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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Dec 04. 2019

간 때문이야

배달의 민족보다 쿠팡이츠를 선택한다면 그건


떡볶이를 시키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냥 떡볶이니까 시킨다. 퇴근길, 날은 추운데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손을 덜덜 떨면서 자연스럽게 따뜻하고 끈적한 떡볶이를 떠올렸다. 저녁 메뉴를 정하는 건 쉽지만 어디서 시킬지 고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점도 높아야 하고 배달도 빨라야 하고 가격도 너무 비싸면 안 된다. 요리를 해 먹을 기운과 실력만 있다면 그게 훨씬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의 개노답 저질체력 똥손 직장인. 가진 것은 소량의 돈과 열 손가락뿐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배달이다. 요즘 나의 배달 생활은 조금 문란해졌다. 배달어플이라곤 오로지 배민밖에 모르던 배달 외길인생인 나에게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쿠팡이츠. 음식까지 로켓배송 하겠다는 쿠팡의 패기에 코웃음 쳤지만 로켓처럼 날아온 떡볶이, 꽈배기, 초밥, 버블티 앞에서 나는 그만 호구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하루에 몇 번까지 시킬 수 있나 날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떡볶이를 먹을 때 순진하게 떡볶이만 원하는 사람은 없다. 지성인이라면 순대와 튀김 정돈 추가하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떡볶이를 시킬 땐 이유가 없지만 순대를 시킬 때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 순대는 목적이지만 나에게 순대는 수단이다. 내가 순대를 시키는 건 오로지 간을 먹기 위해서다. 슬프게도 난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는다 해도 느끼해서 3개 이상은 못 먹는다. 하지만 대한민국 어느 분식집에서도 순대에 간 only 옵션은 없다.

그렇게 배달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간을 양껏 먹어본 적 없는 나는 항상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요청사항을 적는 버릇이 생겼다.

[순대 간만 주세요 조금이라도 괜찮아요 순대는 안 먹어서 남아요ㅠ 웅앵웅...]

대부분의 분식집 사장님들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요청사항을 패스한다. 지금껏 간을 먹기 위해 남긴 순대를 생각하면 천만 돼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정도다. 그게 아니면 간을 얇게 썰어 (사실 포를 뜨는 수준에 가깝다) 5개 정도 넣어준다. 어느덧 나에게 떡볶이를 시키는 일은 순대 간 랜덤박스를 시키는 일이 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떡순튀라는 곳을 발견했다. 온통 뿅뿅’떡볶이’라는 상호가 즐비한 떡볶이 춘추전국시대에 순대의 ‘순’자를 이름에 넣어주는 떡볶이 집이라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그래. 이 사장님이라면 간에 대한 염원을 알아줄지도 몰라.

쿠팡이츠의 장점은 구구절절 리뷰를 쓸 권리조차 없다는 건데 맛을 별점으로만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먹어보기 전엔 단점이 된다. 떡순튀의 평점은 4.8. 배달업계에서 이 정도면 믿을만한 수치다. 그치만 나는 백화점에서 입어보고 온라인몰에서 최저가로 구매하는 얌체처럼 떡볶이 리뷰를 엿보러 배민에 잠입했다. 배민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최소 주문금액도 거의 없고 배달 시간도 나이스하며 구구절절 리뷰에 대한 부담도 없는 쿠팡이츠를 두고 배민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몸이 되었다.

결국 이름부터 남다른 떡순튀에서 떡순튀를 시켰다. 오늘도 요청사항은 진짜 조금이어도 되니까 순대 간만 달라고 적었다. 순대를 주셔도 안 먹어서 남긴다는 tmi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알 수 없는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다. 불길한 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주문 취소다. 음 그게 아니면 거절이다. 그래 이건 니가 원하는 만큼 간을 줄 수 없다는 거절 콜이다. 잔뜩 기가 죽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나를 반긴 건 떡순튀 사장님이 아니라 서비스 정신으로 잔뜩 무장한 쿠팡이츠 상담원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쿠팡이츠 고객센터입니다~* 요청사항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

- 네..? 요청사항이요..?

