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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Aug 15. 2021

눈의 여왕

#브런치 공모전 :다시 쓰는안데르센 세계명작

1. 

 어느 날 악마는 사는 게 지겨워졌어요.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할 일이 많이 줄어 버렸거든요. 악마가 나서기도 전에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속이고 저주했어요. 가끔은 악마조차도 사람들의 사악함에 감탄할 정도였답니다. 악마는 인간들을 골탕 먹이고 싶었어요. 해야 할 일을 빼앗긴 것 같았거든요. 이전의 거울과는 다른 거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컴컴한 동굴에 들어가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연구했어요. 드디어 완성된 거울은 보이는 것은 전부 색이 사라지게 만들었어요. 마치 밤이 된 것처럼 무엇을 비추어도 깜깜했죠. 깜짝 놀란 사람이 다시 들여다보면 거울 속 모습은 슬며시 바뀌어있었어요. 거울은 보고 있는 사람이 가장 원하는 모습을 진짜처럼 생생하게 보여줬어요. 물론 색도 다시 돌아왔고요. 거울을 들여다보다 보면 진짜로 내가 그런 모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2.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동네에서 괴팍하기로 유명한 욕쟁이 할머니예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할머니는 언제나 큰 소리로 투덜거렸거든요. 괴팍한 할머니는 정말 나이가 많았어요. 그리고 할머니의 나이 든 모습을 싫어했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화를 냈죠. 할머니는 성격이 괴팍해진 것이 나이가 든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괴팍한 할머니와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죠. 왜냐면 괴팍한 할머니는 젊었을 때도 화를 많이 냈거든요. 악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거울로 할머니의 얼굴을 비추었어요. "할머니 이 거울 좀 보세요! 오늘 40년은 젊어 보이시네요?" 순간 거울 속에 모든 색이 사라지고 어두컴컴해졌어요. 깜짝 놀란 할머니가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자 거울 속에는 주름이 사라지고 윤기가 흐르는 40년 전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어요. 할머니가 말했어요. "내가 이렇게 보인단 말이야?" 악마가 대답했어요. "그럼요. 할머니. 정말로 이렇게 보여요." 할머니는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얼굴을 만져보았어요. 얼굴을 만지는 손끝에서 주름 자국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악마는 그 모습이 재밌어 죽을 지경이었어요. 


 "할머니, 선물이에요!" 악마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어요. 할머니는 악마가 사라진 것도 몰랐어요. 거울 속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할머니는 집까지 거울만 보면서 걸어갔어요. 다른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하마터면 길고양이의 꼬리를 밟을 뻔하기도 했죠. 집에 도착해 겨우 거울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물을 기르기 위해 우물로 향했어요. 우물물에 비친 할머니의 모습은 거울 속과 달랐어요. 주름이 깊게 파인 데다 늘 그렇듯 불만이 가득 차 있었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할머니는 커다란 돌로 우물을 막아버리고 집안에 있는 다른 거울도 전부 부숴버렸어요. 오직 악마가 준 거울만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마음을 달랬어요. 다른 곳에 비치는 모습은 싫었거든요. 


 오랜만에 벅찬 뿌듯함을 느낀 악마는 본격적으로 거울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거울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나갔어요. 사람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느라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거울을 통해서만 이야기했어요. 어떤 사람은 거울 속 모습과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걸 본 사람들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라며 너도나도 가면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악마의 거울이 소용없는 사람들도 있었죠. 바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들은 거울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이게 뭐야'라고 한 뒤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아직 거울 바깥에 재미있는 게 많았거든요. 



3.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 한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소녀의 이름은 아린이었어요. 아린는 태어날 때부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귀가 밝아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어요. 아린이는 사람은 물론 새의 말도 꽃의 언어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린이의 옆집에 사는 소년의 이름은 예준이었어요. 예준이는 말이 정말 많았어요. 궁금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거든요. 하루 종일 떠드는 예준이 덕분에 동네 어른들은 멀리서 들리는 예준이의 목소리로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 정도였죠. 아린이와 예준이는 마음이 맞아 늘 함께 다녔어요. 동네 사람들은 예준이와 아린이가 남매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린이는 말이 많은 예준이를 좋아했어요. 예준이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느껴졌거든요. 예준이도 아린이가 좋았어요. 아린이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데다 무척 영리해서 예준이가 모르는 것들도 많이 알고 있었거든요. 예준이가 유일하게 말을 멈출 때는 아린이가 하고 싶은 말을 글자로 적을 때뿐이었어요. 


