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튼 Nov 11. 2019

십년지기는 무슨 사이인가

오징어입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


다수의 횡포가 극에 달하는 시점은 약속 장소를 잡을 때다. 같은 동네에 사는 세 명과 다른 동네에 사는 한 명은 다수의 동네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들이 십년지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일반적인 다수와는 달리 단 한 명의 동네인 사당에서 보기로 했다. 그건 십오 년째 하나뿐인 동네 번화가가 질려서도 아니요, 숨은 맛집 찾기가 귀찮아서도 아니다. 오로지 십 년 이상 우려 온 곰국같이 뽀얀 우정 때문이다.


사실 우정은 핑계다 사당은 몸만 가면 돼서 너무 좋다^^


숭고한 우정을 소중히 간직한 채 다수인 우리는 가만히 앉아 소수의 맛집 추천을 기다렸다. 우리에겐 사당까지 간다는 무기가 있었으므로 핑거 프린세스 자격이 충분했다. 영원한 비동네친구이자 사당역 그녀는 분주하게 맛집 url을 퍼다 날랐다. 후보는 스페인 음식점과 횟집이었는데 역시 우리 취향은 스페인이었다. 양천구민인 나는 양천구를 벗어나도 양천구를 기준으로 거리 계산을 하는 습관이 있다. 강남역에서 볼 일을 보고 사당역을 가는데 한 시간의 여유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서초구민의 셈법이 아닌 양천구민의 셈법밖에 없었다.

강남에서 사당까지는 십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십년지기의 짜릿함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껏 땡깡피울 수 있다는 편안함에서 온다. 나는 당장 사당역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30분 일찍 나를 만나러 올 것을 당당히 요구했다. 그녀는 마침 밖에 나와있으니 출구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양천구민의 셈법밖에 모르는 나는 일찍 왔는데도 동작구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동작구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당역 십년지기는 내가 길치인 걸 잘 안다....


한 치의 공백 없는 만남에 상기된 나는 분명 안내표지를 보면서 걷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2번 출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당역은 눈을 뜨고 있어도 출구가 사라지는 곳이었다. 잠시 카톡을 접어두고 두리번대다가 12번 출구는 뒤쪽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앞, 뒤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데 항상 고르는 것마다 오답인 내가 싫어졌다. 나는 곧 12번 출구에서 2019 F/W 가을 신상스러운 브라운 체크 자켓을 입은 사당역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체크 자켓은 그녀만큼 반가웠다. 왜냐하면 나도 며칠 전 새로 산 자켓을 입었기 때문이다. 추워지기 전에 열 번 이상 입어야 해서 마음이 좀 급한데 사당역 그녀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역시 십년지기라는 쉬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무사히 스페인 식당에 도착했다. 양천구민 두 명이 도착할 때까지 술과 간단한 안주 하나만 시키기로 했다. 샹그리아를 포도주스처럼 들이키며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샹그리아는 솔직히 좀 맛있다...


그녀는 최근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2주 뒤면 100일이라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에 돌연 이름 모를 감동이 몰려왔다. 게다가 여느 커플들처럼 사랑싸움도 했다는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꼭 껴안을 뻔했다. 갑자기 지난여름 수제 맥주 집에서 밖에 나가 전화를 받느라 한참을 돌아오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 그녀의 맥주는 조금 많이 남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맥주는 중요하지 않다.

지난날의 그녀는 좀처럼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처럼 사랑에 빠진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100일 날 100원을 보내주기로 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아주 잘 먹었다. 문어 감자요리를 아주 복스럽게 먹어댔다. 평소 조금밖에 안 먹는 그녀에게 익숙한 나는 의아했지만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뻔한 결론을 내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뭘 해도 사랑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에 빠진 십년지기는 문어와도 곧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


길을 헤매던 양천구민 두 명이 드디어 도착해서 우리는 아껴둔 메인 요리를 시켰다. 오징어 먹물 빠에야와 이베리코 돼지 스테이크였다. 스페인에 가본 적은 없지만 너무나 스페인스러운 메뉴에 설렜다. 먹물 빠에야는 그릇도 밥도 홍합도 다 검은색이어서 밥이 잘 안보였다. 홍합을 몇 번 두들긴 다음에야 밥을 뜰 수 있었다. 사랑타령을 하며 샹그리아를 포도주스처럼 마신 탓에 술은 금방 동났다. 우리는 새로운 와인을 시켜야 했다.

