴이 시꺼멓다. 역시나 심하게 콜록거린다. 끊임없이 기침을 하다 순간 ‘컥’하는 소리가 들린다. 숨을 거둔 산의 얼굴 클로즈업. 


S#2. 한국의 한 병원 장례식장 / 낮


검은 상복을 입고 퀭한 얼굴로 울다 지쳐 멍하게 앉아 있는 나. 시부모님이 오셔서 나를 부여잡고 흔들며 때린다. “니가 우리 아들을 죽였어!!! 그러게 왜 잘 살고 있던 애를 독일에 데려가서!!! 아이고... 아이고...”


이러면 안 되는데......

 






3년 만에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여행의 설렘을 가득 안고 도착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이곳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설레기보다는 막연한 걱정이 함께 앞섰다. 신기하게도 3년 전과 달라진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3년 전에는 알 수 없는 알파벳의 향연이던 그 글자들이 보였다. 영어 ‘Exit’과 나란히 놓인 독일어 ‘Ausgang’이 보였다. 수많은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독일어로 나오는 안내방송, 사람들의 말소리. 영상이나 듣기 파일, 책으로만 만나던 독일어가 내 주위를 둘러쌌다. 정말로 독일어의 세상에 도착한 것이었다.



처음 왔을 때와 달리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의 언어, 현실의 언어가 된 독일어는 만만치 않았다. 현실의 안내방송은 주위 소음과 어우러져 듣기 파일보다 몇 배는 알아듣기 어려웠고, 현실의 안내문은 모르는 단어 투성이라 이 문장들이 독일어라는 것만 이해할 뿐 내용은 거의 파악할 수가 없었다. 1년 동안 독일어를 배웠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남들과 똑같이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고 말았다.






여자저차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근처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독일어를 뱉지 못한 아쉬움을 털어낼 기회였다. 슈퍼 계산대에서는 긴 대화가 오갈 일이 없으니, 간단한 문장을 실전에서 연습해 볼 작정이었다. 


물건을 사고, 캐셔가 독일어로 금액을 말했다. 유로에 익숙하지 않아 잔돈을 잘 거슬러 받았는지 바로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영수증을 받아서 나중에 확인해보려고 했다. 그러려면 “영수증 주세요.”를 독일어로 말해야 했다. 


“영수증 주세요.”는 어렵지 않았다. A1 레벨에서 나오는 문장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후, 계산을 하고 싶을 때 하는 말로 아주 기초 단계에서 배우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계산대에서 현금을 지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장을 뱉었다.


“Rechnung, bitte. (영수증 부탁합니다.)”
“Wie bitte? (네?)”
“Rechnung, bitte. (영수증 부탁합니다.)”


캐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인상을 썼다. 당황스러웠다. 왜 못 알아듣지? 내 발음이 그렇게 구린가? 독일어 R 발음은 영어와 달리 목구멍을 긁어서 ㄱ와 ㅎ사이의 느낌으로 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이상하게 발음한 건가? 


다행히 그때 영수증 프린터에서 영수증이 출력되어서 손으로 가리켜 영수증을 받았다. 의기소침해졌다. 이렇게 쉬운 표현도 잘 못 말하다니... 


집에 와서 Rechnung을 검색해 발음을 다시 듣고 몇 번이나 반복해 따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계산대에서 “Rechnung, bitte.”를 외쳤다. 어제와 다른 캐셔였지만 역시나 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오기가 생겨 바로 옆의 빵집에서 빵을 사고, 또 “Rechnung, bitte.”를 말했다. 잘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보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랬더니 점원이 잠깐 생각하더니, “Ah, Rechnung!” 하면서 영수증을 뽑아줬다. 알아들은 건 기뻤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이 단어의 쓰임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맞지 않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슈퍼 계산대에서 앞사람이 계산하는 것을 유심히 봤다. 그리고 캐셔의 멘트를 귀 기울여 들었다. 계산이 끝난 후, 캐셔가 고객에게 어떤 단어를 말했고, 이어서 영수증을 줬다. 그런데 그 단어는 ‘Rechnung’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발음의 어떤 단어였다. 


집으로 돌아와 사전에서 ‘영수증’을 검색했다. ‘Rechnung’, ‘Quittung’, ‘Beleg’, ‘Bon’, ‘Kassenzettel’ 같은 단어들이 나왔다. 구글에서 좀 더 자세히 검색해 본 후, 슈퍼에서 물건을 사고 받는 영수증은 ‘Kassenbon’, ‘Kassenbeleg’, ‘Kassenzettel’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계속 엉뚱한 단어를 말하면서 못 알아듣는 이유를 내 발음에서 찾고 있던 것이었다. 


독일의 병 보증금(Pfand) 영수증. 자세히 보면 여기도 Bon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Rechnung’은 도대체 뭐였을까? 이 단어는 정확히 말하자면 ‘계산서’, ‘청구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였다. 우리는 금액이 적힌 모든 종이를 ‘영수증’이라고 부르다 보니 내 맘대로 같은 단어일 것이라 생각한 거다, 독일어는 의미를 아주 정확하고 세세하게 나누는 언어라 우리의 언어로 같은 단어일지라도 독일어에서는 다른 단어인 경우가 많다. 내가 ‘영수증’이라고 배웠던 ‘Rechnung’이라는 단어는 식사를 한 후 금액을 확인하기 위해 받는 ‘계산서’이거나, 매달 지불하는 인터넷 요금 등의 ‘청구서’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즉 돈을 내기 전에 받는 종이가 ‘Rechnung’이고, 돈을 내고 나서 받는 영수증은 돈을 냈다는 증명서, ‘Beleg’을 사용하거나 프랑스어 ‘Bon’, 종이로 된 쪽지, 전단지 등 포괄적인 의미로 쓰는 ‘Zettel’을 계산대 ‘Kasse’와 결합해서 쓰는 것이었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단어의 쓰임도 정확히 모르고 독일에서 살겠다고, 심지어 대학원을 다니겠다고 무작정 왔다니.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모든 간단한 일들이 두려움이고 도전이었다. 모국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하던 일들, 그저 생활을 위한 물건을 사는 일조차 매번 가슴이 떨렸다. 


비록 B2 시험에 턱걸이로 합격했지만, 내 수준은 아주 간단한 말도 뱉지 못하고, 물건의 가격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왕초보였다.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좌절했던 독일어 첫 수업 날이 다시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3년 전, 알파벳도 읽을 줄 모르던 때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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