 예준이와 아린이의 집은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어요. 두 집 모두 담 근처에 조그마한 마당이 있었죠. 아린이와 예준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마당의 작은 정원을 함께 가꾸었어요. 예준이가 장미를 심으면 아린이도 장미를 심고 아린이가 방울토마토를 심으면 예준이도 그렇게 했죠. 그래서 예준이와 아린이의 정원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모양이었어요. 사이좋은 예준이와 아린이도 만나지 못하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동네에 폭설이 찾아오는 겨울이었어요. 그때가 되면 아무 데도 나가지 못했거든요. 그해 겨울에도 함박눈이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어요. 눈보라가 심하게 부는 날이면 집안의 창문에 신문지를 두껍게 붙여야 해요. 바람에 유리가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바빴고 예준이는 너무너무 심심했어요. 모두가 잠든 밤 예준이는 방에서 몰래 나와 창문에 붙은 신문지에 동그랗게 구멍을 냈어요. 오려낸 조각을 떼내자 눈보라가 내리치는 마당이 보였어요. 창에 김이 서리는 탓에 풍경이 금세 흐릿해졌지만 눈보라 치는 마당을 보니 덜 심심한 기분이 들었어요. 밖을 보다 보니 정원의 식물들과 건너 집에 있는 아린이가 걱정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예준이네 마당에 동그란 무언가가 날아와 툭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보라 속에서 점점 빛을 내기 시작했어요. 예준이가 창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빛나는 건 아주 조그만 요정이었어요. 얼음처럼 투명한 요정은 온몸에서 빛을 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어요. 요정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자라나는 것처럼 소녀에서 숙녀로 숙녀에서 여인으로 모습이 바뀌어 갔죠. 한 가지 같은 건 얼음처럼 투명하고 반짝인다는 것이었어요. 춤을 멈춘 요정은 아린이네 집보다도 커져 있었어요. 예준이가 몸을 숙이고 창 너머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겨우 얼굴이 보일 정도였죠. 마당에는 반짝이는 보석으로 가득한 왕관을 쓰고 있는 눈의 여왕이 서 있었어요. 눈의 여왕은 아린이처럼 웃지는 않았어요. 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죠. 그래도 예준이는 캄캄한 눈보라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눈의 여왕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눈의 여왕은 몸을 숙여 예준이가 보고 있는 구멍으로 얼굴을 내밀었어요. 깜짝 놀란 예준이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자 눈의 여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버렸어요. 폭풍우가 지나가고 다시 아린이를 만나게 된 예준이는 눈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아린이는 예준이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겨울여왕이 조금 무섭게 생각되었어요. 



4.

 예준이와 아린이의 마당에는 수선화가 있었어요. 수선화는 겨울에도 피는 무척 강한 꽃이에요. 하얀 눈 사이에서 노랗게 피어난 수선화는 매우 예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부턴가 유독 예준이의 수선화만 더 반짝이기 시작했어요. 마치 하늘의 별이 빛을 내는 것처럼 밤에도 계속 반짝거렸죠. 아린이의 수선화가 그냥 노란색이라면 예준이의 수선화는 금방이라도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선명한 노란색이었어요. 같은 날 함께 심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죠. 아린이는 예준이의 수선화가 조금 부러웠지만 예준이가 기뻐하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해 여름 예준이의 수선화는 여전히 반짝거렸어요. 마당에 다른 꽃들도 환하게 폈지만 수선화가 너무 반짝이는 바람에 나머지는 보이지도 않았어요. 예준이는 수선화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말수도 줄었죠. 


 그러던 어느 날 예준이가 수선화의 향기를 맡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무언가 따끔한 것이 예준이의 눈으로 들어왔어요. "아얏"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자 아픈 기운이 사라졌어요. 아린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예준이를 바라봤어요. 예준이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요. 예준이의 눈에 들어간 건 악마가 만든 거울의 파편이었어요. 악마는 이번 겨울, 눈의 여왕에게 거울로 된 성을 선물하면서 눈보라 속에 거울 조각들을 넣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 거울은 보이는 모든 것의 색을 빼앗아가는 거울이었어요. 그리고 진짜가 아닌 것들만 빛나 보이게 만들었죠. 이제 예준이의 눈에는 수선화 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사실 수선화는 눈의 여왕이 거울 가루가 들어있는 눈을 잔뜩 뿌리고 간 꽃이었어요. 예준이는 더 이상 아린이의 웃는 얼굴이 예쁘지 않았어요. 색을 잃어 어둡게 보였거든요. 마당의 다른 꽃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수선화만큼 빛나지 않고 색깔도 없어 재미없게 느껴졌죠. 예준이는 더 이상 노래도 부르지 않고 아린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수선화 같은 꽃을 또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죠.



