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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arn May 02. 2021

다자이 오사무처럼 1.

#02. Likewise

아빠는 문화인이었다. 돈이 조금만 생겨도 바닥이 날 때까지 써버리는 사람이었다. 가끔 벌이가 생기면 5만 원씩 용돈을 주기도 했었는데 그 정도에 고마움을 느끼기엔 항상 생활비가 부족했다. 20년 전쯤에는 단둘이 시간을 보내던 때도 있었다. 아빠는 레코드샵을 구경하다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라고 했다. 나는 늘 갖고 싶은 게 있었고 그날은 <헤드윅> DVD를 골랐다. 아빠는 참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단 아는 척을 하고 싶어 해서 이 감독은 처음 듣는 사람인데 내용은 어쩌고저쩌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딸이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아마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늘 집에 있었다. 나는 두 번째로 집에 있는 사람이라 아빠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게 너무 화가 났다. 몇 달에 한번 5만 원을 주는 일조차 어려워지자 아빠는 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엄마는 바빠졌고 언니도 그랬다. 집에 가만히 있을 때면 나만 아빠를 닮아가는 거 같아 화가 났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아있었고 그래서 아빠처럼 살게 될까 봐 늘 두려웠다. 사실은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누군가의 인생을 담보로 잡아야 했다. 담보물이 있었더라면 참 좋을 뻔했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나는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화가 나자 머리에서 뿔이 솟았다. 밑동이 두꺼운 투박한 뿔이었다. 뿔이 보기 싫어서 매일 같이 가족들을 들이받았다. 나라면 찔리는 순간 이러다 사람 죽는다고 난리 쳤을 텐데 우리 집은 전반적으로 맷집이 좋아 누구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뿔은 들이받으면 받을수록 더 길고 뾰족해졌고 부러지기는커녕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심지어 뿔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워진 뿔은 한 번에 심장을 노렸다.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나면 유능해진 기분이 들었다. 하루는 참다못한 아빠가 뿔을 잘라버렸다. 나는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나이테 두 개만 남은 내 몰골을 보고 아빠는 더 이상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다.


신기하게도 가슴의 멍이 아물자 나이테에 작은 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쾌활하게 노래하는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나이테가 있는 게 좋게 느껴졌다. 비를 맞거나 눈이 오면 새들이 전부 날아가 버린다. 나무 썩은 내가 나는 축축한 나이테를 보다 보면 다시금 마음이 파래진다. 그래서 나는 봄이 좋다.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에 나무가 마르면 금세 다른 새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여름은 장마만 견디면 그럭저럭 지낼만하다. 가을도 좋다. 문제는 겨울인데 나이테가 파삭파삭해질 때까지 보일러를 틀어야 한다. 온난화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다. 북극곰이 와준다면 추워도 괜찮다. 그땐 나이테 옆에 코카콜라 한잔을 준비하겠다. 스타들은 언제나 스폰서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얼굴이 기름진 산타는 데려오지 않겠다. 코에 불이 나는 사슴들이 너무 불쌍하다. 그런 걸 루돌프라고 부른다지.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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