선택의 다양성이라는 건 가끔 우리를 괴롭게 한다. 사당의 스페인 식당에는 메인 요리보다 와인 종류가 더 많았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 십년지기에게 프랑스 스타일로 잘 골라보라고 했다. 스페인 식당이지만 같은 유럽이니까 통하겠지? 결국 우리는 행사 중인 와인을 어렵게 골랐다.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지 옆 테이블에서도 같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샹그리아처럼 마냥 달지 않고 진중한 맛이 나는 게 과연 프랑스 유학 다녀올 만한 맛이었다.


프랑스의 맛은 좀 썼다...

프랑스 유학파 십년지기는 얼마 전 회사에서 최연소 팀장이 됐다. 아직 평직원인 우리는 그녀를 팀장님이라 칭하며 굽신거렸다. 최연소 팀장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 케이스를 자랑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우리가 핸드폰 케이스가 너무 팀장스럽다고 해서 충격을 받고 고심해서 새로 샀다고 했다. 팀장님의 새로운 케이스는 옴팡이였다. 옴팡이 쓰는 팀장님이면 완전 힙하진 않지만 나름 신세대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서른파티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연말이 됐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울적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파티 계획을 꾸며야 했다. 제일 먼저 서른파티냐 서른하나파티냐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나는 <90년생이 온다>도 실은 90년대생을 의미하는 거라고 앞으로의 30대 파티는 서른파티로 통일하자고 주장했다. 다른 십년지기는 그게 뭐냐고 우린 서른한 살이 되는 거니까 서른하나파티가 맞다고 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서른파티라는 말을 고집하는 건 서른한 살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구차한 서른하나가 되긴 싫어서 서른하나파티가 맞다고 정정했다.

행사용 와인을 들이키는데 살라미랑 페퍼로니같은 햄 친구들과 사과가 나왔다. 알고 보니 행사에 이 메뉴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는 프랑스 유학파 십년지기의 센스에 감탄했다. 살라미는 참 짰다. 그리고 살라미의 염도에 비하면 사과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과를 아끼기 위해 물을 좀 달라고 했는데 돌연 병따개로 따는 물이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폐쇄식 생수였다.


돈 내라는 말이 제일 무서운 서른^^ 공짜가 좋은 나이 서른


우리는 불안감에 빠져 사당 한 복판에서 이 물이 유료인지 아닌지 열렬히 토론했다. 십년지기 중 한 명은 이 물이 유료라면 여긴 정말 정통 스페인식이라고 했고 나는 물을 아껴먹으라고 십년지기들을 쪼았다. 어처구니없는 나의 요청에도 십년지기들은 알았다며 각자의 방식으로 물을 아꼈다. 잠시 한눈 판 사이 살라미 옆에 있던 사과가 다 사라져 있었다. 우리의 노력이 무색하게 친절한 주인장은 물을 리필해주었다. 아직도 그 물이 유료인지 아닌지는 미궁 속에 빠져있다.

사랑타령을 하며 문어를 섭취한 우리와는 달리 양천구민 십년지기 두 명은 배고픔을 호소했다. 우리는 결국 와사비오징어튀김과 크림 파스타를 또 시켰다. 어디선가 주인장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내가 사랑에 빠진 사당역 그녀를 볼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4인 5메뉴 2와인이라면 주인장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양천구의 십년지기들은 조심스레 와사비 오징어튀김을 베어 물었다. 그건 와사비를 아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조심성이었다. 어디서 와사비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양천구의 십년지기들은 오징어를 신중하게 씹던 와중 와사비 소스를 발견했다. 나는 와사비 겁쟁이들을 놀릴 구석이 생겨 급 기뻐졌다. 그나저나 사랑에 빠진 십년지기는 문어부터 크림 파스타까지 쉬지 않고 잘 먹었다. 정말 보통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장님이 과일안주를 들고 나타났다. 서비스라고 했다. 배부르다고 손사래를 쳤는데 아까 그 사과가 있었다. 아삭아삭한 게 여전히 맛있었다. 사과는 또 제일 먼저 없어졌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사과 깎아달라고 해야겠다고 했더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휴 우린 아직 서른이지만 엄마가 깎아주는 사과가 제일 맛있다.