5.

 예준이는 수선화를 화분에 담아 홀로 여행을 떠났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제 꽃처럼 아름다운 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이렇게 빛나는 것을 찾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예준이의 마을은 아주 작아서 아직 악마의 거울이 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의아했지만 어린 예준이가 상심할까 봐 이렇게 말했죠. "그러게 무척 아름다운 꽃이구나. 이렇게 예쁜 꽃은 처음 보는걸?" 예준이는 속으로 으스댔어요. '그래 이런 꽃을 가졌을 리가 없지 이렇게 예쁜 꽃을 가진 사람은 나뿐인걸.' 왜냐하면 예준이 눈에 칭찬해준 사람들은 모두 색이 바라보였거든요. 한편 예준이처럼 눈에 거울이 들어간 사람들은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알아챘어요. 빛나는 꽃잎을 자기에게도 나누어 달라며 애원하기도 했죠. 도시에는 눈에 거울이 들어간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도시 사람들은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바깥에 있어야 했거든요. 도시와 가까워질수록 예준이는 인기인이 되어갔어요. 빛나는 수선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죠. 예준이는 수선화 덕분에 공짜로 밥을 먹고 선물을 잔뜩 받고 사람들의 찬사도 받았어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칭찬했어요. '저렇게 반짝이는 꽃을 가진 소년은 분명 대단한 사람일 거야. 게다가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니니 얼마나 행복할까?' 예준이는 작고 왜소한 아이였지만 사람들 눈에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인처럼 보였어요. 사람들은 예준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눈부신 수선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잘해주었죠. 


 어느덧 가장 큰 도시에 도착한 예준이는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쌓아진 성을 보게 되었어요. 얼음처럼 투명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성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어요. 뾰족한 성에서 나는 빛 때문에 다른 건물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죠. 예준이가 수많은 인파를 이끌고 건물 앞에 다다르자 커다란 성문이 열리고 눈의 여왕이 나타났어요. 눈의 여왕은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무척 아름다웠어요. 눈의 여왕은 예준이를 성의 꼭대기로 데리고 갔어요. 꼭대기 방에는 수선화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꽃들로 가득했어요. 예준이는 드디어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답니다. 눈의 여왕은 예준이에게 자신과 똑같이 반짝이는 보석이 가득 박힌 왕관을 선물해 주었어요. 왕관이 얼마나 빛나던지 예준이의 얼굴에 그늘이 질 정도였어요. 투명한 성은 바깥에서도 아주 잘 보였어요. 눈의 여왕은 반짝이는 왕관을 쓴 예준이를 성 밖의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창 가까이로 오게 했어요. 예준이의 왕관과 수선화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도 강렬해 눈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어요. 사실은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빛나고 색이 많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죠. 예준이의 몸은 눈의 여왕처럼 조금씩 투명해지기 시작했어요. 눈의 여왕처럼 텅 빈 눈을 가지게 된 예준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어요.



6. 

예준이가 사라지고 친구를 잃은 아린이는 슬픔에 빠졌어요. 할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재잘거리는 예준이의 목소리가 무척 그리웠답니다. 특히 아린이는 예준이의 노래가 듣고 싶었어요. 바쁜 어른들은 아린이만큼 슬퍼할 시간이 없었어요. 아린이는 항상 혼자였죠. 예준이의 마당에 새로운 수선화가 피어나던 날, 아린이는 예준이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이제 막 피어난 수선화를 조심스럽게 화분에 담아 숲으로 향했어요. 아린이는 기억력이 좋아 예전에 예준이가 들려주었던 눈의 여왕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었거든요. 수선화가 다시 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어요. 아린이는 예준이 할머니가 떠준 샛노란 털모자를 쓰고 도시로 향했어요. 