실컷 간만 달라고 쓴 주제에 진짜 간 때문에 전화하셨을까봐 부끄러워서 살짝 못 알아들은 척했다...

[네~* 고객님~* 순대 간만 달라고 써주셨는데 순대와 간 모두 원하시는 건지, 순대는 원하지 않고 간만 원하시는 건지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그렇다.. 전화는 정말 간 때문이었다. 그런데 쿠팡이츠 고객센터 그녀는 4,000원짜리 순대에 4,000원 치 이상의 친절함과 진지함을 쏟고 있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나는 구구절절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 그게.. 간만 주시면 되는데 제가 순대를 많이 못 먹어가지고 맨날 남고 남으면 버려야 되고 그게 너무 죄송해가지구요.. 간은 진짜 조금만 주셔도 되는데 돈은 다 낼 건데...

쿠팡이츠 그녀는 친절하지만 과연 똑 부러진 사회인이었다. 내 말이 길어지자 적당한 선에서 핵심 정보를 간파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네 고객님~*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순대는 드시지 않고, 간만 드시는 것 맞으십니까~*]

전국 순대 심포지엄이 있었어도 이것보다 진지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챈 쿠팡이츠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구차하게 말하면 들어주기나 할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4,000원짜리 순대를 위한 약 40초 간의 통화가 끝났다. 그러고 보니 쿠팡이츠 그녀는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순대 상담을 클리어했다. 확실히 프로였다. 간이라는 한 글자를 말하는 데에도 몇 번이나 푸흡댔던 나로서는 그녀의 숭고한 직업정신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취소콜도 간 거절콜도 아닌 확인콜에 황송해하고 있는데 벌써 배달원이 떡순튀를 픽업했다는 알림이 왔다. 아니 이렇게 빨리..? 떡순튀는 금방 도착했다. 받자마자 진짜 순대 간만 주셨을지 가슴이 떨려왔다. 세상에. 그건 진짜였다.


대한민국에 no순대 only간 옵션은 존재했다....


이 세상 돼지 간을 내가 다 먹는 건 아닐까 너무 미안해서 천만 돼지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비주얼이었다. 말 그대로 간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여하튼 이건 순대와 간을 진지하게 연구해준 상담원과 고객의 터무니없는 요청에 간으로 화답한 사장님이 이뤄낸 엄청난 쾌거다. 나는 누가 뭐래도 떡 덕후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간에 매진했다.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간을 보며 구구절절 리뷰를 쓸 수 없는 쿠팡이츠가 조금 아쉬워졌다.


사장님 너무 감사한데 혹시 잘못 보내신 건 아니시죠..


마침 외출했다 돌아온 노부부는 거대한 간 덩어리를 보며 놀라워했다. 엄마는 간은 귀한 거 아니냐며 시장 떡볶이집에서 간 좀 더 달라고 했다가 혼난 적 있다는 썰을 풀었다. 아빠는 남은 간을 절대 버리지 말라며 저건 정말 소중한 거라고 말했다. 간 앞에서 일심동체가 되는 걸 보니 우린 혈육이 맞는 것 같다. 결국 간을 소분해서 냉동했는데 지퍼백으로 세 봉지나 나왔다. 이쯤 되니 떡순튀 사장님이 오늘 판매할 간을 다 소진하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먹기 전과 후... 왜 안 줄어드는 건데....!!!(떡볶이는 줄었다)


만약 내게 배달의 민족과 쿠팡이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쿠팡이츠를 고를 것이고 그건 아마 간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게 어제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행복했다고 말할 것이며 그건 아마 간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게 서비스에서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소함이라 말할 것이고 그건 아마 간 때문일 것이다. 오늘 왜 이렇게 늦게까지 글을 썼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마 간 때문일 것이다. 남의 간을 홀랑 먹고 그것도 모자라 실컷 써먹은,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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