외장형 와사비소스와 서비스 과일안주 사장님 이 사과 어디꺼에요ㅠ


십오만 원은 나오겠네 하고 배를 두드리며 스페인 식당을 나왔다. 십사만 오천 원이 나왔다. 놀랍도록 정확한 나의 포만감 지불법에 희열을 느꼈다. 많이 먹었지만 십년지기로서 시시하게 일차에서 헤어질 순 없었다. 사랑에 빠진 십년지기의 추천으로 요새 핫하다는 맥주집에 갔다. 과연 핫해서 이름을 적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동안 우정에 금이 가지 않도록 추운 십년지기에겐 머플러를, 방전이 예상되는 십년지기에겐 보조배터리를 꽂아주었다.  

할머니가 만들었다는 맥주는 살얼음이 껴서 추운 십년지기를 더 춥게 만들었다. 힙스러운 술집에 와도 검색 한 번 해볼 생각 없는 우리는 안주로 오징어입을 시켰다. 이유는 대표 메뉴라고 적혀있어서였다. 우리는 서른이지만 여전히 음식점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 하지만 오징어입은 보통 입이 아니었다. 오징어입은 십년지기만 같이 먹을 수 있는 안주였다. 먹을 때마다 오징어 이빨도 뼈도 아닌 걸 우악스럽게 여러 번 뱉어내야 했다. 나는 썸 탄지도 오래된 주제에 썸 타는 남자랑 오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라고 능청을 떨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린 믿었다 대표메뉴라는 그 말...


점점 대화 주제가 고갈되는 것 같아서 고민상담소를 열었다. 나는 십년지기의 고민을 듣다가 속이 답답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십년지기는 몇 달 전 얘기지만 그땐 누구한테 말하기 그래서 네이버에 검색했다고 했다. 세상에는 검색해도 정답이 안 나오는 일들이 참 많다. 그럼에도 답답할 때마다 네이버에 검색한 적이 너무 많은 나는 십년지기가 너무 나같아서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진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크게 웃고도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건 십년지기의 특권이다. 사실 난 네이버에 보고 싶은 사람 이름을 쳐본 적도 있다.

오징어입은 십년지기라도 먹기 힘든 안주였다. 이 맥주집은 환경과는 담쌓은 곳이었는데 쇠젓가락이

아닌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쓴다. 오징어입이 단 두 개 남을 때까지 한 명은 젓가락을 뜯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 술집에선 짜파구리를 꼭 먹으라던 인친(a.k.a. 인스타 친구)의 간곡한 조언을 흘려들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십년지기란 먹고 먹고 먹고 또 시켜도 부끄럽지 않은 사이다. 결국 우리는 짜파구리마저 시켰다. 짜파구리는 오징어입의 존재를 부정하는 훌륭한 맛이었다. 곧 오징어입을 시킨 십년지기는 오징어입 역적이 되었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이 집 대표메뉴는 짜파구리에요;;


어엿한 서른이지만 각자의 부모님에겐 애기나 다름없는 우리는 막차시간을 준수하는 청춘들이다. 짜파구리가 남았어도 어쩔 수 없다. 짜파구리를 먹다가 지하철이 하나도 안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동작구 소속 짜파구리를 뒤로 하고 양천구민 세 명과 동작구민 한 명은 헐레벌떡 술집을 나왔다. 배가 터질 것 같은 게 인당 5만 원 치는 족히 먹은 것 같았다. 9월생 십년지기와 10월생인 나는 자고 일어나서 전 날 식사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배부른 생일선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가 혹은 습작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