아린이가 숲을 걸어가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거울만 보고 걸어오는 할머니가 보였어요. 할머니는 발밑에 자갈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거울만 바라보며 걸었어요. 동그란 자갈을 밟은 할머니는 몸을 휘청였어요. 거울이 깨질까 두려웠던 할머니는 뒤로 넘어지려 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어요. 거울 속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아팠죠. 할머니는 죽는다면서 엉엉 우는 순간에도 거울을 꼭 쥐고 있었어요. 아린이는 할머니에게 얼른 달려가 허리를 조심스레 두들겨 주었어요. 그리고는 겨우 일어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까지 부축해드렸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울 때까지 할머니는 계속 거울 속 자기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아린이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눈을 빤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아린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허리가 조금 낫자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수프와 빵을 만들어 주었어요. 빵을 잔뜩 먹은 아린이의 눈이 감기려 하자 침대를 대신 내주기도 했죠. 아린이가 잠든 침대 머리맡에서 할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거울을 보지 않았어요.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린이의 얼굴을 봐야 했거든요. 곤히 자는 아린이는 정말 귀여웠어요. 아린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할머니는 수선화를 감추기로 했어요. 그게 왠지 아린이에게 중요한 것처럼 보였거든요. 


 잠에서 깬 아린이에게 할머니는 수선화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아린이는 기억력이 좋아 할머니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거짓말을 하냐고 물을 수 없어 할머니가 다시 꽃을 줄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기로 했어요. 할머니는 예준이만큼 말이 많았어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야기했죠. 아린이는 할머니도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할머니는 가끔 아린이에게 자기가 거울 속의 모습처럼 보이냐고 물어봤어요. 아린이는 있는 그대로의 할머니가 좋았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펼쳐둔 공책에 '거울 바깥의 할머니가 더 예뻐요'라고 적었죠. 할머니는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그날은 아린이에게 밥도 주지 않고 혼자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거울만 바라봤어요. 속상해진 아린이는 집 밖으로 나가 가끔 찾아오는 길고양이의 등을 긁어주기도 하고 작은 꽃을 따 모자에 꽂으며 시간을 보냈어요. 한참을 놀다 보니 바깥은 조금 어두워졌어요. 그러자 닫힌 우물 뚜껑 사이로 반짝이는 빛이 새어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아린이가 다가가 판자 틈 사이를 들여다보자 우물 안에 수선화가 빛나고 있었어요. 아린이는 빛나는 수선화를 보니 예준이를 빨리 찾아야 할 것 같았어요. 할머니 몰래 우물에서 수선화를 꺼낸 아린이는 다시 길을 떠났어요.     



7.

 아린이의 수선화도 빛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었어요. 꽃잎을 달라고 하거나 멋진 꽃이라고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었죠. 아린이는 어쩔 줄을 몰라 그저 빤히 사람들을 보다가 다시 갈길을 걸어갔어요. 어떤 사람은 아린이에게 화를 냈어요. 그 사람은 아린이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몰랐거든요. 아마도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아린이는 화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자 점점 무서워졌어요. 그때 산속에서 몰래 사람들을 지켜보던 여우가 아린이에게 다가왔어요. 여우는 아린이에게 말했어요. '저번에도 이런 꽃을 들고 가던 아이를 본 적이 있어!' 아린이는 여우를 쳐다보았어요. 여우는 사람의 말은 하지 못했지만 아린이가 자기 말을 알아들었고 그 아이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아린이의 눈을 보고 여우의 말로 이야기했어요. '그 아이는 커다란 도시로 갔어. 그리고 거긴 걸어가기엔 너무 멀어' 아린이는 몸을 숙여 여우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보았어요. 여우가 말했어요. '날 따라와!' 아린이는 작은 오솔길로 뛰어 들어가는 여우를 쫓아갔어요. 여우가 너무 빨라서 아린이는 계속 뛰어가야만 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빠르지 않다는 걸 여우는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여우가 멈춘 곳은 숲 한가운데 있는 아주 작고 어두운 돌집이었어요. 여우를 따라 멈춰 선 아린이가 가쁘게 숨을 내쉬었어요. 아린이는 할머니가 떠준 노란 털모자를 벗었어요. 온몸에서 땀이 났거든요. '이 집의 아저씨라면 네 고민을 해결해 줄 거야. 어때 고맙지?' 아린이는 겨우 숨을 진정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여우는 아린이가 손에 들고 있던 노란 털모자를 입으로 낚아채고는 이렇게 말하며 도망갔어요. '이건 네 고마움의 표시라 생각할게! 거기 문을 세게 세 번 두들겨!' 아린이는 깜짝 놀랐지만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돌집에는 쇠로 된 문과 동그란 손잡이가 있었어요. 아린이는 겁이 났지만 손잡이를 잡고 크게 세 번 두들겼어요. 그러자 안에서 묵직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들어오시오" 아린이는 돌문을 조심스레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집 안은 악마의 거울 속 모습처럼 아주 캄캄했어요. 집 안에는 흔들거리는 의자에 지팡이를 집은 할아버지가 앉아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멀뚱이 서있는 아린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너무 어두우면 불을 켜시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아 불을 켜지 않는다오'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아린이를 보고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린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왜냐면 말을 할 수 없었거든요. 아저씨에게 예준이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죠. 갑자기 속상해진 아린이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는 아린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당황했어요. "꼬마 손님이 온 모양이구나, 무슨 일이니 아가야" 아린이는 더 슬프게 울었어요. 할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아린이에게 다가왔어요. 그리고는 식탁 앞의 작은 의자에 아린이를 앉히고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어요. "진정하려무나" 할아버지가 준 물을 마시고 겨우 진정된 아린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하나씩 글씨를 쓰기 시작했어요. '저, 는, 말, 을, 못, 해, 요' 글자를 알아들은 할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거두고 환하게 웃었어요. "그래서 울고 있었구나?" 아린이가 다시 글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우, 린, 대, 화, 할, 수, 있, 는, 방, 법, 이, 없, 네, 요' 할아버지는 더 환하게 웃었어요. "그게 슬펐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이 집은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아린이는 할아버지의 손바닥에 여우를 만난 이야기를 적었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너도 나처럼 귀가 밝은 모양이구나, 우리 통하는 게 많을 것 같다."라고 말하며 아린이를 향해 방긋 웃었어요.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마침 도착한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가 누군가가 대문을 세 번 두들겼어요. "들어오게!" 할아버지가 대답을 하자 한 남자가 아린이 만한 또래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8.

