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프로 Oct 17. 2020

나의 쓸모없는 일 설명서

퇴사를 하고 셀프 안식년을 맞아 가장 먼저 시작한 쓸모없는 일은 재즈 보컬, 케이팝 댄스, 그리고 넷플릭스 자막 번역이었다. (내가 "쓸모없는 일 하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전 포스팅에서 설명하였다.) 나는 늘 새로운 경험에 욕심이 많고 관심사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통에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못한다. 피아노, 바이올린, 드럼, 사물놀이, 탁구, 배구, 배드민턴 등 시도해보았던 취미는 많지만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니까. 그런 내가 그나마 오래도록 질리지 않고 꾸준히 즐기고 있는 것이 노래이다. 번역은 왜 재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전부터 회사에서나 주변에서 번역을 할 기회가 있으면 대가가 없어도 자원을 하곤 했었다. 그중 영상 자막 번역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쉬는 동안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재즈 보컬.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노래방은 나의 최애 놀이터다. 노래를 부를 땐 전혀 지치는 줄 모른다. 중학교 때부터 내겐 언제나 노래방 크루가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면 노래방 3-4시간은 그냥 기본이다. 종종 서비스를 계속 넣어주시는 노래방 주인 분과 누가 먼저 지치나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분위기 따지지 않고 부르고 싶은 노래는 맘껏 불러도 되고, 서로의 노래에 숟가락 얹지 않으며, 노래 지분을 공평히 나눠 가진다는 암묵적인 룰을 공유한다. 현재 내 노래방 크루는 씬(서울)과 인혜&덱스터 커플(샌프란시스코)이다.


노래를 업으로 하는 삶을 꿈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실력을 직시하게 된 순간 취미로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아직 마지막 남은 0.1%의 희망까지는 버리지 못했다...) 은퇴 후 여행을 다니며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꿈을 꾼다. 그래서 안식년 동안 재즈 보컬 레슨을 받기로 했다.


레슨은 지하철을 타고 왕복 2시간이 넘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거리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 받았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힘들지가 않았다. 가끔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몸이 피곤한 날이면 레슨을 미룰까 꾀를 부려볼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레슨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한 시간의 레슨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레슨 후 아쉬운 마음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들어가서 노래를 한참 더 부르다 돌아오는 날도 허다했다 ㅎㅎ  


이 글을 쓰는 지금, 노래가 내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 다시 깨닫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온 뒤로 노래하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재즈 보컬 레슨은 한국을 떠나며 그만두었고, 여긴 부르고 싶은 노래가 생기면 스-윽 마실 나가듯 다녀오던 코인 노래방도 없다. 그나마 가끔 가던 노래방도, 일주일에 한 번 참여하던 사내 아카펠라 그룹도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대로 나의 가장 소중한 놀이를 잃어버릴 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노래할 창구를 마련해야겠다. 코노 기계를 하나 사들여야 하나...


케이팝 댄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튜브 콘텐츠는 케이팝 댄스 동영상이다. 어릴 때부터 대중가요의 안무를 따라 추는 걸 좋아했다. 학교 장기자랑에서 S.E.S., H.O.T., 신화, 룰라 등 웬만한 케이팝 댄스는 다 섭렵했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나이키와 투킥을 배운다고 나돌아 다니는 통에 엄마를 걱정시키기도 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동영상을 보며 최신 케이팝 댄스를 따라 하곤 했는데, 안식년을 맞아 제대로 시간을 할애해보고 싶었다.


사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까지 케이팝 댄스를 추러 다니는 건 조금 창피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좀 더 나이에 맞는(?) 춤을 배울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눈치 안 보고 안식년 프로젝트로 채택! 그렇게 케이팝 댄스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주 수업을 듣고 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동영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임신까지 해서 불러온 배 때문에 모든 동작을 따라 할 순 없지만 그래도 빠지지 않고 매주 일요일마다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춤을 춘다. 멈출 수가 없다! 일주일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자 현재 나의 가장 소중한 놀이가 되었다.


넷플릭스 자막 번역.

친구 중 한 명이 프리랜서 통번역가인데 집에 놀러 갔다가 넷플릭스 영상의 자막을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자막 번역을 해보고 싶었던 참인 데다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나도 따라 시작하게 되었다. 시트콤, 스탠드업 코미디, 인테리어 디자인 챌린지 등 여러 편의 자막을 번역했는데 꽤 재미있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너~어무 많이 들었다. 60분짜리 프로그램의 자막을 번역하려면 3일이 꼬박 걸리곤 했다. 내가 초짜이고 속도가 느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마감을 맞추는 일이 너무 힘들어지고, 스트레스가 되고, 안식년의 쉼을 방해하게 되면서 번역은 그만 하기로 했다.




퇴사 후 쓸모없는 일 하기 프로젝트로 시작한 일들은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고, 그 기회들로 인해 지금 내 삶은 쓸모없는 일 하기 프로젝트를 하기 전의 내 삶과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라는 뭔가 의미 있는 엔딩이 있다면 좋겠지만, 내 이야기에 그런 엔딩은 없다. 나의 쓸모없는 일 하기 프로젝트는 나의 안식년과 함께 마무리되었고, 나는 다시 직장인으로 복귀하여 전과 거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안식년 동안 쓸모없는 일들이 내게 가져다준 목적 없는 즐거움 덕분에 무엇보다 행복했고, 번아웃을 아주 많이 극복할 수 있었고,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자극을 잘 받았다 튕겨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도 생긴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좋아하는데 쓸모 있는 일들을 먼저 하느라고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던 일들을 함으로써 훗날 돌아보며 후회할 일도 없어졌고. 내겐 매우 만족스러운 프로젝트였다. :)


그나저나 내가 노래, 춤, 번역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노래하고 춤추고 번역하는 것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료시키는지.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무언가를 너무 재미있어할 때, 나는 그 이유가 항상 궁금하다. 내가 노래방에서 4시간 동안 노래 부르는 것을 너무너무 재밌어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미술 작품을 몇 시간 동안 감상하는 것이 재미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을 읽는 것이 그만큼의 재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신기하다. 이것도 일종의 운명일까?


암튼 내 인생 최애 놀이인 노래와 춤. (그리고 번역). 이 쓸모없는 일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열심히 즐길 작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번아웃과 싸우기: 쓸모없는 일 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