 할아버지를 찾아온 사람은 대도시에 사는 할아버지의 친구였어요.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말이 잘 통하고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도시에 사는 아저씨는 가끔 딸을 데리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죠. 아저씨의 딸은 이곳이 익숙한지 오자마자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몰래 아린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어요. "이제 됐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저 아저씨가 대신 전해주면 우리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단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땐 한 사람이 더 필요한 법이거든" 아린이는 이제 슬프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건네준 공책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잔뜩 적었죠. 마치 예준이가 아린이에게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것처럼요. 공책 가득 적힌 이야기를 들은 아저씨와 할아버지는 표정이 심각해졌어요.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것 참 걱정스러운 일이로구나. 친구가 사라지다니" 그러자 대도시에 사는 아저씨가 말했죠. "나도 그 꽃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단다. 꽃을 가진 소년에 대해서도. 그 어떤 꽃도 그것처럼 빛나지는 않는다고 했어. 한 번은 그 성의 꼭대기에 초대받아 올라가 본 적이 있단다. 아주 멀리서 보았을 뿐이지만 그 애는 뭐랄까.... 말이 없었어." 아린이는 실망했어요. 그 아이가 예준이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대도시 아저씨가 덧붙여 말했어요. "대신 아주 가끔 높은 음의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구나 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아린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폴짝폴짝 뛰었어요. 아린이의 뛰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가 말했죠. "아무래도 그 아이가 맞는 모양이다. 저 아이를 그 성으로 데려다줄 수 있겠니?" 대도시 아저씨는 알았다고 하고 아린이를 데리고 도시로 향했어요. 아린이는 할아버지에게 반짝이는 수선화를 선물했어요. 할아버지는 고맙다며 아린이를 꼭 안아주었죠.  



9.

대도시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아저씨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도시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난 가끔 내가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거야. 할아버지는 귀가 밝아서 도통 속일 수가 없거든. 조금이라도 가짜를 말하면 금세 '이놈!!'하고 화를 내버리거든."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웃었어요. 아린이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어요. 아저씨의 딸도 함께 웃었죠. 도시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린이와 아저씨의 딸은 차 안에 스티커를 붙이기도 하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마음껏 놀았어요. 차가 성 앞에 도착해 멈추자 아린이는 금방 사귄 친구와 헤어져야 했어요. 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고 차에서 내렸어요. 아저씨는 창문을 내리고 "꼭 친구를 찾길 바란다!"라고 말해주었어요. 아저씨의 딸은 아린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조금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차가 출발하자마자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아저씨의 딸도 아린이와 헤어지는 게 서운했던 모양이에요. 아린이는 예준이를 찾으면 할아버지 집에 가서 꼭 다시 아저씨의 딸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아린이의 눈앞에는 엄청나게 뾰족하고 높은 눈의 여왕의 성이 있었어요. 아린이는 예준이를 만날 생각에 떨려하며 성안으로 들어갔어요. 



10. 

예준이가 성에서 생활한 이후로 눈의 여왕은 늘 말했어요. '특별한 건 가장 중요한 거야.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너는 선택받은 아이란다. 널 우러러보는 저 사람들을 보렴. 너같이 반짝이는 꽃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준이는 성에 살면서 더 이상 아무것에도 감동할 수 없게 되었어요. 반짝이는 수선화도 눈부신 얼음 성도 보석으로 가득한 왕관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얼음처럼 투명한 눈의 여왕도 더 이상 예쁘지 않게 느껴졌죠. 예준이는 다시 지루해졌어요. 예전에는 반짝이지 않는 꽃도 열매가 열리는 방울토마토도 모두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말이에요. 참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예준이는 노래도 잘 부르지 않게 되었어요. 뭔가 중요한 것을 빼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죠. 그래서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답니다. 눈의 여왕도 예준이의 노래를 좋아했어요. 예준이의 노래가 끊기자 무척 실망했죠. 예준이의 노래를 듣기 위해 반짝이는 고양이, 반짝이는 장난감 자동차들을 준비했지만 예준이는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린이가 성에 도착한 날은 마침 화가 난 눈의 여왕이 성을 비웠을 때였어요. 예준이는 오늘도 커다란 성에 홀로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죠. 성의 꼭대기로 올라온 아린이는 방 안에 홀로 있는 예준이를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했어요. 왜냐면 예준이는 눈의 여왕처럼 투명해져 있었거든요. 눈동자 안도 텅텅 비어있었고요. 거기다가 예준이가 쓴 왕관의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아린이는 성안에 있는 예준이의 수선화를 알아보았어요. 그리곤 왕관을 쓴 소년이 예준이라는 걸 깨달았죠. 성안은 무척 추웠어요. 아린이는 예준이에게 다가가 꽁꽁 얼어붙은 예준이의 손을 호호 불고는 손바닥에 글자를 썼어요. '노, 래, 해, 줘' 마치 김이 서린 창문에 글자가 써지듯 손바닥에 글자가 보였어요. 예준이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노래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 아'하고 소리를 내 보았죠. 사실 예준이는 목소리가 굵어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높은 성에서 혼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예준이는 자기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낯설었어요. 하지만 아린이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낮아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죠.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노래를 들은 아린이는 눈물을 흘렸어요. 예전에 예준이가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무척 힘이 났는데 지금은 뭔가 슬프게 느껴졌거든요. 아린이는 예준이를 꼭 안아주었어요. 아린이의 따뜻한 눈물이 예준이에게 닿자 예준이 눈에 박혀있던 악마의 거울이 눈에서 녹아내렸어요. 예준이의 몸은 점점 따뜻해지더니 얼음처럼 투명한 몸에서 따뜻하게 혈기가 도는 이전의 예준이의 모습으로 변해갔어요. "아린아!!" 예준이가 아린이를 알아보자 둘은 기뻐하며 얼싸안았어요. 예준이와 아린이는 자기도 모르게 함께 추던 춤을 추고 있었어요. 예준이의 눈에서 거울이 사라지자 예준이는 성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수선화도 마찬가지였어요. 머리에 쓰고 있던 왕관은 색이 다른 돌들이 박혀서 그렇게 무거웠었나 봐요. 예준이는 아름이의 손을 잡고 성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둘은 여전히 성의 가장 높은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숲으로 계속 계속 걸어갔어요. 가는 길은 조금 멀었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어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였거든요. 가는 내내 예준이는 계속 떠들었고 아린이는 계속 웃고 있었어요. 예준이와 아린이의 동네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둘을 맞이하러 나와있었어요. 예준이의 떠드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던 모양이에요. 노란 털모자를 쓴 여우도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은 예준이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며칠 동안 즐겁게 잔치를 열었어요. 잔치가 끝난 뒤 둘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와 엄마 아빠를 꼭 안아주었어요. 그리곤 마당으로 나와 각자의 정원을 살펴보았죠. 그사이 정원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자라 있었어요. 두 사람의 정원은 더 이상 똑같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같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자라난 꽃들이 무척 아름다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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